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 >
메이저리거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달라진 대우를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구단이 마련해 놓은 호텔에서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자다가 눈을 뜨고, 쾌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각종 서비스를 대접받을 때에는 더더욱. 어제까지만 해도 더램 근처의 그저 그런 집에서 아침을 맞았었는데.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침대에 드러누워 TV를 틀어놓고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를 훑어본다. 조금 출출하지만 점심이야 클럽하우스 안에 마련된 식당에서 먹으면 된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호텔을 나섰다. 어제 급하게 올라오느라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구단은 이미 준비를 마쳐 놓았다. 지혁이 원한다면 집도 하나 마련해 줄 기세다. 세세한 것은 패트릭이 믿음직하게, 다시 말해 구단에게는 악랄할 정도로 깐깐하게 책임질 것이라서 지혁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경기장으로 출근하는 길은 상쾌했다. 플로리다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더 바랄 게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제는 190에 달하는 키를 원정 버스에 구겨 넣고 몇 시간이고 덜컹거릴 일도 없고, 배가 고픈데 핫도그 가게에서 20분씩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일찍 왔네요?”
트로피카나 필드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인사를 해 준다. 지혁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라커에 들어가자 클러비들이 분주하게 유니폼을 세팅해 주고 있다.
아. 이게 메이저리거지.
생활의 여유를 찾게 되니 간사하게도 어제까지는 대체 어떻게 버텼지 싶다. 메이저리거의 혜택을 하루도 채 누리지 않았지만, 한 번 메이저리그에 올라오고 나면 절대로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느낌만큼은 그대로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문?”
“좋은 아침이에요, 에반.”
탬파베이의 최고 스타인 에반 롱고리아가 피곤한 얼굴로 라커에 앉아 있다가 지혁을 맞았다. 이번 시즌 롱고리아는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다. .250대 근처를 배회하는 타격 성적은 롱고리아라는 선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성적이 롱고리아의 리더십이나 권위까지 빼앗아가지는 않는다.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는 선수다.
“어제 공 괜찮던데. 긴장도 별로 안 한 것 같고 말이야.”
“고맙습니다. 재밌었어요.”
“보통 루키들이 마운드에 올라가면 걱정을 많이 하는데. 너는 달라서 마음에 들어. 계속 그렇게만 하면 충분히 잘 할 거야.”
롱고리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지혁을 다독여주었다.
“많이 피곤한가 봐요?”
“어. 요새 잠을 잘 못 자거든.”
“왜요?”
“엘르가 새벽에 너무 자주 울어서.”
“엘르?”
“내 딸이야. 사진 한 번 볼래?”
롱고리아는 어느 때보다 빠른 동작으로 주머니 속 핸드폰을 가져와 딸 자랑을 시작했다.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엘르가 쌔근쌔근 자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몇 번씩 돌려보는 롱고리아는 입을 헤벌레 벌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봐. 손가락 꼬물거리는 거. 아, 하느님.”
지혁은 그렇게 롱고리아에게 20분이 넘게 잡혀 있었다. 분명히 롱고리아와 가까워진 시간인 것 같기는 한데, 롱고리아보다 엘르와 훨씬 더 친해진 기분이다. 한참을 빙구 같이 웃던 롱고리아가 마사지를 받으러 떠나고 나서야 지혁은 그라운드로 나왔다.
“어? 문! 너도 이리로 와. 마침 잘 됐다.”
더그아웃 앞을 지나가던 케빈 키어마이어가 환하게 웃으며 지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파울 지역 한 쪽에 기자들 무리가 잔뜩 몰려 있었다.
“너도 이거 해. 나랑 같이 하자. 혼자 하면 재미없잖아.”
“이게 뭔데?”
“아이스버킷 챌린지. 알지?”
“얼음물 뒤집어쓰는, 그거 말하는 거야?”
“어. 내가 널 지명할 테니까. 너도 해. 얼음물 한 번 맞고, 기부 한 번 하고.”
아니, 도대체 왜... 라고 할 겨를도 없이. 키어마이어가 기자들 앞에 지혁을 데려다 놨다. 그리고는 직원들 두 명이 끝내기 홈런을 쳤을 때 선수들에게 끼얹는 음료수 통에 가득 채운 얼음물을 키어마이어에게 뒤집어 씌웠다.
“워후! 와, 진짜 차갑네!”
키어마이어가 재롱을 부리듯 뛰어다녔다. 기자들이 웃어대면서도 쉬지 않고 플래시를 터뜨린다. 동영상을 찍고 있던 구단 직원이 지혁을 돌아보며 눈짓했다. 어서 앉으라는 표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지혁은 키어마이어가 앉았던 잔뜩 젖은 의자에 앉았다. 엄청나게 차가운 의자에 엉덩이가 벌써부터 젖기 시작했지만, 지혁은 침착하게 웃으며 동영상에 대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제 레이스에서 데뷔한 투수, 문지혁입니다. 케빈의 지명을 받아서 저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어, 이거 뭐라고 해야 하죠?”
“그냥 해! 뒤집어 씌워!”
하하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웃어제끼는 소리가 들리다가 순간 먹먹해졌다. 얼음물이 정수리를 때리면서 온몸에 흘러내렸다.
“후아아!”
전기에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의 숨구멍이 찌릿찌릿하다. 유니폼 속에 들어간 얼음을 손으로 몇 개 건져내는 지혁에게 직원이 보챘다.
“자, 세 명을 지명해요. 다음으로 도전에 나설 사람. 누구를 지명하고 싶어요?”
“후아, 어우, 차가워. 푸우우. 저는... 첫 번째로는 더램 불스의 이형진. 얘도 찬물 맛을 한번 봐야 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몽고메리에 있는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님이요.”
그냥 생각나는 사람을 꼽자니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은, 음.
“한 명 더요. 누구로 할래요?”
“미구엘 카브레라! 제 메이저리그 첫 경기에서 나한테 홈런을 때렸으니까. 이건 복수예요. 그리고 다음에는 절대 안 질 겁니다. 얼음물보다 더 차가운 공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와하하핫! 루키가 배짱이 대단한데?”
새파란 신인이 카브레라 같은 초대형 스타를 지목한 게 꽤 웃겼던 모양이다. 구단 직원들도 빵 터졌다. 기자들과 키어마이어가 배를 잡고 넘어가려는 장면까지 편집된 동영상이 곧장 탬파베이의 공식 SNS에 올라갔다.
*
“재밌다, 재밌어.”
한바탕 아이스버킷 소동이 있은 후에야 한숨을 돌렸다. 스트레칭을 하면서도 진짜 메이저리거로 돌아왔다는 느낌에 자꾸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온다. 마이너리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하루다.
더램이나 몽고메리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여유가 이곳에는 있다. 경기 전에 웃으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아이스버킷 챌린지 같은 잠깐의 유희를 즐기는 것도. 다 그런 일상의 여유에서 오는 일이니까.
메이저리거에게는 이런 특혜가 주어진다. 여유를 만끽할 시간.
하루하루 느끼는 조바심도 덜하고 끝없는 막막함도 없다. 물론 성적을 내지 못하면 마이너리그로 향하고, 다시 그 하루종일 야구에만 죽을만큼 매달리는 일정의 반복되겠지만. 일단 메이저리거가 되고 나면 생활 자체에, 생각 자체에 여유가 생긴다.
하아-
지혁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평화롭다. 정말로. 단 하루 사이에 극적으로 처지가 바뀌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다. 이 평화로움은 이곳에서 계속해서 생존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서서히 그라운드로 걸어나온다. 스트레칭을 하며 가만히 선수단의 분위기를 살폈다. 어제 3안타 완봉패를 당했는데도, 젊은 선수들이 많아서 그런지 항상 유쾌하고 들뜬 분위기가 유지된다.
롱고리아와 조브리스트는 농담을 나누며 스트레칭을 하고, 제이크 맥기와 브래드 박스버거는 나란히 누워 웃고 떠들고. 저 선수들처럼 안정적으로 로스터를 보장받고 있는 상황이 아닌 지혁은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여유로운 만큼 지독한 압박감도 있지. 절대 여유에 취하면 안 돼. 절대로.’
25인 로스터에 순서를 매기자면 지금 지혁은 25번째 선수.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선발로 두세 경기 등판해서 잘 하는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
경기 시작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트로피카나 필드가 벌써부터 꽉 찼다.
“와우. 오랜만에 관중들이 정말 많군.”
매든 감독조차도 더그아웃에서 살짝 몸을 기울여 3층까지 꽉 메운 관중들을 훑어봤다.
“이번 시즌 세 번째 만원 관중이라는군요.”
힉키가 전광판에 뜬 문구를 읽었다. 두 사람 근처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지혁도 빽빽하게 들어 찬 관중석을 한 번 바라봤다. 어제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어제는 3층은커녕 2층과 1층에도 빈자리가 뭉텅뭉텅 있었는데. 오늘은 이곳이 같은 경기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른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이런 경기에서 지는 건 안 되지.”
매든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야구장의 맞은편 끝을 바라봤다. 데이비드 프라이스. 어울리지 않는 디트로이트의 회색 유니폼을 입은 그가 캐치볼을 하고 있다.
“자! 다들 잠깐 모여 봐!”
힉키가 선수단을 불러모았다. 불펜에 있던 투수들과 불펜 포수들, 그리고 배트보이까지 다 모인 것을 확인한 매든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 동료였고, 또 우리 팀의 에이스였던 녀석이 홈으로 돌아왔어. 그래서 저 친구를 축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이렇게 가득 찼고.”
낮게 갈라진 매든의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깃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매든의 말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마력 같은 것이.
“저 친구는 우리 팀의 영웅이고, 역사고, 또 위대한 동료였지. 우리 모두가 다 알잖아? 프라이스가 얼마나 든든했었는지 말이야. 하지만.”
매든은 뿔테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 안경 속에 숨은 그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모든 선수가 다 지켜보았다.
“여기는 우리 홈이고, 저 친구는 이제 우리의 동료가 아니야. 난 프라이스가 팀을 떠나는 날 저 친구의 앞날에 축복만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말해 줬지만. 그게 우리 팀을 상대로 할 때는 아니었어. 오늘 같이 만원 관중 앞에서는 더더욱.”
“예쓰!”
“어제 실망스러운 경기를 한 건 잊어버리고. 오늘 과거의 동료를 흠씬 두들겨 주자고. 난 그게 우리가 저 친구를 가장 멋있게 환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매든이 말을 마치자 선수들이 하나 같이 소리를 질렀다. 좁은 더그아웃에서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모든 구성원들이 손을 포갰다. 롱고리아의 짧은 구령이 있은 후 파이팅을 외치는 순간 지혁은 소름이 돋았다. 마치 선수들의 기합을 듣기라도 한 듯 관중석에서 우렁찬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
- 장내에 계신 관중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데이비드 프라이스입니다!
디트로이트로 팀을 떠난 프라이스가 트로피카나 필드를 처음으로 원정 방문하는 날. 프라이스와의 추억을 담은 영상이 전광판에 재생되고 꽉 찬 관중들이 열렬한 인사를 보냈다.
그에게 순수한 환영의 인사와 아쉬움의 함성이 쏟아져 내렸고, 프라이스는 어울리지 않는 원정 더그아웃에서 나와 모자를 벗고 팬들에게 응답했다. 프라이스와 탬파베이 팬들의 재회는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멋있다.”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수만의 관중들이 이 넓은 경기장에서 오직 한 명에게만 환호를 쏟아내고 있다. 어쩌면 선수로써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지는 않을까?
“우리 팀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지 않으니까. 저 사람들도 이런 경험이 거의 처음일 거야. 되게 감동적인 장면이지?”
“그러네요. 대단하기도 하고...”
“가까이서 본 프라이스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투수였어. 이런 축하와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지. 하지만 감독님의 말대로야. 질 수는 없지.”
지혁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알렉스 콥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서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
[ 여기는 다시 트로피카나 필드입니다. 엄청난 투수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
[ 5회까지 두 팀 모두 안타를 때려내지 못했습니다. 프라이스가 탬파베이를 상대로 맞이한 역사상 첫 경기에서 대단한 피칭을 하고 있죠. ]
[ 하지만 알렉스 콥도 만만치 않아요. 5회초까지 볼넷 두 개만 내주고 안타를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투수전입니다. 오늘 콥의 체인지업에 디트로이트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춘 적이 있었나요? 제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요. ]
[ 지금까지 탬파베이의 에이스가 프라이스였다면, 지금부터의 에이스는 알렉스 콥이거든요. 콥 선수도 프라이스를 상대로 하는 경기에서 정말로 지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
[ 자. 이제 5회말로 접어듭니다. 탬파베이의 4번 타자, 에반 롱고리아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첫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였습니다. ]
마운드에 있는 프라이스, 그리고 타석에 있는 롱고리아. 트로피카나 필드에 모인 탬파베이의 3만 명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두 선수의 대결. 아마 올 시즌 탬파베이의 경기 중 가장 의미 깊은 경기에서 벌어진 가장 의미 있는 승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승부에서 경기의 승패가 갈렸다.
프라이스의 96마일짜리 높은 패스트볼에 타격 타이밍을 맞춘 롱고리아가 제대로 휘감아 때렸다.
[ 센터 쪽 깊게! 깊게 날아갑니다! ]
탬파베이의 모든 선수들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뛰어나와 담장만을 바라보고, 디트로이트의 중견수 토리 헌터가 있는 힘껏 뛰어올랐지만 그 위로 넘어가는 공에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 넘어갑니다! 에반 롱고리아! 탬파베이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결국 해냅니다! ]
[ 프라이스를 공략하는 롱고리아의 모습이군요. 하하. 대단합니다. 대단한 빅 샷입니다. ]
[ 프라이스를 상대로 드디어 첫 득점을 뽑아내는 탬파베이. 1대0으로 앞서갑니다. ]
트로피카나 필드가 열광에 휩싸였다. 홈런을 때려낸 롱고리아에게도, 그리고 홈런을 허용한 프라이스에게도 탬파베이의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 사람들 그냥 멋있는 게 아니라... 존나 멋있네.”
지혁은 부르르 떨었다. 홈런을 치고 들어온 롱고리아와 하이파이브를 한 손이 제 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경기 전 라커룸에서 본 딸 바보의 헤벌레한 웃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캡틴 롱고리아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