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53화 (54/204)

< 53 - 메이저리거. >

부우웅!

저 스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천천히 타석으로 걸어나와서는 몇 번 연습 스윙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투수들의 기를 완전히 죽이는 타자. 미구엘 카브레라.

어디로 던져도 맞을 것 같다는 공포. 스트라이크 존이 콩알만해 보이게 만드는 위압. 아직 타석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지혁을 제압하고 있는 타자다.

‘저 타자한테 쫄지 않는 투수가 있긴 있는 건가?’

글러브를 끼지 않은 손을 허리에 올리고 카브레라의 타격 루틴을 기다리는 아주 짧은 순간동안, 지혁은 전생에 만났던 탑 클래스 타자들을 되돌아보았다. 리그에서 난다긴다하던 선수들 중에는 크리스 브라이언트도 있었고, 지혁보다도 한 살 어린 마이크 트라웃도 있었다. 그 때마다 마운드 위에서 느껴야 했던 공포감이 그대로 되살아난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전생과는 다른 게 있다면.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전생에서 패전처리를 전전긍긍하던 지혁은 이 공포감에서부터 비롯된 결과가 항상 좋지 않았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공이 있다. 손가락 끝에 온 힘을 다 실었다.

“스트라이크! 원!”

무릎에 딱 붙을 정도로 파고들어가던 공이 마지막에 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다. 홈 플레이트에 다다라서야 스트라이크 존 쪽에 걸친 싱커에 카브레라는 스윙을 내지 못했다. 아니, 않았나?

어쨌든 카브레라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과감하게 몸쪽으로 찔러 넣었다. 이것이 전생의 지혁과 지금의 지혁이 보여주는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 초구부터 과감합니다. 몸쪽이었어요. ]

[ 공 반 개만 중앙으로 몰렸더라도 장타를 줄 수 있는 코스였는데요. 배짱이 좋군요. ]

[ 2구를 준비합니다. 문. 카살리가 다시 몸쪽으로 붙어 앉는데요? ]

미트에만 집중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팽팽하게 잡아당겨 놓은 끈을 놓지 않고, 다시 한 번 몸쪽으로. 지혁은 패스트볼을 밀어넣었다. 같은 코스로 들어오던 공을 향해 방망이가 출발했지만, 카브레라는 반쯤 나오던 방망이를 도중에 멈췄다.

“볼.”

그러나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아쉬운 볼이었다. 전광판을 살짝 돌아보니 92마일이 찍혔다. 나쁘지 않은 컨디션인 것은 분명했다.

3구를 던지기 전에 카브레라가 타임을 한 번 걸었다. 싱커를 던질 곳을 노려보다가 인터벌이 아주 조금 길어진 순간이었다. 자신의 타격 타이밍에서 아주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제대로 승부해주지 않는 것이다.

타자와 투수간의 그런 신경전에는 익숙한 지혁도 흔들리지는 않았다. 한 차례의 보이지 않는 타이밍 싸움 이후에도 강한 싱커를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뿌렸다.

공을 손에서 놓는 순간부터 완벽하게 제구됐다는 느낌이 왔다. 카브레라가 풀 스윙을 돌렸지만, 바깥쪽에서 더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싱커에 방망이를 맞추지는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투!”

바람소리가 마운드까지 들릴 정도의 큰 스윙을 휘두른 카브레라의 표정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지혁은 똑똑히 보았다. 공격적으로 승부해서 카운트를 몰아넣었는데도 괜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방금 전 같은 공이면 못 칠 거야. 완벽하게 넣으면 돼.’

지혁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카살리의 체인지업 싸인에 고개를 저었다. 선구안도, 타격 스킬도, 파워도 리그에서 첫 손에 꼽히는 타자에게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빠른 타이밍에 싱커로 승부를 들어가는 게 오히려 좋은 선택일 것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아무 준비동작 없이 태산처럼 마운드만 바라보고 있는 카브레라를 시선에서 놓지 않으면서, 있는 힘껏 몸을 틀어돌렸다.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졌고 마지막 순간 실밥을 때리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마치 초구가 몸쪽에 꽉 차게 박혔던 것처럼, 그 궤적대로 공이 제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따아악!

“어?”

분명히 봤다. 타구에 힘을 실어야 할 오른쪽 팔꿈치가 몸통에 딱 붙어 있는 것을. 카브레라가 스윙을 하는 순간에도, 그리고 스윙이 공을 때려내는 순간에도 그 팔꿈치는 여전히 몸통에 꽉 붙어 있었다. 숨이 통할 구멍까지도 없을 정도로 꽉 접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파워는... 도대체 뭐지?!

[ 넘어갔네요. 더 볼 것도 없습니다. ]

[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 미구엘 카브레라! 9회 2아웃 상황에서 자신의 21호 홈런을 때려냅니다. 신인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네요. ]

까마득한 타구였다. 맞는 순간에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타구. 천천히 2루를 돌아 3루를 향해 가는 미구엘 카브레라의 뒷모습이 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홈에 들어가며 가슴을 탕탕 치고 하늘을 가리키는 카브레라를 보며 지혁은 허탈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새삼 또 실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 이곳은 지금까지 야구를 했던 곳들과는 차원이 다른 곳.

여기는 메이저리그다.

*

탬파베이의 타선은 결국 포셀로를 넘어서지 못했다. 9이닝 동안 3안타의 빈공. 릭 포셀로는 완봉승으로 자신의 14승째를 따냈고, 오도리찌는 10승 도전에 실패했다. 그렇게 평범한 메이저리그 한 경기가 끝났다. 라커룸에 들어온 선수들이 옷을 갈아입고 짐을 정리하는 틈에 껴서 지혁도 유니폼을 벗었다.

“문. 이 공이 데뷔전 첫 공이에요.”

클러비들 중 하나가 지혁에게 메이저리그 데뷔전 기념구를 가져다주었다.

“싸인해서 구단에 넘길 건가요? 보관하는 선수들도 있어요.”

“아, 네. 그래도 괜찮아요. 별로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아서.”

“그럼 펜 가져다줄게요. 싸인 하나 해요.”

“...네.”

지혁은 조용히 복기를 하고 싶었다. 여전히 날아가고 있을 것 같은 카브레라의 까마득한 홈런이 뇌리에 생생했다.

하지만 이 곳은 마이너리그가 아니다. 메이저리그 라커룸은 엄청나게 시끄럽다. 이길 때와 질 때를 구분할 수 없다. 기자들은 언제나 라커룸에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고, 패배의 아쉬움을 시끄러운 노래로 달래는 중남미 선수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공을 챙기고 글러브에 오일을 바르고 있는데 알렉스 콥이 다가왔다. 투수조 조장인 콥은 내일 선발 등판이 예정되어 있다.

“문. 오늘 수고했어. 기분이 어때?”

“아. 괜찮아요.”

“신기하고 그렇지? 아직 적응도 잘 안 될 거고.”

“네, 뭐... 지금은 홈런 맞은 것밖에 생각이 안 나서. 하하.”

“아마 인터뷰 올 거야. 저기 기자들 몇 명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 보이지? 감독님 인터뷰가 아직 덜 끝나서 저러고 있는데. 저 중에 몇 명은 너한테 올 거야.”

루키를 살뜰히 챙기는 콥은 과연 조장다웠다. 지혁이 메이저리그 라커룸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진짜 루키였다면 아마 콥이 눈물 나게 고마웠을지도 모른다.

“카브레라한테 맞은 홈런은 신경 쓰지 마. 인터뷰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라구. 오늘 피칭 아주 좋았으니까. 그 정도면 오늘 데뷔한 루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투구였어.”

콥은 지혁의 등을 한 번 툭 치고는 기자들 몇 명을 끌고 왔다.

“우리 루키가 데뷔전을 치렀는데 너무 가만 두는 거 아닙니까? 신경 좀 써 주세요.”

“문지혁 선수!”

콥이 끌고 온 기자들 중에는 익숙한 얼굴이 한 명 섞여 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저 기자. 베이스볼코리아의 조예은.

스프링캠프 때 두어 번 만났고 더램에 있을 때 형진과 함께 뛰는 지혁을 취재하러 온 적이 한 번 있었다. 퍼펙트게임을 기록했을 때도 그녀가 찾아오긴 했었는데 그 때는 워낙 이름 있는 방송사들의 기자들이 몰려서 따로 인터뷰를 하지는 못했다.

“데뷔 축하해요. 올 해 메이저리그까지 올라오다니 정말 대단한 거 있죠?”

“고맙습니다.”

이 사람은 보면 볼수록 참 하이 텐션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깔깔대는 목소리도 그렇고.

지혁은 손질하던 글러브를 내려놓고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몇몇 기자들이 바로 마이크를 갖다 댔다. 정신없는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메이저리그 타자를 상대해보니 어떤지, 공에 자신감이 있는지. 그런 질문들이 한 차례 몰아쳤다.

“그런데 영어가 매우 능숙하네요. 5년차 맞나 싶을 정도네.”

나이가 좀 있어보이는 기자 한 명이 웃으며 짚었다. 지혁은 흠칫했지만 능구렁이처럼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해 줬습니다. 미국에서 야구선수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의 야구 문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고, 미국의 문화에 잘 적응하려면 영어부터 마스터해야 한다고요. 제가 부상당했을 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아주 훌륭하네요. 통역 없이 직접 인터뷰하는 게 좋죠.”

기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조예은도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다른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아 적었다.

“데뷔를 축하합니다. 좋은 인터뷰였어요.”

지혁과 한 번씩 가벼운 악수를 나눈 기자들이 흩어졌다. 또 다른 기사거리를 찾아서. 하지만 조예은만큼은 남아있었다.

“축하해요. 데뷔했는데 기분이 엄청 좋고 그래보이진 않네요?”

“경기에 져서요. 홈런도 맞았고.”

“그 홈런 맞은 공 말인데요. 실투는 아닌 것 같았어요.”

“네. 꽉 차게 잘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넘겨버리네요.”

“메이저리그에 진짜 올라왔다고 실감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아무래도 그렇죠. 미구엘 카브레라가 워낙 대단한 타자기도 하고... 제대로 던진 공도 넘어갈 줄은 몰랐어서. 충격도 조금 있는데.”

“있는데?”

“그래도 재밌잖아요. 내가 최선을 다해 던진 공을 넘겨버리니까. 계속 승부하고 싶게 만드는... 그렇게 뭐, 끓어오르게 한다고 표현해야 되나? 그런 곳인 것 같아요. 메이저리그는.”

조예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혁이 물었다.

“왜요?”

“류희주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넘어와서 처음 한 말이 그거였어요. 똑같은데? 따라한 거 아녜요?”

“그랬나요? 전 사실 류희주 선배랑 따로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요. 잘 몰랐어요.”

신기하네. 예은이 혼자 중얼거렸다.

“선수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 같은 사람은 아마 평생 모를 거예요. 너무 신기해. 어쨌든 오늘 홈런은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해요! 첫 홈런을 카브레라 정도 되는 타자한테 맞았으면 그것도 괜찮죠. 그렇지 않아요? 애매한 선수들한테 맞는 것보다는.”

“하하. 그렇네요.”

“류희주 선수가 DL에 올라가서 마침 동부로 넘어왔는데. 지혁 선수 데뷔전도 보고. 다행이에요. 나도 당분간은 탬파베이를 따라다닐 테니까 앞으로도 자주 봐요, 우리.”

예은이 손을 척 하고 내밀었다. 지혁도 악수로 받아줬다.

“네. 잘 부탁드려요.”

예은이 깔깔대며 웃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첫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

- 탬파베이 문지혁, 메이저리그 데뷔전. DET전 2이닝 1실점.

- 깜짝 콜업에 이은 데뷔까지... 문지혁의 인생역전.

- ‘준비된 메이저리거’ 문지혁. 메이저리그 입성!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도 우후죽순처럼 지혁의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저 중에서 현장에서 직접 기사를 보고 쓴 사람은 조예은이 유일하다. LA 다저스의 류희주가 부상당해 DL에 오르자 한국 기자들은 최성수가 있는 텍사스로 전부 몰려갔다.

그러던 사이 아처가 부상으로 로스터에서 빠지자마자 바로 지혁이 콜업되었고 합류하자마자 데뷔전을 치른 것이다. 오직 조예은만이 더램의 이형진과 문지혁을 한 번 취재하려고 미국 동부로 넘어와 있었다가 운 좋게 대박을 잡은 셈이다.

그 동안 한국 언론에서는 오직 LA 다저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마이너리그 소식까지 챙겨보는 야구팬들이 아니면 문지혁이라는 이름은 거의 들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예은이 찍어 올린 지혁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영상은 제법 대단한 조회수를 기록했다. 얼마 전 트리플 A에서 퍼펙트게임을 했었던 투수라는 이력이 덧붙여진 채로 대형 커뮤니티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탬파베이가 ‘우리탬’, ‘제한탬’이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루면 충분했다. 지혁은 한국에서도 빠르게 ‘라이징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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