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 데뷔가 아닌, 복귀. >
투수 교체!
No, 18! 릴리버, 지-혁, 무우운!
지혁이 트로피카나 필드의 돔 구장 천장에서부터 시선을 천천히 끌어내리고 있을 때. 탬파베이 장내 아나운서의 우렁찬 소개 멘트가 들렸다. 아직 등장 테마곡도 정하지 않아서 아나운서의 멘트 이후로는 관중석의 웅성거림이 그대로 귀에 들어온다. 마운드로 달려가며 외야 쪽 전광판을 흘깃 봤더니 라커룸에서 막 찍었던 사진이 엄청난 크기로 드러났다.
“푸핫.”
그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또 너무 익숙해서. 웃음이 나왔다.
전생에서 메이저리그에 처음 올라왔던 때가 기억났다. 미네소타의 유니폼을 입고 누가 볼 한 쪽을 억지로 끌어올린 것 같은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던 지혁의 모습. 그 사진과 비교하니 지금의 사진은 제법 볼 만 하다.
마운드을 열 발자국 쯤 남겼을 때, 2루수 조브리스트가 지혁을 불렀다.
“헤이, 루키!”
내야에서 공을 돌리던 조브리스트가 공을 언더 토스로 툭 건네준다. 지혁이 글러브로 툭 낚아채는 것을 보며 조브리스트가 주먹을 쭉 뻗어 보였다.
“긴장하지 마. 네 베스트를 던져. 그거면 되니까.”
“하하. 오케이.”
조브리스트가 살짝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 미소로 표정을 바꿨다. 반대쪽 코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롱고리아와 눈이 마주친 조브리스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보자... 흙이 아주 좋네. 깔끔하고. 로진도 빵빵하고.”
지혁은 마운드 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오른발을 디뎌야 할 딜리버리의 흙을 고르면서도, 허리를 숙여 하얀 로진을 손가락에 듬뿍 바르면서도. 숨막히는 긴장감을 풀어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홈플레이트에 앉은 카살리를 보면서 일부러 몽고메리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냈다. 몽고메리의 경기도 그리고 지금 탬파베이의 경기도. 모두 야구다. 그냥 야구일 뿐이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디트로이트 쪽 벤치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며 걸어나오는 타자를 바라봤다.
7번, 포수. 알렉스 아빌라.
2011년만 해도 .289를 치며 실버슬러거도 받았고 무려 올스타전까지 나갔던 포수였다. 디트로이트의 전성기를 함께 하고 있는 포수. 하지만 그 이후 타격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지금은 .220대를 치고 있는 무난한 타자다.
공을 글러브에 끼고 솟은 마운드에 서 있는데 아빌라가 방망이로 홈플레이트를 툭툭 두드리고 앞으로 겨눈 뒤 자세를 잡는다. 지혁은 본능처럼 허리를 숙여 카살리의 싸인을 받았다.
초구는 싱커. 너무나 당연한 그 싸인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두 손을 가지런히 글러브 속에 모았다.
공을 던지기 전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치르면서, 신기하게도 온 몸의 감정이 심해까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전까지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평화로워졌다. 메이저리그 구장이 가져다주는 웅장한 떨림도 멎어버렸다. 18년 동안, 그리고 도미니카에서, 몽고메리에서, 더램에서 던졌을 때와 똑같은 느낌. 경험의 힘이리라.
뻐어엉!
“스트-라이크! 원!”
아빌라가 공을 그저 쳐다보는 동안 싱커가 바깥쪽으로 급격하게 휘어지며 존 구석에 박혔다. 카살리가 프레이밍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박힌 공에 심판이 우렁찬 콜을 외쳤다. 휘이익! 관중석 어딘가에서 데뷔전 초구를 던진 루키를 향한 칭찬의 휘파람이 들려온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나도 긴장하지 않았어. 평소와 완전히 똑같아.
날아가는 공을 보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던 지혁에게 공이 돌아오지 않는다. 지혁이 한참을 글러브를 내밀고 있는데, 카살리가 미트에 쥐고 있던 공을 벤치 쪽으로 굴려 보낸다. 심판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볼 주머니에서 새 공을 꺼내 지혁에게 던져주었다.
‘환영인사. 잊고 있었네.’
루키의 데뷔전 첫 공을 따로 간직해주는 문화.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의 구성원들이 직접 루키를 맞이해주는 방식이다. 공을 받고 뒤돌아 멋쩍게 웃자 조브리스트가 다시 한 번 웃으며 지혁을 가리켜 보였다.
익숙한 문화였는데도 잠시 잊고 있었다. 왜인지 기분이 좋았다.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돌아왔다는 게 가장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
[ 스윙! 공이 옆으로 살짝 튀었습니다. 카살리가 재빨리 잡아 1루로. 문의 데뷔전 첫 아웃카운트는 스트라이크 낫아웃 삼진입니다. ]
[ 싱커가 생각보다 훨씬 더 좋네요. 아주 인상적인 공입니다. ]
[ 바깥쪽으로 떨어져 나가는게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는군요. 문, 기분이 좋은가요? 슬쩍 웃고 있습니다. 하하하. ]
[ 이건 또 나름대로 놀랍네요. ]
해설자가 재밌다는 말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 메이저리그에 오늘 올라온 아시아인 선수가 마운드에서 웃는다? 저는 이런 선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예전 BK를 기억합니까? ]
[ 애리조나의 클로져였었죠? ]
[ 네. 그 괴짜 같고 당당하던 BK도 데뷔전 마운드에서는 긴장했었거든요. 괴상하고 난폭한 공을 던지면서도 딱딱한 얼굴로 잔뜩 긴장한 티를 냈었어요. 그런데 이 선수는 웃고 있지 않습니까? ]
[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마운드 위에서 꽤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
[ 신기하네요. 메이저리그 마운드가 익숙한 선수처럼 보여요. ]
낫아웃 된 공을 1루수 로니가 받고 지혁에게 공을 다시 주려는 액션만 취하고는 공을 내야로 돌렸는데, 그 모습이 웃겨서 픽하고 실웃음을 흘렸다. 탬파베이의 내야수들도 어떻게든 잔뜩 긴장하고 있을 게 분명한 지혁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작 마운드에 오르자 익숙한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에 평소와 다르지 않았던 지혁은 그 모습이 퍽 웃겼다.
“예에~ 나이스야. 계속 그러엏케? 해.”
유넬 에스코바가 공을 돌려주다가 삑사리를 냈다. 그게 뭐라고 또 웃겼다. 에스코바도 자기가 낸 목소리가 웃긴 듯 낄낄댔다. 지혁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마운드에 섰다.
이어진 상대는 8번, 앤드류 로마인. 주전 유격수인 이글레시아스의 휴식으로 나온 후보 선수.
‘쟤도 나랑 다를 거 없는 놈이지, 뭐.’
여차하면 마이너리그로 강등될 처지는 같았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는 건 지혁 쪽이다. 메이저리그의 쓴맛을 맛보며 간신히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선수와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데뷔해서 신이 나 있는 선수 간의 대결.
어찌 보면 결과가 미리 정해져 있는 대결이다. 지혁은 4구째 던진 몸쪽 패스트볼로 빗맞은 3루 땅볼을 유도해냈다.
“굿. 내야로 굴리면 다 잡아 줄게.”
롱고리아가 깔끔한 핸들링을 선보이고는 덕담을 건넨다. 든든한 느낌이 지혁의 공을 떠받쳤다.
라자이 데이비스를 상대로 던진 싱커가 존 바깥쪽에서 떨어져 내렸다. 자세가 무너지면서 방망이 끝에 툭 맞춘 공은 힘없이 굴렀다. 마치 번트를 댄 것 같은 타구가 되었고 카살리가 재빨리 달려나오며 주워들어 1루에 송구했다. 엄청난 준족인 데이비스가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해냈지만 공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 세 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훌륭한 데뷔전입니다. 문. ]
[ 얼마 전 트리플 A에서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던 선수라고 했죠? 그 기세를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도 이어나가네요. ]
[ 오늘 경기에서 탬파베이가 유일하게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9회로 이어집니다. ]
모든 것이 완벽했다. 완벽한 데뷔전이었다. 지혁은 마운드에서 뛰어 내려왔다. 루키다움을 어필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어필하는 것도 필요하니까. 난간 바깥으로 나와서 기다리던 동료들이 가볍게 소리를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해 준다. 매든 감독도 주먹을 내밀어 툭 맞부딪혀 주었다.
아. 기분 좋다. 진짜 죽인다.
8회를 끝냈을 때 지혁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았다.
*
“이 정도면 한 이닝 더 맡겨서 아예 마무리시키는 게 어떨까요?”
“나쁘지 않지. 지금 세자르가 준비하고 있나?”
“네. 그런데 세자르도 올해 많이 던졌어요.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헬릭슨이 선발 로테이션에 복귀하면서 5선발 자리를 찾았고, 시즌 내내 선발과 불펜을 오가던 세자르 라모스는 이제 불펜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전반기에 꽤 많은 이닝을 던졌다. 휴식을 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매든 감독은 아주 잠깐 고민하고는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에게 알려 줘. 다음 회에도 마무리하라고.”
힉키는 벤치에 앉아서 에스코바와 낄낄대고 있는 지혁에게 다가갔다.
“한 이닝 더. 오늘 경기를 마무리 해.”
“알겠습니다.”
“무리시키지는 않을 거야. 아까 잠깐 던지다 말았으니까. 이상 있으면 바로 말하고.”
“그럼요.”
“루키라고 무리하면 결국...”
“제 손해죠.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어쭈. 힉키가 웃으며 돌아섰다.
*
9회초. 이미 8회말을 마친 시점에서 많은 팬들이 자리를 뜨고 있었다. 안 그래도 관중이 적은 탬파베이다. 그 관중들마저 야구장을 빠져나가고 있으니 경기장 안에서는 그게 훨씬 두드러져 보였다.
오늘 경기는 그만큼 힘들었다. 릭 포셀로에게 완전히 짓눌려 버렸으니. 8이닝 동안 때린 안타는 딱 3개. 장타는 하나도 없었다.
“뭐, 그래도 부담은 없으니까.”
홈 팬들이 자리를 많이 뜨고 있는 와중에 다시 마운드에 오른 지혁은 조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지혁도 사람인지라 기왕이면 좀 더 많은 관중 앞에서, 기왕이면 조금 더 많은 관심 속에서, 기왕이면 조금 더 열광적인 반응 앞에서 데뷔전을 치렀으면 했다. 탬파베이라는 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조금은 아쉬웠지만 애써 좋은 면을 찾으려 했다.
마지막 이닝, 디트로이트의 상위 타선을 상대할 지혁은 초구에 싱커를 던졌다. 그리고 타자도 지체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따악!
잘 때렸지만 빗겨 맞은 타구가 심판의 어깨 옆을 스치며 뒤쪽으로 날아갔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배트의 위쪽을 살짝 스친 게 천만다행일 정도다. 정타로 맞았으면 꼼짝없이 외야로 뻗어나갔을 스윙이었다.
‘초구에 타이밍을 제대로 맞췄다... 이거지?’
8회의 좋은 기억이 몸과 마음을 지배해서였을까. 눈앞의 미트에만 자신 있게 꽂아 넣겠다고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다.
상대는 메이저리거. 그 중에서도 리그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안 킨슬러다. 방망이를 한 번 쓰다듬은 킨슬러가 냉정한 눈빛으로 지혁을 쏘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등골이 서늘하면서도, 짜릿한 쾌감이 지혁을 사로잡았다.
아빌라, 로마인, 라자이 데이비스. 모두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으로 살아남는 선수들은 아니다. 그에 반해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타자들은 정말로 방망이로 승부를 보는 선수들이다. 갑자기 스트라이크 존이 너무 작아 보였다. 킨슬러가 그리 큰 체구가 아니었음에도.
‘쫄지 마. 똑같이 야구야.’
애써 스스로를 다잡으며 던진 2구. 패스트볼이 바깥쪽으로 멀리 빠졌다. 3구째 패스트볼은 거의 전력으로 던졌다. 93마일이 찍힌 공이 몸쪽을 파고들었지만 볼 선언을 받았다. 분명히 걸친 것 같았는데. 게다가 킨슬러는 분명히 제 타이밍에 시동을 걸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스윙을 못한 게 아니라, 볼이라고 생각해서 골라낸 것이다.
위압감이 다르다. 메이저리그에서 오랜 시간 정상을 지켜온 선수가 주는 위압감은 분명히 다르다. 4구, 슬라이더 하나가 일찌감치 원바운드로 떨어졌다. 카살리가 공을 돌려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지혁도 모르는 새 힘이 들어가고 있다.
지혁의 5구째 싱커가 존을 향하다 떨어졌지만 킨슬러는 스윙을 내지 않고 쳐다봤다. 볼넷 출루.
“이제 좀 루키답네.”
매든이 중얼거렸다.
“짐! 세자르 말인데. 준비는 되어 있지?”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 피칭은 하지 말고 캐치볼만 하고 있으라고 해.”
다음 타자에게도 불안한 투구가 계속되면 바꿀 예정이었다. 좋은 상태에서 첫 등판을 마무리하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나 마운드 위에서 흔들리는 루키를 디트로이트의 타자가 도와줬다. 베테랑 토리 헌터 자리에 대타로 들어선 돈 켈리는 2구만에 싱커에 스윙을 가져갔지만 에스코바의 정면으로 향했다. 에스코바의 깔끔한 토스와 조브리스트의 유연한 피벗에 이은 송구.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두 개가 쌓였다.
“와. 살았다.”
지혁은 글러브를 한 번 팡 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너무 일렀다. 지혁이 잡아내야 하는 디트로이트의 27번째 아웃카운트 상대는 리그 최강의 타자 미구엘 카브레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