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55화 (56/204)

< 55 -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2). >

“다들! 오늘 아주 좋은 게임이었어! 이대로만 가자고.”

매든 감독이 박수를 짝하고 치자 거짓말처럼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지혁의 경험에 의하면, 그래도 탬파베이는 승리했을 때의 선수들의 ‘흥’이 덜한 편이었다. 라틴계 선수들이나 중남미 선수들이 많은 팀은 말도 다 못 할 정도로 난장판이 된다. 무려 비행기 안이. 탬파베이의 선수단은 백인 선수들이 많은 편이어서 그런지 조금 덜 시끄러웠다.

지혁은 기내에서 이동해도 된다는 방송이 나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의 대형 맥주 냉장고로 향했다. 수도 없이 다양한 맥주들을 이것저것 한아름 챙기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키어마이어도, 카살리도 루키다.

‘그런데 왜 안 오지?’

메이저리그에는 널리 퍼져 있는 문화. 맥주 심부름.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이 미국의 야구판에서 루키들에게 선후배의 위계질서를 잡아주기 위해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내려오던 전통.

비행기에 타면 루키들이 선배들에게 맥주를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전생에서 지혁이 거쳤던 팀 모두가 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혁은 바구니에 맥주 열댓 병을 담아 선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에반. 오늘 고생했어요.”

“문?”

핸드폰 속에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몸을 꼼지락거리는 엘르를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롱고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지혁을 쳐다봤다.

“뭐해?”

“맥주. 안 먹나요?”

“누가 너한테 장난쳤어?”

“무슨 말이죠?”

롱고리아는 지혁의 손에서 맥주 한 병을 빼앗아 쥐며 속삭였다.

“감독님이 우리 팀은 이거 못 하게 했는데. 넌 대체 어디서 이걸 배웠어? 메이저리그도 처음이라면서.”

“아, 그런가요?”

“우리 팀은 냉장고에서 자기가 꺼낸 맥주는 무조건 자기가 마셔야 돼. 하하. 너 그거 다 마실 수 있겠어?”

“아...뇨. 절대로.”

“감독님한테 괜히 걸리지 말고 다시 갖다 놔. 하하하. 한 병은 나 주고. 잘 마실게.”

롱고리아는 낄낄대며 옆 통로에 앉은 조브리스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벤! 너도 한 병 마셔. 이번에 올라온 루키는 누구한테 배웠는지 기합이 아주 잔뜩 들었어.”

“뭐야?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대단한 일을 했단 말이야?”

아직 지혁이 군대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마치 고참들이 신병을 놀려먹는 듯한 표정으로 조브리스트도 맥주를 하나 쥐어챘다.

“대체 얼마만이야? 이런 특급 서비스를 받아보는 게. 하하하.”

“문. 잠깐 거기 앉아봐.”

롱고리아는 단숨에 맥주를 따서 한 입 크게 들이키고는 말했다.

“우리 팀은 어린 팀이야. 구단이 만들어진지도 얼마 안 됐고, 사람들도 많이 어리고. 스몰마켓이라는 팀 특성상 대형 장기계약자도 없어. 나 말고는. 그런데 어린 선수들이나 루키들이 고참들 눈치나 보고 있으면 팀에 에너지가 떨어지게 되지.”

“난 그게 좀 불만이긴 해.”

“시끄러워, 벤. 구단 직원들도 엄청 젊은 거 알고 있지?”

“네. 체임 블룸도 그렇고, 프리드먼 단장도 그렇고. 다른 팀들에 비하면 많이 어리죠.”

“그래. 우리는 컵스나 양키스가 아니야. 유구한 전통이나 역사가 우리 팀에는 없어. 대신 좀 더 자유롭고 에너지틱하지. 메이저리그의 전통이나 이런 것들도 물론 좋지만, 우리 팀에서는 너 같은 루키들이 우리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더 문제란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지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히 메이저리그에 적응하기도 힘든 판에 선배들, 스탭들 눈치보는 건 그야말로 죽을 맛이니까. 우리 팀의 팀 컬러는 너 같은 루키들에게 아주 좋을 거야.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야구에만 집중해. 오케이?”

“얘는 하나도 긴장 안 하는 것 같던데?”

“무슨 말이야?”

“처음 마운드에 올라갔을 때 내가 공을 줬거든? 근데 얘 웃고 있더라고.”

“그래?”

“너, 미스테리 피쳐라며? 벌써 미스테리한데. 한 번 물어보자. 그 때 왜 웃었어?”

오랜만에 메이저리그로 돌아와서 너무 좋아서요.

지혁은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그냥 웃었다.

“전 원래 잘 웃어요. 하하. 그냥 신기해서 웃었어요. 내가 메이저리그에 있는 게 신기해서.”

“봐, 에반. 보통 놈은 아니야. 하하하.”

롱고리아도 신기하다는 듯이 지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혁은 멋쩍게 웃었다.

“어쨌든 우리 눈치를 볼 필요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으니까. 혹시 그럴 것 같은 일이라면 나한테 찾아오든지, 아니면 콥에게 찾아가든지 해. 불편해 할 필요 없고.”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맥주 고마워. 키어마이어 이 녀석은 첫 날부터 자기 것만 날름 챙겼었는데. 건수 하나 생겼으니 한 번 괴롭혀 볼까? 어때, 벤?”

“하하하! 좋지!”

이 팀. 의외로 정말 좋은, 또 정말 유연한 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어느 새 키어마이어의 옆자리로 가 그를 놀리고 있는 두 베테랑을 바라보며 지혁은 내심 안도했다. 이 정도면 클럽하우스에 적응하는 건 문제가 될 일은 없어 보였다.

*

“오늘 게임이 바로 탬파베이 레이스 다운 게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시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조 매든은 승리 인터뷰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힘든 승리를 거뒀지만, 매든의 인터뷰대로 전형적인 탬파베이의 경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와일드카드를 따내는 건 매우 힘든 상황인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구에서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아직 35경기가 남아있습니다.”

알렉스 콥도 MVP 인터뷰에서 여전한 의지를 드러냈다. 콥은 7이닝을 2피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브래드 박스버거와 제이크 맥기는 수호신답게 나란히 1이닝씩을 책임졌다. 리그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타선을 보유한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완벽한 피칭을 선보인 투수진은 확실히 엄청났다.

물론 탬파베이의 컬러대로 타선은 힘을 못 썼다. 하지만 필요한 점수만큼은 확실히 뽑았다. 데이비드 프라이스를 상대로 8이닝 동안 딱 하나의 안타를 때려냈지만, 그 1안타가 바로 롱고리아의 솔로 홈런이었다.

- 우리 팀 선수들이 기세를 타기를 바란다.

프리드먼의 인터뷰도 이번 승리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탬파베이 구단의 입장에서는 스토리가 충분히 만들어져 있는 경기였고, 승리의 과정도 극적이었으니 그럴 법 하다. 하지만 기자들과 팬들의 논조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이미 볼티모어가 압도적인 선두로 치고 나간 상태. 뉴욕 양키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뒤를 따르고 있다. 탬파베이는 어제의 승리로 62승 65패가 되며 보스턴 레드삭스를 5위로 밀어내고 간신히 4위 자리에 올라섰다.

[ 탬파베이가 디트로이트의 발목을 잡으며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조 매든 감독이나 앤드류 프리드먼 단장의 바람은 현실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보입니다. 여전히 갈길이 너무 멀군요. 어쨌든 오늘의 이 승리를 반등의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이번 기회가 레이 스에게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

“반등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라.”

토론토의 원정 숙소에서 TV를 보던 지혁은 씁쓸하게 앵커의 마지막 멘트를 따라 읊었다. 전생의 이맘 때 즈음 탬파베이를 곰곰이 떠올려 본다. 하지만 크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거니와 마이너를 전전하며 앞가림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기에 기억에 남은 일이 거의 없다.

아마 지혁의 기억이 맞다면 올해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짝수 해 왕조’의 역사를 한 번 더 기록할 것이다.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내려고 애써도, 디비전시리즈나 와일드카드 시리즈 경기에 누가 올라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명확하게 알고 있는 건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탬파베이의 이름을 상위권에서 볼 수 없다는 것.

“에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쓸데없이.”

지혁은 머리를 털어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식 때문에, 팀 걱정이나 하는 사치를 부린 셈이다. 지금은 팀 성적이 문제가 아니다. 개인 성적이 문제다. 일단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가 중요했다. 드류 스마일리와 제레미 헬릭슨이 1,2차전에 선발로 나서고. 3차전 선발로 지혁이 낙점되었다.

“토론토. 토론토. 어디 보자...”

강한 타력을 보유한 팀이다. 호세 바티스타와 에드윈 엔카나시온은 이미 50개의 홈런을 합작해 낸 상태이고, 호세 레이예스와 멜키 카브레라, 아담 린드는 3할 타율을 넘긴 타자들이다.

지혁은 늦게까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경기를 돌려보았다. 첫 선발의 상대인데 준비를 허투루 할 수는 없으니까.

*

따아악!

“예에쓰! 뛰어! 뛰어!”

9번으로 나선 키어마이어가 로저스 센터의 우중간을 완전히 둘로 갈라버리는 2루타를 때려냈다. 에스코바와 카살리가 차례로 홈을 밟으며 들어왔다. 탬파베이의 원정 더그아웃이 후끈거렸다. 매든 감독도 농담을 섞어가며 들어오는 선수들을 격려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원정 시리즈 1차전. 모처럼 탬파베이의 타선이 폭발했다. 마커스 스트로먼을 상대로 2회와 4회, 5회에 한 점씩 뽑아내더니 6회에는 네 점을 몰아쳤다.

타이후안 워커 대신 드류 스마일리를 선택한 패트릭이 인상을 쓰고 있을 게 분명하지만, 스마일리는 자신의 커리어 사상 첫 완봉승을 따내버렸다. 그것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득점 1위의 팀, 토론토를 상대로.

다음 날, 이어진 2차전은 치열했다. 탬파베이의 헬릭슨과 토론토의 벌리가 나란히 6.1이닝 동안 2실점했고, 불펜진이 나란히 2실점씩을 하며 블론 세이브를 주고받았다.

4대4로 연장 승부에 들어갔고, 마지막에 웃은 것은 결국 탬파베이였다. 10회초 터진 윌 마이어스의 솔로 홈런 한 방이 승부를 갈랐다.

3연승. 지혁의 선발 경기를 앞두고 탬파베이가 서서히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

“야수들은 시프트 숙지 확실하게 됐겠지? 벤. 벤치 싸인을 잘 봐. 오늘은 문이 올라가는 첫 날이니까 시프트를 더 자주 걸 거야.”

“예스.”

“루키의 첫 경기인데 야수들이 발목 잡지 말자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설픈 수비가 나오면 쪽팔리잖아!”

매든이 선수들을 북돋는다. 젊은 야수들 몇 명이 에에-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지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경기 전 마지막 팀 미팅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나오자 로저스 센터의 내부를 밝히고 있는 큰 TV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한 번 쭉 폈다 접었다.

메이저리그 무대에 선발로 올라간다는 벅찬 감정을, 지혁은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다른 선수들이 일찌감치 더그아웃으로 나가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지혁은 혼자 앉아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저 평범한 한 경기일 뿐이야. 그냥 평범한 한 경기.’

메이저리그 무대에 선발로 등판한다는 것. 분명 특별한 의미다. 전생의 18년 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다가는 큰일 날 게 뻔하다. 기분대로 99마일, 100마일짜리 공을 쑤셔 넣는 투수는 아니니까.

명상하듯 앉아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지워내고 또 지워냈다. 승리하고 포효하는 장면도 털어냈고, 패배하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는 이미지도 흔들어냈다. 해야 할 일은 여느 때처럼 똑같이 마운드에 올라가서 타자와 지혁의 스타일대로 승부하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지.

“문!”

클러비 중 한 명이 시계를 가리켰다. 1시 5분. 경기 시작 5분 전. 글러브를 들고, 모자를 다시 한 번 벗었다 쓰고, 긴 심호흡을 내뱉고. 라커룸에서 일어섰다. 더그아웃으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가는 동안 기분 좋은 웅성거림이 점점 더 커지고, 더그아웃으로 나오자 동료들의 준비 소리와 잡담이 귀에 똑똑히 박힌다.

“고, 고, 고!”

“긴장하지 마!”

“시작부터 날려버려!”

탬파베이의 데스몬드 제닝스가 서서히 타석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보인다. 2014년 8월 24일 오후 1시 10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홈구장 로저스 센터에서, 지혁이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입고 처음 선발 등판하는 경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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