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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48화 (49/204)

48 - 선물(2).

“기자회견은 처음이죠?”

“네. 고맙습니다.”

프리드먼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케이트가 물 한 병을 건넸다. 지혁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물병을 따 한 모금 축였다.

“너무 떨지 말아요. 별 거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케이트가 주위를 한 번 살피며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췄다.

“혹시 패트릭 어디 있는지 알아요?”

“패트릭? 내 에이전트, 패트릭이요?”

“네.”

“패트릭은 갑자기 왜 찾으시는 거죠?”

케이트의 표정에 순간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아, 저. 그, 미팅을 할 날짜를... 날짜를 잡아야 해서요. 네. 미팅.”

“미팅이요? 무슨 일로?”

“아...”

“말하기 곤란한 일인가요? 그러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제가 말씀드리기는 좀 그래서요.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때마침 프리드먼이 회견장 문 앞에 나타났다. 케이트는 얼른 얼굴빛을 바꾸고 예의 그 철저한 비서로 돌아왔다.

“준비됐습니까?”

“네.”

“그럼 들어가죠.”

프리드먼이 앞장서 회견장의 문을 열었다. 따라 들어가려던 지혁이 잠깐 케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디트로이트에 있다고 했어요. 나도 자주 연락하는 편은 아니어서요.”

순간 케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

기자들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가 조금 낯설었다.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지혁에 관한 기자회견인 동시에, 프라이스 트레이드 이후 프리드먼이 갖는 공식적인 첫 회견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기자들이 전부 모인 것 같았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쓰셨습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하지만 지혁에게 쏟아지는 질문의 내용은 비슷했다. 어제 경기가 끝나고 마이너리그 기자들과 나눴던 문답이 반복되고 있다. 덕분에 대답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더구나 지혁의 머리는 마운드에 섰을 때처럼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기자들의 질문 속에 뼈가 있는 건 아닌지, 또 답변하는 단어 하나에 따라서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커지지는 않을 것인지. 이런 것들을 계산해야 했다. 그렇게 지혁은 일부러 평소보다도 더 노련하게 대답했다. 몇몇 질문에는 환하게 웃었다가 또 갑자기 진지해졌다가. 가끔은 일상생활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 고급스러우면서 어려운 단어를 섞기도 했다. 맨 첫줄에 앉은 mlb.com의 에디터 중 한 명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뜨는 게 꽤 웃겼다.

샘 호킨스도 기자들 무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질문 차례를 기다리다 눈이 마주치자 호킨스가 눈인사를 살짝 보냈다. 지혁은 못 본 척 했다. 저 사람과 인터뷰하는 것도 특별한 일이었지만 지금도 만만치 않게 중요하다. 스프링캠프 때 아주 잠깐 선보였던 것을 제외하면 이번이 첫 선을 보이는 기회니까 말이다. 메이저리그에.

퍼펙트게임에 대한 이야기, 몽고메리에서의 승격하기까지의 이야기, 더 과거로 거슬러 윈터미팅에서 탬파베이와 계약을 맺게 된 이야기까지. 지혁을 포커스로 했던 질문들이 한 차례 쏟아지고 나서, 기자들의 목표물이 점점 프리드먼 단장 쪽으로 옮겨갔다.

마치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라는 느낌이다. 마이너리그 투수의 퍼펙트게임보다 데이비드 프라이스의 충격적인 트레이드가 훨씬 더 많은 조회수를 보장하니까 당연한 일이다. 사실 여기 온 기자들 중에 지혁의 이름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프라이스의 대체자로 스마일리 선수를 선택하셨습니다. 무게감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는 평가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라이스는 이 리그에서 누굴 데려다 놔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는 선수입니다. 스마일리는 그런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팀에 알맞은 선수라고 생각하고 있고, 적응을 잘 해서 자신의 기량만 보여준다면 충분합니다. 물론 아직 어린 선수고 더 성장할 여지도 있고요.”

“프라이스의 이탈은 이번 시즌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는데요.”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남은 선수들이 충분히 잘 해 주고 있고, 타격이 상승세로 돌아섰기 때문에 반등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닉 프랭클린은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당초 시애틀과의 연결에서 프랭클린을 점찍으셨던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기자들의 질문이 보다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프리드먼도 팬들의 불만을 이해하고 있는 듯 최대한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임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임해도 그 불만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통을 최대한 줄이려는 모습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만만하게 했을 대답도 답이 좀 오래 걸리기도 했다.

천하의 프리드먼도 꽤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구나. 지혁은 옆에서 듣고 있으면서 그렇게 느꼈다.

프라이스에 관련한 질문들이 파도처럼 몰아치고 난 후, 어제 일어났던 또 다른 트레이드 한 건에 대한 질문을 던진 기자가 있었다. 샘 호킨스였다.

“네이트 칸스가 시애틀로 갔습니다. 제가 당장 칸스에 대한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던 타이밍을 또 어떻게 아시고... 하하하.”

열이 올라 있던 회견장의 분위기를 좀 바꾸려는 듯 농담을 약간 섞은 호킨스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물었다.

“칸스는 팜 내 유망주 랭킹에서도 TOP 10 안에 들어가는 선수였고, 또 더램 불스에서도 가장 성적이 좋던 투수였습니다. 실제로 5선발 자리에 가장 가까운 게 칸스로 보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칸스를 내주고 받아온 선수가 불펜인 파쿼와 외야수 유망주인 오닐입니다. 선발투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평소의 지론과 조금 다른 트레이드였다고 보입니다만.”

“음...”

프리드먼이 슬쩍 말을 흘렸다.

“칸스는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뛸 준비가 되어 있던 선수였습니다. 우리도 몇 번 메이저리그에서 테스트를 하기도 했었죠. 즉시 전력감이었지만, 또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저희가 원하는 선수들을 얻어올 수 있었던 겁니다. 대가를 얻기 위해서는 지불해야만 하는 법이니까요.”

“그러면 이 트레이드의 목적은 오직 대니 파쿼와 테일러 오닐을 얻는 것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중요한 이유였죠. 파쿼는 솔리드한 왼손 불펜이고, 테일러 오닐은 미래가 매우 기대되는 어린 선수니까요.”

호킨스는 자신에게 배정된 세 개의 질문을 여기서 한번에 다 쓰기로 결정했다.

“하나만 더요. 많은 사람들이 더램 불스의 선발진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더램에 투수들이 많아서 40인 로스터를 채우는 것도 굉장히 빡빡했는데요. 오늘 옆에 있는 문지혁 선수도 치고 올라오고 있죠. 문지혁 선수가 마이너리그 5년차. 이번 시즌이 끝나면 룰5 드래프트 대상자가 됩니다. 40인 로스터를 비워내기 위한 트레이드였다고 봐도 될까요?”

“아아.”

프리드먼이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더니 대답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대답하도록 하죠. 우리가 고려했던 부분 중 하나인 건 맞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구단의 기록까지 만들어 냈으니... 칸스의 자리를 문이 채워줄 수 있다고 봅니다.”

호킨스의 차례가 끝나자 다음 기자가 이어받았다. 양복의 깃에 FOX의 로고 모양으로 만들어진 배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니 호킨스의 후배인 듯했다.

“40인 로스터의 변동을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프라이스와 칸스가 빠진 자리에는 스마일리와 파쿼가 들어갈 겁니다. 프랭클린도 40인에 바로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로스터가 꽉 차죠.”

노트북 타자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는 동안, 프리드먼이 끝난 것 같던 답변에 하나를 추가했다.

“그리고... 에릭 베다드는 오늘 아침 웨이버 클레임 되었습니다. 베다드의 자리에 문을 넣을 생각입니다. 룰5 드래프트로 이런 선수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

프리드먼이 손으로 지혁의 어깨를 한 번 잡으며 말했다. 기자회견 내내 기다렸던 말이다. 회견장에 선물을 하나 더 마련해 두었다고 했을 때 사실 이미 직감했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몸이 살짝 떨릴 정도로 기뻤다.

전생에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 안에 들은 것은 진짜로 메이저리그에 올라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 마이너리그에 있을 땐 항상 룰5 드래프트 대상자였다. 마이너리그에서 5년 이상을 보냈지만, 팀에서 보호되지는 않았던 대상자. 한 시즌을 마칠 때마다 어느 팀에서 이 선수를 데려가도 무방하다는 의미의 선수.

룰5 드래프트를 통해 데려간 선수는 1년 동안 의무적으로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에 포함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지혁을 뽑아간 적이 없었다. 지혁처럼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듯 말 듯한 나이 든 선수에게는 40인 로스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를, 지혁은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 팀에서 메이저리그에서 뛰기에는 부족합니다. 다른 팀에서 당신을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할 거라면 당신을 데려가도 상관없습니다.

룰5 드래프트 대상자는 정확히 이런 의미다. 소속팀에서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룰5 대상자로 다른 팀으로 쉽게 이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 하지만 룰5 대상자에 들어있다는 것은 원 소속팀에서 40명을 넘지 못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 다른 팀에 가서도 25인 로스터 안에 들 만한 가치가 거의 없다는 뜻.

40인 로스터 안에 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기다려왔다. 프리드먼 단장은 이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그 사실을 발표했다. 이 기자들이 기사를 써댈 것이고, 야구팬들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소감을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겠네요. 문지혁 선수?”

호킨스가 옆구리를 찌른 것인지, FOX의 후배 기자가 지혁을 향해 물었다.

“어...”

테이블 앞에 마련된 마이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할 말을 생각했다. 기분 좋은 낮은 마이크 메아리가 회견장을 감싸 안는다.

지금까지의 기자회견은 철저하게 계산하면서 대답했었다. 기자들은 지혁을 미스테리하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싱글 A에서 방출된 선수가 40인 로스터에 들기까지 걸린 시간이 1년도 채 안 됐으니까.

은연중에 속마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애쓰면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기자들을 한 번 둘러봤다. 이번 질문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기자들이 미스테리함을 갖게 되면 더 관심이 쏟아질 것이고, 기자들이 기사를 더 쓰면 쓸수록 관심도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정말 너무 기쁩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스프링캠프에 합류했을 때만 해도, 그 자체가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몽고메리에서 뛸 때도, 또 지금 더램에서 뛰고 있으면서도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싱글 A에서 방출 당했던 투수라는 마음으로 모든 경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구단에서 메이저리그에 합류할 수 있을 거라고 항상 기대해 왔고, 오늘 그 기대에 한 발 다가섰네요.”

그리고 지혁은 또박또박, 단호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아주 잠시 동안, 회견장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노트북을 치던 기자들의 손도 잠깐 멈춰서 타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전부 지혁을 바라보고 있다. 지혁도 그 기자들의 눈빛을 전부 받아냈다. 그렇게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다음 기자의 질문으로 넘어섰다.

‘와우.’

호킨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리지만 노련한 선수라고 생각했다. 다른 어떤 기자들보다 지혁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문지혁이라는 사람은 그럴 때마다 그 기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야구 내적으로도, 야구 외적으로도.

방금 전의 한 마디가 기자회견장을 일순간 압도했다. 겸손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관망하는 것 같은 아우라가 있는 대답이었다.

기자들 중 꽤 많은 숫자가 매우 악의적이면서 또 공격적이고, 오만하다. 단순히 자신감을 표출하는 발언을 해도 그것을 비뚤게 보는 놈들은 이 바닥에 널렸다. 당장 이 회견장에서만 그런 녀석들을 두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다.

호킨스는 방금 지혁이 나쁜 의도로 기사를 쓰려던 녀석들에게 한 방 제대로 먹였다고 느꼈다. 새로운 면을 발견할수록, 지혁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단언컨대 온 미국의 야구선수들 중에 가장 알 수 없는 선수다. 문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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