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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50화 (51/204)

< 50 - Welcome. -----여기서부터 유료연재 시작입니다 >

얼떨떨한 표정의 지혁을 보면서 몬토요 감독이 경박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자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처음 보는군. 몽고메리에 있는 브래디에게 알려주면 펄쩍 뛰겠어, 아주.”

프리드먼의 약속도 있었고, 얼마 전에 40인 로스터에 든 것도 그렇고. 올해 안에 언젠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확장 로스터가 열리기까지 열흘 정도 남은 상황이었으니 조만간에 일어날 일이라고 여기며 생각에서 지워 놓은 터였다. 아마 더램의 시즌과 플레이오프 시리즈까지 끝나고 난 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상보다 빨랐다. 게다가 시합 중에, 그것도 등판하고 있는 도중에 이런 통보라니. 당황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축하해. 자네에겐 아마 신이 축복을 내린 모양이야. 마이너리그 FA로 들어와서 1년도 안 돼 메이저리그 팀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어떻게... 로스터에 자리가 비었나요?”

“아. 크리스 아처가 15일 DL에 올랐다고 하는군. 지금 브랜든 곰스도 내려와 있는데 자네를 굳이 선택한 거야.”

“그런데 오늘 등판은 어쩌죠?”

“나도 방금 전화를 받았어. 오늘 경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바로 마이크를 준비시켰으니까. 지금쯤 올라갔을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바로 짐을 챙겨. 바로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몬토요 감독이 지혁의 어깨를 한 번 꽉 잡아주었다.

“인생에서 얼마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게. 가서 잘 하고. 동료들을 못 보고 급하게 가게 돼서 조금 쓸쓸하겠지만 괜히 더그아웃에 들어오지는 말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으니까.”

“... 아, 알겠습니다.”

정신도 없이 라커에서 장비를 챙겼다. 배트보이 한 명이 더그아웃에 있던 지혁의 장비들을 모아서 가져다주었다. 철없어 보이는 어린 녀석도 와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크로스백에 라커에 있는 물건들을 쑤셔넣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후우. 하아.

심호흡을 여러 번 해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아무도 없는 라커룸 안이 시리도록 고요했지만, 지혁의 가슴 속에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낮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간다. 간다고. 진짜 다시 간다!”

조용한 더램 애슬래틱 파크의 라커룸에 지혁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배웅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더램 애슬래틱 파크를 빠져나와 비행기를 탄 것도,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내린 것도, 구단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경기장 앞에 도착한 것도. 마치 핸드폰에 찍어둔 사진 몇 장을 휙휙 찍어서 넘겨보는 것처럼 몇 장면들만 기억에 남았다.

연락을 받은 패트릭이 황급히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넘어왔다.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지혁은 처음으로 패트릭이 꽤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오후 4시. 지혁은 패트릭과 함께 나란히 탬파베이의 홈구장 트로피카나 필드에 들어섰다.

“문!”

지혁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체임 블룸이었다.

“왔군요. 축하합니다.”

블룸은 활짝 웃었다. 그가 내민 손을 꽉 잡으며 지혁도 웃었다.

“고맙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블룸이 몇 마디 덕담을 건네고 패트릭과 함께 구단 사무실로 향했다. 저들은 메이저리거로써 받아야 할 대우와 조건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지혁은 직원이 알려준 대로 트로피카나 필드의 홈 팀 라커룸 옆에 붙어있는 감독실로 향했다.

“오. 생각보다 잘 해놨네.”

경기장 안의 큰 복도를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전생에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많이 뛰어봤지만 벌써부터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예 없었던 삶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새로운 삶을 얻은 뒤 뛰었던 마이너리그 구장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앞에 있었다.

티그레 델 리세이, 데이토나 컵스, 몽고메리 비스킷츠, 그리고 더램 불스. 회귀한 이후 거친 네 팀의 시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시설들이다. 메이저리거들이 언제 어디서든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필수품들이 배치되어 있고, 벽에는 탬파베이의 첫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록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탬파베이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 있는 스캇 카즈미어와 제임스 쉴즈의 모습이 엄청난 크기로 걸려 있는 것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 자리가 조금 어색하게 비어있는데, 아마 데이비드 프라이스의 사진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8년과 2010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던 트로피가 전시된 장식장 앞에서 잠시 사진들을 살펴보고, 2011년 기적의 와일드카드 진출을 이뤄냈던 때 기쁨에 미쳐 날뛰고 있던 선수들의 모습도 눈에 담았다.

그렇게 탬파베이 레이스의 일원이 된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감독실 앞에 다다랐다. 조 매든의 백발과 뿔테 안경 속 깊은 눈이 떠올랐다. 뭐라고 첫 인사를 해야 할까, 살짝 고민하던 중에 문 앞에 달린 명패를 발견했다.

‘Joe’s room’

딱딱하고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매니저’나 ‘보스’ 따위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명패. 소탈하고 친근한 매든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명패라고 생각하며 지혁은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한 손에 한 입 베어 문 바나나를 들고 있는 매든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매든이 환하게 웃었다.

“웰컴. 다시 보게 되어 반갑네.”

매든은 지혁에게 가벼운 포옹을 하며 맞았다.

“결국 다시 올라왔군. 퍼펙트게임도 했다면서?”

“네. 하하.”

“시즌 시작하기 전에 만났던 날을 기억하나? 난 아직도 자네의 그 패기를 잊지 않았어.”

“하지만 결국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었죠.”

“스프링캠프 때는 또 어땠고? 마이너로 내려가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했었지. 패기로우면서 또 의연하다고도 생각했지.”

매든의 미소는 마치 KFC 할아버지의 것처럼 자애롭게 느껴졌다.

“오늘 크리스가 갑자기 DL에 가면서 급하게 부르게 됐어. 선발로 경기하고 있던 중이었다면서. 컨디션은 괜찮은가?”

“네. 조금밖에 안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는데 컨디션이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허허헛!”

매든 감독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아주 좋아. 기대하고 있겠네. 라커에 가면 자네 유니폼과 필요한 장비들이 준비돼 있을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클러비를 부르게. 여긴 마이너리그 팀이 아니야. 선수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메이저리그지. 이 아름다운 전쟁터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지혁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매든의 방을 나와 라커룸으로 향했다.

텅 빈 라커룸에 기자들 몇 명만 대기하고 있고, 클러비들이 바쁘게 돌아다닌다. 확실히 메이저리그 팀의 라커룸은 마이너리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고작 25명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혁은 지나가는 클러비 하나를 붙잡고 물어봐서야 본인의 라커를 찾아낼 수 있었다.

- Moon.

라커룸에 작게 붙어 있는 지혁의 이름. 그리고 가지런히 걸려있는 네 벌의 유니폼. 하얀색 바탕에 짙은 남색으로 써져 있는 RAYS 마크가 큼지막히 달린 홈 유니폼을 입어봤다. 가슴팍에 달린 마크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며 새삼 실감했다. 드디어, 메이저리그 라커룸에 올라온 것이다.

“문? 사진부터 한 장 찍을게요. 마침 유니폼도 입고 있으니 잘 됐네요.”

“사진? 아, 로스터에 등록할 사진인가요?”

“네. 그리고 전광판에도 띄워야 하니까요. 모자도 써 주세요.”

찰칵. 환하게 웃는 지혁의 미소가 담긴 사진이 찍혔다. 이제 지혁이 등판할 때마다 트로피카나 필드의 전광판에 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릴 것이다.

“등번호는 18번. 제대로 나온 것 맞죠?”

“네. 깔끔하게 잘 나왔네요.”

“혹시라도 이상한 게 있으면 항상 불러요. 루키들은 클러비를 부르는 게 익숙하지 않거든요. 신경 쓰지 말고 우릴 부르면 돼요.”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걸 환영해요.”

클러비의 과도한 액션과 친절 때문에 지혁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신인들이 메이저리그에 처음 올라오면 마치 시중을 드는 듯한 클러비들의 서비스에 당황해하고 불편해하곤 한다. 마이너리그에서 받는 서비스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들에, 정말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하는 것들까지. 베테랑이 되면 장비를 손질해주는 사람들까지 따로 있을 정도니까.

그래서 구단 직원들도, 클러비들도 모두 신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돕곤 한다. 처음일수록 더더욱. 이 사람들이 보기에 지혁은 메이저리그라는 꿈의 무대에 처음 발을 디딘 선수일 뿐이다. 정작 지혁에게는 드디어 야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집중할 환경이 마련된 것이지만.

장비를 풀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라커룸을 막 나서려는데 기자들 몇 명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개중 몇 명은 퍼펙트게임을 했을 때 기자회견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쁩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를 잡은 것 같은 기분이네요.”

“마침 그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요.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이죠.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빠르게 성과를 이뤄낸 비결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별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열심히 노력했고 준비했어요. 그것뿐입니다.”

“하하.”

기자들 몇 명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선 자세, 인터뷰 할 때 저절로 배어나오는 옅은 미소. 이런 것들이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합류한 신인이 아닌 경력자를 인터뷰하는 듯한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혹시 더 질문 없으신가요?”

“아? 전 오케이. 다른 분들은?”

“음, 지금은 뭐 굳이? 더 필요할까요? 어차피 인터뷰는 선배들이 따로 할텐데.”

“됐나요? 그럼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아직 선수단을 못 만나서요. 실례합니다. 고생하세요, 기자님들.”

그런데도 하찮은 후임 기자들에게 겸손하게 대하는 모습은 또 기자들의 서열을 가리지 않는 신인답기도 하다. 지금 선수단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라커룸에 남아 있는 기자들 중에서 지혁의 경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기자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조금 경험이 있는 기자가, 라커룸을 나가는 지혁의 뒷모습에 대고 이야기했다.

“메이저리그에 온 걸 환영해요, 문.”

*

라커룸에서 벗어나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 온갖 감정이 머리를 스쳐간다. 가슴이 벅차 올라왔다. 샬럿의 싱글 A 경기장에서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를 치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지난 생에 서른이 되어야 처음으로 콜업 되었을 때의 그 찌르르한 감정이 지혁의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렸다. 18년 프로 인생과 이번 생에 달려온 8개월의 여정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은퇴했던 시애틀의 라커룸을 떠난 이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고, 지혁은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되었다. 구위가 모자라는 공을 가지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며 억지로 버티던 투수가 아닌, 강력한 싱커를 던지면서 다른 공까지 같이 살려내는 투수.

그 싱커를 무기로 더블 A와 트리플 A를 차례로 통과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전생에서보다 훨씬 더 빨리. 그는 마지막 문 앞에 서 있었다.

“후우.”

어두운 통로 끝. 지혁은 닫혀 있는 문 앞에서 한 번 숨을 깊게 쉬어보았다. 그리고 닫힌 철문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서서히 열리는 문 틈새로 조명이 새어나오고, 야구장의 냄새가 밀려들어온다.

“가자.”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광활한 잔디와 3층까지 솟아 있는 장엄한 관중석이 지혁을 맞이하며 한 마디를 내뱉는 것 같았다. We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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