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49화 (50/204)

49 - 꿈의 무대.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이후 등판한 8월 5일, 리하이밸리 아이언피그스를 상대로 5이닝 3실점으로 3승째를 거뒀다.

대기록을 세운 투수들이 다음 경기에서 쉽게 무너진다는 속설에서 완전히 피해 가지는 못한 피칭이었다. 1회에 선두타자에게 홈런을 내줬고, 3회와 5회에도 장타를 허용하며 1실점씩을 추가했다. 하지만 타자들이 다섯 점을 뽑아주며 기분 좋은 승리를 이어갔다.

“싱커가 괜찮아서 다행이었어요.”

“내가 볼 때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더군요.”

패트릭이 늘 그렇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제구가 아직 잘 안 되긴 해서. 계속 던져봐야죠.”

“코치들이 그렇게 하라고 합니까?”

“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제구를 잡으려면 폼을 조정해야 해서. 물론 제구가 이대로 계속 안 잡히면 시즌 끝나고 폼을 손봐야겠지만.”

“제구가 아주 안 잡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많이 던져서 잡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뭐. 코칭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서.”

“아, 맞다. 그리고.”

“또 뭐요?”

지혁은 패트릭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프리드먼의 비서 말입니다. 아는 사이에요? 케이트인가 하는 그 여자?”

“케이트? 네. 왜요?”

“저번에 기자회견 할 때 당신을 찾던데.”

“나를?”

패트릭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도 모른다고. 그냥 디트로이트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요.”

“하!”

패트릭이 짧은 한탄 섞인 소리를 냈다. 지혁을 만난 이후로 가장 격한 반응이어서 지혁도 살짝 놀랐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하... 정말 그 말만 했습니까?”

“네. 내가 하면 안 되는 실수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인데. 그런 거예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닌데...”

패트릭은 말꼬리를 흐렸다. 지혁이 여러 번 보채고서야 패트릭이 대답했다.

“내가 잘 아는 에이전트가 한 명 있는데. 걔를 통해서 디트로이트의 데이브 돔브로스키를 부추겼어요. 프라이스를 향해 달려들라고.”

“... 예?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원래 프라이스는 시애틀로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타이후안 워커가 대신 올 예정이었고. 타이후안 워커는 지금 탬파베이에 와도 2선발은 그냥 꿰찰 수 있는 선수입니다. 그래서 난 타겟을 스마일리로 바꾸는 게 낫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돔브로스키를 설득한 겁니다. 그 사람은 좋은 선수를 영입한다고 하면 눈이 확 뒤집히는 사람이라서.”

“패트릭. 당신 혹시...”

몽고메리에 있을 때도 패트릭이 디트로이트에 간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호킨스와 첫 인터뷰를 했던 날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지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5월 말 즈음인가? 디트로이트 간 적 있죠? 설마 그 때도 그 일로 간 겁니까?”

“기억력 꽤 좋네요. 맞아요. 프리드먼이 시애틀에 접근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였어요. 타이후안 워커라니까, 당연히 안 되지. 게다가 시애틀에서는 유망주 투수까지 또 내주려고 했어요.”

“팀에 에이스급 투수가 오는 걸 막았다...”

무슨 감정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곧 짐작하게 되었다. 팀에 대한 죄책감이 반. 그리고 패트릭에 대한 고마움이 반이었다. 지혁은 자신의 감정이 맞는 것인지 확인하듯이 물었다.

“나 때문에?”

“그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을 합니까?”

하. 낮은 한숨이 흘러다녔다. 지혁도, 패트릭도 모두 한숨을 쉬었다. 물론 다른 이유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똑같았다.

“케이트하고는 내가 정리합니다. 당신은...”

“네. 진입장벽은 확실히 낮아졌으니까요. 덕분에.”

“선발 로테이션에 자리를 잡아요. 내년부터는 메이저리그 선발로 시즌을 시작하는 겁니다.”

패트릭과의 첫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목소리만 듣고도 데이토나 컵스에서 방출당한 지혁임을 알아챘던 사내. 어떤 과거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하의 앤드류 프리드먼을 뒤에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천재 에이전트.

그가 꽤, 아니 매우 능력이 좋은 에이전트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패트릭 에이버리의 살짝 찌푸린 인상이 오늘따라 조금 더 친근해 보였다.

*

프라이스가 떠나고 스마일리가 합류한 탬파베이는 오히려 기세를 더 끌어올렸다. 시즌 초 단체로 바닥을 치던 타격이 6월 말부터 서서히 살아나더니 기존의 단단했던 투수진과 합세해 승률을 꽤 끌어올렸고 8월에 들어서는 5할 승률까지 목전에 두고 있었다. 시즌 초반에 승패 마진이 ?11까지 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선전이었다.

많은 우려를 자아냈던 드류 스마일리는 탬파베이에 합류한 이후 두 경기 만에 7.2이닝 무실점으로 첫 승을 기록했다. 그의 커리어 최장 이닝 투구였다. 물론 워커를 스마일리로 바꾼 패트릭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팬들은 스마일리에게서 프라이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며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그렇게 8월 중순을 넘어서 간다. 마이너리그 시즌은 마감하기까지 팀당 15경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메이저리그 시즌은 팀당 100경기 이상을 치른 시점. 지혁은 더램에 합류한 이후 일곱 번째 선발 등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 싱커 죽이는데? 역시 퍼펙트피쳐.”

“너 토스 배팅 다 쳤냐? 왜 자꾸 아까부터 주위에서 얼쩡거려?”

“토스 다 쳤으니까 여기 있지.”

“할 거 없으면 펑고라도 받던가.”

“펑고도 다 받았거든.”

불펜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형진이 알렌의 흉내라도 내는 듯 팔짱을 끼고 서서 장난을 걸었다. 퍼펙트게임을 한 번 하고 난 이후 지혁의 별명은 퍼펙트피쳐가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조금 낯 뜨거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만. 형진은 계속 히죽거리면서 그 별명으로 불렀다. 지혁은 싱커를 두어 개 더 던지고 나서 글러브를 벗었다.

“오늘은 좀 쳐 줘라. 어째 내가 올라가는 경기에서 넌 안타 하나도 못 친 거 같은데? 아니냐?”

“그랬나?”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는 거 같은데.”

“와~ 또 섭섭하게 하네. 내가 뒤에서 공을 얼마나 건져 줬는데.”

“어쨌든 오늘은 하나 제대로 좀 쳐 봐. 홈런 치면 내가... 아니다. 너 엄청나게 쳐먹지.”

“살래? 그때 그 스테이크?”

지혁은 벗어둔 글러브로 형진의 머리를 한 번 내려쳤다.

“사줘봐라, 쫌!”

“어떡하냐? 실책을 안 하는데.”

“하.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는 동안 알렌이 저 멀리서 지혁을 향해 다가왔다.

“문. 컨디션은 좀 어때?”

“아주 좋습니다. 오늘 싱커도 잘 들어가서 존 구석을 잘 찌를 수 있겠어요.”

“다행이네. 오늘 이기면 지구 우승 확정이야. 방금 그위넷이 졌어.”

“오. 그래요?”

노포크 타이즈와 경기를 치렀던 그위넷 브레이브스가 패하면서 더램과의 격차가 일곱 게임 반으로 벌어진 것이다. 오늘 지혁이 팀에 승리를 가져오면, 더램은 작년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트리플 A 인터내셔널 리그 남부지구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지구 우승을 확정짓는 경기에서의 선발 등판. 기분 좋은 일이다.

“부담 갖는 건 아니겠지?”

“부담요? 무슨 부담이 있겠어요. 오늘 못 이기더라도 내일 이기면 우승할텐데. 하하.”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래도 기분 좋게 제가 끝내겠습니다.”

오늘의 싱커가 제대로 꽂히고 있어서, 지혁은 자신감이 넘쳤다. 게다가 그위넷은 더램에 올라와서 벌써 세 번째 만나는 상대였다. 이미 상대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

낮 경기의 첫 등판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오늘처럼 어제는 야간 경기를 치르고,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낮 경기를 가져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사람의 생체 리듬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그 부자연스러운 느낌에서 먼저 탈피하는 것이 낮 경기의 초반 승부를 좌우한다. 그리고 그 낯설음에서 가장 먼저 벗어날 수 있는 선수가 바로 마운드에 선 지혁이었다.

‘내가 전생에 낮 경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아이패치를 짙게 바르고 선글라스까지 낀 타자들이지만 스윙이 어딘지 어색하다. 타이밍을 전혀 잡지 못했다. 오늘 지혁은 일부러 커브까지 섞어가며 타이밍을 빼앗았다.

완급을 조절하고, 필요한 순간 춤추는 싱커를 박아넣고. 1회 세 타자를 상대로 파울 2개를 제외하고는 공에 방망이를 맞춰주지도 않았다. 쾌조의 시작이었다.

2회초, 5번부터 시작된 더램의 공격에서 선취점이 났다. 원아웃 상황에서 6번 빈스 벨놈과 7번 윌슨 베테밋이 연속 볼넷으로 출루했고, 9번으로 나선 형진이 우측 선상을 타고 흐르는 3루타를 때려내 두 명을 불러들인 것이다. 3루쪽 더그아웃을 쓰는 더램의 벤치 바로 앞에서 활짝 웃던 형진이 지혁을 한 번 손으로 가리켰다.

“또 사야 되나? 저 새끼 진짜...”

지혁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형진 개인에게도 꽤나 오랜만에 터진 장타라서 더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나저나 오늘은 너무 술술 잘 풀리네.’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끝나가는 여름의 뜨거운 햇살마저도 그랬다. 모처럼 습기도 별로 없는 쾌적한 날씨였고, 야구는 생각대로 되고 있다.

지혁은 2회에도 세 타자로 마무리했다. 빗맞은 내야안타 하나를 내주었지만, 다음 타자에게 싱커를 던져 곧장 병살타를 유도해냈다.

“굳. 마지막 공이 딱 좋았어. 낮은 쪽 존에 완벽하게 걸쳤어.”

솔리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유니폼 속의 땀을 닦고 있는 도중에 배트보이가 다가왔다.

“문. 잠깐 라커로 오래요.”

“누가요?”

“감독님이요. 급한가 봐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보통은 선발 투수를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투수만의 루틴을 깨트리는 행동은 정말로 큰 일이 아니면 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토요 감독이 직접 지혁을 호출했다는 건, 진짜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수건을 휙 던져버리고 일어섰다. 뜨거운 기온이 맴돌던 더그아웃에서 벗어나 라커룸으로 가는 통로로 들어오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혔다.

“이런. 어깨가 너무 식으면 안 되는데.”

지혁은 중얼거리며 그위넷 선수들의 스윙을 떠올렸다. 경기에서 집중을 풀기 싫었다. 그렇게 라커룸에 들어가자 몬토요 감독이 지혁의 라커 앞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그나저나 우리 쪽 빈 슬롯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들어오는 지혁을 본 몬토요가 통화를 하면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지혁은 라커 한가운데 모여 있는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아 기다렸다.

“누구? 빅터 마테오? 그 친구는 아직 안 되지 않나? 차라리 딜런 플로로는 어때요?”

몬토요의 통화가 조금 늘어지자 지혁은 조급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시 마운드로 나가야 하는데,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여전히 몬토요는 통화를 끊지 않는다.

지혁은 자꾸 벽에 걸린 시계만 흘깃거렸다. 라커에 들어온 후 3분이 지났다. 만약 더램의 공격이 세 타자로 끝난다면? 세 타자 모두 초구를 때렸다면? 공수가 교대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꾸만 경기장의 모습이 떠올라 조바심이 점점 더 커졌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동안 1분이 더 지났다. 이대로 여기 있다가는 정말 제대로 일이 날 수도 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초침이 흐르는 것만 바라보던 지혁이 마침내 벌떡 일어섰을 때, 몬토요 감독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꽤 잘 참는데?”

“감독님?”

“이건 켜지지도 않은 거야. 허허허.”

몬토요가 시꺼먼 화면의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지혁은 한 번도 몬토요의 이런 장난스러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경기 중에는 더더욱. 패닉에 빠져 머리가 돌아가기를 멈춘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 바로 짐을 챙겨. 자네 콜업이야. 오늘 경기부터 로스터에 들어갈 거라고 하는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늘은, 그야말로 더없이 완벽한 날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