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 데뷔. >
선수단에 처음 합류했다. 스프링캠프 때 봤던 선수들이 머리를 한 번씩 툭툭 쳐주며 지혁의 합류를 환영했다. 투수조 조장 알렉스 콥은 지혁에게 장난을 걸며 다가왔고, 팀의 주장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에반 롱고리아도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분위기가 마냥 밝지는 않았다. 어제 경기에서 11회 연장 끝에 패배했다. 게다가 아처는 팔꿈치 쪽 염증으로 경기 도중에 내려갔었고. 지혁이 온 것과는 별개로 팀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의 집중도가 조금 달랐다. 지혁은 분위기를 깨지 않고 단체 워밍업을 묵묵히 따랐다.
“오늘 몇 개나 던졌지?”
25명의 선수들이 모두 모여 몸을 풀고 난 이후, 투수조와 야수조가 나누어 따로 가벼운 훈련에 들어갈 시간이 되자 힉키 투수코치가 다가왔다.
“3회까지밖에 안 던졌습니다. 한 40개 정도 던진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5일 쉬었고?”
“네.”
“다행이네. 컨디션 한 번 보자. 어제 투수를 많이 써서 오늘 등판해야 할 수도 있어. 많이 던지지는 않을 거지만. 마침 선발로 나갔던 날이니까 리듬도 맞춰져 있을 거고.”
힉키는 외야 파울지역에 마련된 불펜으로 지혁을 이끌었다.
“요, 문. 오랜만이야.”
“커트!”
“반갑다. 결국 올라왔네?”
몽고메리 시절 호흡을 맞추던 커트 카살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39살의 호세 몰리나가 DL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타격에 재능을 보여준 카살리도 메이저 데뷔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메이저는 좀 할 만 해?”
“할 만 하냐고? 하하하.”
몽고메리에서의 그 자신감 넘치던 카살리는 쓰게 웃었다.
“여기가 할 만 하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려면 한 5년은 걸릴 것 같은데. 메이저 투수들이 던지는 공은... 어휴. 지옥이야, 지옥.”
“그래? 그 정도야?”
“나처럼 백업으로 뛰면서 어쩌다 한 번씩 나가면 더 심해. 아직도 적응이 안 되니까.”
“문! 커트! 잡담은 나중에 하고, 빨리 투구부터 해 봐.”
힉키가 보채자 카살리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번 짓더니 플레이트에 가 앉았다. 투구판 앞쪽의 흙을 발로 한 번 쓸어버린 후, 지혁은 싱커 그립을 쥐었다. 경기도 들어가지 않은 불펜에서의 투구였지만, 트로키파나 필드에서의 투구라는 것 때문인지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렸다.
“커트! 싱커야!”
던질 구종을 말해준 뒤 지혁은 팔을 들어올렸다. 바뀐 공을 보고, 힉키와 카살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할까? 스프링캠프 때의 싱커와 같은 공이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달라진 공이고, 심지어 몽고메리 시절 던지던 공과도 달라진 공.
지혁은 전력으로 싱커를 뿌렸다. 날아가던 공이 순식간에 궤도를 바꾸며 빠르고 강하게 가라앉았다. 카살리가 미트로 공을 따라가다가 놓쳐버릴 정도의 공이었다.
“뭐야?”
심지어 그 힉키 코치마저도 놀라움 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싱커가 달라져 있었다. 몸이 덜 만들어져 있던 스프링캠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워풀해졌고, 구속도 상승했다. 날카로운 맛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공 같은데?”
“알렌 코치가 던지는 법을 좀 바꿔보자고 해서요. 이렇게 던진 지는 한 달 조금 안 됐습니다. 훨씬 좋아졌죠?”
“말이라고 해? 같은 공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인데.”
힉키는 스피드건을 내려다보았다. 90마일. 패스트볼 구속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혁이 이어서 패스트볼 몇 개와 슬라이더를 점검하는 것을 보며 힉키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패스트볼은 별다른 무브먼트가 없어 보였다. 상하 움직임도 큰 편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테일링이 걸리지도 않는다. 제구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메이저리거의 파워를 이겨내기는 힘들 것 같아 보이는 평범한 공.
그런데 그 평범한 공들 사이에 싱커가 섞이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간까지는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던 싱커가 꿈틀대기 시작하면, 타자들의 타이밍이 흐트러질 터. 싱커가 가라앉는 것을 몇 번 보고 나면 평범한 패스트볼이 훨씬 더 위력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떨어져야 할 공이 끝까지 뻗어 들어가며 오히려 공이 상승하는 듯한 착시를 주는 것이다.
“됐어, 여기까지. 지금은 무리하지 마.”
힉키가 황급히 상념에서 벗어나 투구를 이어가는 지혁을 말렸다. 최소한 불펜에서의 피칭만 놓고 본다면,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투수가 들어왔다.
“오늘은 일단 불펜 대기야.”
“네. 컨디션 괜찮네요. 비행기를 타서 조금 걱정했는데.”
“하.”
문제는 갑자기 등장한 이 투수가,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투수라는 것이다. 힉키는 혼란스러웠다. 투수 운용을 책임져야 하는 힉키에게는 쉽게 계산할 수 없는 미지수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
경기 시작 30분 전. 원정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선수들이 가벼운 타격 연습을 시작했다. 디트로이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미구엘 카브레라,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2루수인 이안 킨슬러, 빅터 마르티네스와 J.D. 마르티네스의 쌍포까지... 지혁의 눈앞에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는 강타자들이 몸을 풀고 있다.
저 중에서 지혁이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선수는 미겔 카브레라와 J.D. 마르티네즈 뿐이었다. 그것도 전성기가 다 지나 노쇠화에 접어든 상태로.
‘그 때도 무시무시했었는데...’
40을 넘어간 나이에 뒤뚱거리는 몸을 이끌고 타석에 서 있던 카브레라. 클린업에서 빠져나와 7번 타선에 들어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마운드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었다.
어디로 던져도 큰 것 한 방을 맞을 것 같은 느낌. 원바운드 되는 공을 던져도 안타로 만들어낼 것 같은 스윙. 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공에는 꿈쩍도 않는 태산 같았다가, 조금이라도 존에 걸치는 공이 들어오면 귀신같은 스윙을 돌리던 선수.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그랬던 선수들이 전성기의 상태로 눈앞에 있었다. 훨씬 더 날렵한 몸으로, 훨씬 더 빠른 스윙을 가지고. 더그아웃에서 타격 연습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지혁은 지금의 이 터질 듯한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늘 탬파베이의 선발은 제이크 오도리찌. 초반 2승 7패까지 기록했던 성적을 9승 9패까지 끌어올린 무서운 신인이다. 풀타임 데뷔 시즌에 두 자릿수 승수에 도전하는 경기였다. 오도리찌도 나름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초반을 풀어나가는 데 독으로 작용했다.
선두타자 이안 킨슬러가 3루수 롱고리아의 앞에 애매하게 떨어지는 빗맞은 내야안타를 치고 출루했다.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오도리찌는 2번 토리 헌터에게 한참 빠지는 공을 던지며 볼넷을 허용했고, 카브레라의 진루타가 이어졌다. 1사 2,3루. 빅터 마르티네즈가 높은 공을 강타한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향했다.
“으아...”
맞는 순간 펜스를 넘어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타구였다. 관중석에서도 불안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측 담장으로 향했다. 전력으로 뛰고 있는 우익수 쪽으로. 서서히 떨어지고 있는 공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켜 둔 우익수가 펜스 한참 앞에서 마치 농구 선수처럼 훌쩍 뛰어올랐다.
“예에에쓰!”
지혁이 난간에 기대어 있는 더그아웃 위에서 팬들이 엄청난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 시즌부터 탬파베이의 드넓은 외야를 책임지고 있는 케빈 키어마이어가 펜스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글러브에 공을 움켜쥔 것이다.
“저걸?”
지혁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눈으로 보는데도 믿겨지지 않는 수비였다. 엄청난 거리를 뒤로 돌아 뛰더니 높이 점프하면서 펜스에 맞아야 할 공을 낚아챈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3루에 있던 킨슬러가 태그업 해 홈에 들어왔지만, 2타점짜리 장타를 희생플라이로 둔갑시킨 수비였다. 슈퍼 캐치를 선보였음에도 키어마이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에 묻은 잔디를 툭툭 털어냈다.
- 슈퍼 케빈! 슈퍼 케빈!
관중석에서 이 미친 루키의 닉네임을 부르며 환호를 보냈다. ‘슈퍼맨’ 키어마이어의 엄청난 수비에 안정을 찾은 오도리찌가 J.D. 마르티네즈를 상대로 높은 패스트볼을 던져 중견수 플라이를 만들어냈다. 한 점으로 1회를 막아냈다. 순전히 키어마이어 덕이었다.
*
경기는 두 팀의 전력 차이대로 흘렀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최하위 싸움을 하고 있는, 승률 5할을 이루지 못한 탬파베이와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디트로이트. 두 팀의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제이크 오도리찌가 1회에 흔들린 이후 안정을 찾았지만, 탬파베이의 팀 컬러대로 공격에서 좀체 물꼬를 트지 못했다. 디트로이트의 선발 투수 릭 포셀로가 유독 컨디션이 좋은 듯 압도적인 피칭을 이어갔다. 4회에 나온 제닝스의 중전안타 하나가 탬파베이의 유일한 출루였다.
1대0의 팽팽한 경기가 단번에 기울어버린 것은 7회. 88개를 던졌던 오도리찌가 여전히 마운드에 올랐지만 제구가 흔들렸다. 9번 라자이 데이비스에게 빗맞은 안타를 내준 뒤 킨슬러에게 몸에 맞는 공을 내줬고, 토리 헌터를 잡아냈지만 카브레라를 또 다시 볼넷 출루시켰다.
“몸 풀어, 문.”
이미 불펜 투수들이 두 명 이상 대기하고 있었고 지혁도 몸을 풀라는 지시를 받았다. 지혁이 갓 캐치볼을 시작했을 때 즈음. 마운드의 오도리찌는 빅터 마르티네즈에게도 볼넷을 허용하며 내려와야만 했다.
오도리찌의 뒤를 이어 등판한 선수는 커비 예이츠였다. 어제 경기에서 필승조라고 할 수 있는 브래드 박스버거와 제프 벨리뷰, 제이크 맥기가 모두 등판했던 탓이다. 한 점 차이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매든 감독은 무리하게 승부를 걸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이 참사를 불러왔다.
주자가 꽉 찬 상태에서 예이츠가 던진 슬라이더가 밋밋했다. 한복판에서 살짝 낮게 떨어지는 공이 J.D. 마르티네즈의 방망이에 정확하게 얹혔다. 공이 타구에 맞는 순간 좌익수 제닝스의 발걸음이 멈출 정도의 대형 홈런이었다. 만루홈런. 1대0의 경기가 단번에 6대0이 되었고, 사실상 경기는 여기서 끝나 버렸다.
“아아.”
불펜에서 타구를 바라보던 선수들 모두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마운드에서 무릎에 두 손을 대고 있는 예이츠에게도, 관중석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관중들에게도. 잔혹한 한 방이었다.
*
“짐. 문의 상태는 어때?”
“컨디션은 괜찮답니다.”
“투구수 20개 정도로 끊어서 한 번 올려보지.”
“네. 8회에 준비시키겠습니다.”
매든은 잔뜩 굳은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예이츠를 올린 선택은 뼈아팠다. 결과론적으로만 봤을 때 박스버거를 아낀 게 실패의 원인이다.
하지만 지나간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법. 이대로 경기를 내준다고 하더라도, 분위기를 바꿔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 매든은 그 임무를 루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문. 8회에 올라간다. 준비해.”
“네!”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다. 속으로 괜스레 멋쩍었다. 이미 힉키가 불펜 쪽으로 걸어올 때부터 촉이 왔다. 등판이구나 싶어서 침착한 척 하려고 애썼는데도 목소리가 크게 나와버렸다.
“7번부터 시작하는 이닝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던져.”
힉키가 벤치에 앉아 있던 지혁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 귀에 대고 얘기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안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이미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쫄면 안 된다는 마음을 아무리 먹어도 저절로 몸이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자주 움직이고, 조금도 쉬지 않고 스트레칭을 했다.
7회말, 탬파베이는 여전히 무기력했다. 드디어 포셀로에게 안타 하나를 더 뽑아냈지만 그뿐이었다. 완벽히 주저앉은 경기. 루키가 데뷔전을 치르기에는 딱 좋은 환경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압박이나 조건 없이, 그저 올라가서 세 타자만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도 신의 장난인가?’
지혁은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던졌던 경기를 떠올렸다. 소속팀과 상대하는 타자들만 달라졌을 뿐 모든 조건이 꼭 같다.
사실상 경기가 기울어버린 상황. 포기한 듯 무력한 타자들과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상대팀. 심지어 7번부터 시작하는 타순까지 똑같다.
조브리스트가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내주는 순간. 지혁은 글러브를 낚아채며 일어섰다. 디트로이트의 외야수들이 벤치 쪽으로 천천히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혁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운드, 메이저리그 마운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