45 - Price.
“볼!”
지혁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더블헤더의 2차전 선발투수가 불리한 점. 이미 타자들이 1차전에서 공을 충분히 봤다는 것이다.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
샬럿 나이츠의 타자들은 1차전에서 6번씩 타석에 들어섰다. 그렇기에 아슬아슬한 공들을 평소보다 더 잘 골라냈다.
첫 타자인 마이카 존슨부터 풀카운트 승부를 몰고 갔다. 솔리스는 아직까지 싱커 싸인을 보내지 않았다.
‘첫 타자야. 볼넷은 안 돼.’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지혁은 진작에 글러브 속에서 싱커 그립을 잡아두었다.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한가운데에 꽂아 넣을 것이다. 존슨이 한 번 타석에서 물러서고, 두 번째 교환에서야 마침내 솔리스가 싱커 싸인을 냈다.
지혁은 곧장 팔을 들어올렸다. 두 손가락 모두 실밥에 갈고리를 박은 듯 단단히 고정해 놓은 상태였다. 어깨를 빠르게 돌리고, 팔을 채찍처럼 휘감아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을 때려냈다. 검지와 중지가 힘껏 실밥을 채는 순간에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스윙! 배터 아웃!”
한가운데로 날아가던 91마일짜리 싱커가 홈플레이트에 닿기 직전에서야 바깥쪽으로 가라앉으며 존슨의 배트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솔리스가 나이스 볼을 외치며 공을 내야로 한 바퀴 돌렸다.
지혁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던져온 웹의 싱커를 고쳐서 던진 첫 공이었다.
‘이 느낌... 깔끔한 삼진이 아니야. 파괴적인 삼진이지.’
“나이스 볼!”
형진이 슬쩍 웃으며 공을 되돌려주었다. 지혁도 씨익 웃었다. 더램에 올라와서 가장 피가 끓어오르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
7월 31일, 오후 6시 30분. 디트로이트 프런트 오피스.
“스마일리의 자료가 다 넘어갔습니다. 레이스에서 검토하고 있는 중이고, 의료진의 보증서도 넘어갔으니 아마 두 시간 안으로 답이 올 겁니다.”
다렉 브라우네커는 이제 자신의 일은 끝났다는 듯이 속 편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돔브로스키 단장은 여전히 전화기 앞을 떠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걸려온 앤드류 프리드먼의 전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월 스트리트를 주름잡았다던 어린놈이 이 판에 들어온 이후 그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 바닥에서 훨씬 더 오래 몸담았던 자신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둔 천재적인 단장이었다. 아무도 탬파베이라는 팀이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할 줄은 몰랐으니까.
언제나 패기만만했고, 또 언제나 사람들의 찬양을 들으며 야구계에 새로운 관점을 끌어들였다. 검증된 선수를 팔아 유망주를 모은다. 야구가 중심이 아니라 수학과 통계를 중심으로 해서.
마음껏 그러라고 하라지.
돔브로스키는 콧방귀를 끼었다. 검증된 선수보다 유망주가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이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야구는 장기전이다. 또 동시에 단기전이기도 하다. 눈앞의 승리를 쟁취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들이다. 그는 오직 우승을 위한 야구를 할 뿐이다.
그렇기에 프라이스는 누구보다 탐나는 자원이었다. 시즌 초반 믿었던 벌랜더가 부진했고,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불펜이 난조를 보여서 지구 1위 자리가 위협받고 있었다. 캔자스시티 로얄스가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프라이스라는 위대한 투수의 합류는 분명히 팀에 플러스가 될 것이다.
“단장님. 레이스 쪽에서 전화입니다. 프리드먼 단장입니다.”
“연결해.”
잠시 뒤 프리드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통화할 때보다는 그래도 퍽 안정되어 있는 목소리였다.
“스마일리의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이상 없더군요.”
“드류는 괜찮은 투수야.”
“알고 있습니다. 프라이스 쪽도 이상 없겠죠?”
“물론이네. 누가 프라이스를 의심하겠나?”
“그럼 됐습니다. 프랭클린은 얘기가 확실히 된 것, 맞습니까?”
“물론. 우리가 시애틀에 오스틴 잭슨을 보내고, 시애틀은 우리에게 닉 프랭클린을 주기로 했네.”
“좋습니다. 그럼 프라이스의 대가는 스마일리, 프랭클린, 그리고 아다메스입니다.”
“좋네.”
“알겠습니다. 최종 확인할 때 다시 연락드리죠.”
돔브로스키는 마지막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수화기 너머 프리드먼이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입에 머금었던 말을 혼자 낮게 내뱉었다.
“그 프라이스의 대가인데... 정말 이걸로 좋다고?”
의아함이 가시지 않는다. 아직 1년이 남았는데도 프리드먼이 이렇게 떠밀리듯 프라이스를 처분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
“케이트! 디트로이트 쪽은 협상 완료야. 시애틀은 어때?”
“네이트 칸스를 검토한다고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젠장. 시간이 없어. 한 번 쪼아 봐.”
“아직 5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괜찮아. 압박을 조금 더 해. 이대로 끝나면 100% 손해니까.”
“알겠습니다.”
프리드먼은 한숨을 돌렸다. 타이후안 워커라는 에이스 포텐을 지닌 선수를 얻지는 못하겠지만, 드류 스마일리라는 3~4선발 급의 선수로 어느 정도 급한 불을 껐다. 오랫동안 탐을 내던 내야수 프랭클린도 어찌어찌 데려올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판에 뛰어든 디트로이트 때문에 뒤통수가 얼얼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우...”
잠시 쉬는 동안 TV로 시선을 돌렸다. 더램 불스와 샬럿 나이츠의 더블헤더 2차전. 5회로 접어든 상황에서도 스코어는 0대0이다.
5회말 샬럿의 공격.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는 6번 조쉬 페글리.
마운드에 선 지혁은 서서히 와인드업 하더니 몸쪽을 강하게 파고드는 패스트볼을 존에 꽂아넣었다. 자기 스윙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어정쩡한 체크 스윙 삼진. 페글리가 답답해하며 헬멧을 벗고, 카메라는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오는 지혁을 원샷으로 잡았다. 그리고 자막이 떴다.
샬럿 나이츠. 득점 0, 안타 0, 실책 0.
“노히트? 또?”
프리드먼은 눈을 한 번 비볐다. 더램에 합류해서 이제 겨우 세 경기 째를 치르고 있는 선수다. 아직 더램의 환경에 적응을 채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 셈이다.
그런데 이 피칭은 또 뭐란 말인가. 프리드먼은 컴퓨터를 켜 선수들의 기록이 라이브로 업데이트 되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Ji-Hyuk, Moon. 5 IP, 7 SO, 0 BB, 0 H, 0 R.
삼진 7개. 무사사구. 나머지 8개 아웃카운트 중 내야를 벗어난 공은 단 한 개였다. 기록지에는 자세하게 표시되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1루를 살짝 넘어간 파울 지역에서 우익수가 한참을 내려와 잡아낸 플라이였다.
“흠...”
단순히 미지의 존재인 줄 알았다. 선수의 포텐셜을 재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패트릭 에이버리의 선수라서. 그 선수가 뜬금없이 싱커를 던진다고 해서.
처음의 기대가 아주 없었던 것에 비해 실력은 꽤 괜찮았다. 비디오 몇 경기를 봤고 생각을 바꿨고, 윈터리그에서 승부하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언젠가는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을 법한 선수라고.
그런 선수가 몽고메리에 합류해서는 10승을 순식간에 거뒀다. 더블 A에서 재수하고 있는 빅터 마테오보다도, 싱글 A의 에이스였던 딜런 플로로보다도, 드래프트 1픽 출신인 그레이슨 가빈보다도 더 압도적인 투구를 보여주면서. BA가 변한 이후로 풀타임을 치른 적 없는 그를 레이스 팀 내 5위로 평가할 정도의 퍼포먼스였다.
솔직히 이즈음부터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이런 페이스로 마이너리그를 폭격했던 건 프리드먼이 구단을 맡은 이래로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유일했다.
루키로 드래프트 되자마자 루키리그, 싱글 A를 전반기에 평정하고, 더블 A와 트리플 A를 차례로 박살내면서 기어이 드래프트 된 다음 시즌에 바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프라이스.
지혁에게는 프라이스가 마운드에 설 때 풍기는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힘과 구위는 없었다. 마운드 위에서 노련해 보이지만 요행도 좀 곁들여진 것 같은 피칭으로 10승을 거둔 것이다.
그래서 더램으로 올렸다. 콜로메나 로메로, 몽고메리, 칸스, 안드리스 같은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벽을 한 번 느끼게 해 주는 게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아주 작은 희망도 있었다. 혹시 프라이스처럼 리그를 폭격할 투수인 건 아닐까? 더램에서도 이 성적을 유지하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지금 모니터 속에 비치고 있는 문지혁이라는 투수가 그 아주 작은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프리드먼이 쥐고 있는 볼펜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 2의 프라이스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환희와 쾌락이 조금씩 커져갔다.
*
6회말. 7-8-9번으로 이어지는 하위타선을 상대하는 지혁은 싱커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마운드에서부터 홈플레이트까지 날아오는 그 찰나의 시간에 날뛰는 것처럼 파고드는 공이 잔상에 남아있던 타자들은 번번이 타이밍을 놓쳤다.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쓰는 패스트볼과 거기서 살짝 벗어나는 슬라이더. 아주 가끔씩 던지는 커브와 체인지업은 공략할 수 있을 법한 공이었는데도 맞추지를 못했다.
“야. 오늘 날 잡았냐?”
6회에 아웃카운트 세 개를 모두 잡아낸 형진이 지혁의 옆에 앉으며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마치 펑고 연습이라도 하는 양 정면으로 향한 가벼운 타구들을 반복해서 처리했다. 지혁은 형진의 어깨를 툭 쳤다.
“다 너한테 보내라며? 너 실책 하나 할 때까지 계속 보낼거야.”
“그때 그 스테이크 아직도 담아두고 있냐? 하하하.”
“각오해라, 진짜. 둘이 먹었는데 223달러 나왔다.”
“그거 세고 있었냐? 지독한 놈.”
18개 아웃카운트 중에 형진이 처리한 게 6개. 이상하게 유격수 쪽으로 공이 많이 가는 날이다. 형진처럼 수비가 좋은 유격수가 뒤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문! 손 좀 줘봐.”
알렌 투수코치가 노닥거리는 지혁에게 다가왔다. 지혁은 왼손을 내밀었다. 알렌은 자신의 주먹을 지혁의 손에 얹었다.
“어때? 한 번 꽉 쥐어 봐.”
꽈악. 손끝의 악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 알렌도 느껴지는 힘에 만족했는지 슬쩍 미소를 보였다.
“좋아. 나머지 3회 동안은 다시 싱커 위주의 피칭을 해 봐. 아직 쌩쌩하니까.”
“네. 안 그래도 다시 던지려고 생각 중이었어요. 오늘 컨디션도 죽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싱커도. 뒤를 받치는 수비도. 오늘의 컨디션도. 경쟁자들에 비해 앞서나가고 있는 오늘의 이 상황도. 메이저리그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
“단장님. 잭 쥬렌식입니다.”
“전화 받을게. 2번으로 해 줘.”
“바로 통화하시면 됩니다.”
프리드먼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전화를 들었다.
“앤드류.”
“잭. 마음은 정했습니까?”
“프라이스 딜은 미안하게 됐어.”
“됐습니다.”
“워커를 내줄 수 없다는 이사들의 반발이 너무 심했네.”
“잭. 프로답게 하시죠. 네이트 칸스 딜만 얘기합시다. 할 겁니까?”
잠시 적막이 흘렀다.
“우리는 칸스가 당장 메이저리그 선발로 뛸 수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요구했던 다니엘 파쿼와 타일러 오닐. 이 딜 하지.”
“오케이. 자료 보내겠습니다. 더 할 말 있으십니까?”
“... 아니. 고맙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잭. 이 바닥에서 선택을 뒤집는 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래. 다음에 밥이나 한 번 하지.”
프리드먼은 쥬렌식의 마지막 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의 귀에 들린 것은, 잔뜩 흥분하고 있는 방송국 캐스터의 멘트였다.
[ 8이닝도 세 명으로 정리합니다! 24명을 상대해서, 24명 모두 처리했습니다! 지-혁! 문! 더램 불스에 뉴 에이스가 나타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