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 큰 코 다칠걸? >
[ 허친슨의 6구. 받아 때립니다! 하지만 3루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군요. 후안 프란시스코가 1루로 송구하며 처리합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1회초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납니다. ]
[ 허친슨이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요. 오늘 토론토는 반드시 승리가 필요한 입장인데, 일단 시작이 훌륭합니다. ]
[ 그렇습니다.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세 경기를 뒤져 있는 토론토. 이번 시리즈에 탬파베이에게 뒷덜미를 제대로 잡히고 있는데요. 오늘 세 번째 경기까지 내줘버리면 정말 위험해집니다. 그리고 탬파베이 입장에서는 제대로 고춧가루를 뿌리고 싶을 텐데요. 오늘의 임무를 맡은 선수는 루키입니다. 지-혁, 문. ]
마운드로 뛰어 올라가는 지혁의 모습이 원샷으로 잡히고, 지혁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세 개가 차례대로 떠올랐다. 캐스터는 하나씩 짚어나갔다.
[ 미스테리 피쳐. 문의 닉네임이라고 하는군요. 쿨한 별명이군요. 왜 미스테리 피쳐일까요? ]
[ 하하. 글쎄요. 이 선수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 많이 없을텐데, 갑자기 메이저리그에 선을 보인 걸로 봐서는 분명히 뭔가 미스테리하긴 하군요. ]
[ 두 번째 키워드는 싱커입니다. 싱커를 아주 잘 쓰는 투수입니다. 마이너리그에서 올 시즌 기록한 땅볼 비율이 57%입니다. ]
[ 대단한 수치입니다. 엄청나게 극단적인 땅볼 피쳐라고 볼 수 있는 정도네요. ]
[ 그래서 나온 세 번째 키워드가 바로 ‘Rays-ly(탬파베이스러운)’라는 말이네요. 탬파베이의 가장 두드러지는 컬러 중 하나가 매든 감독의 수비 시프트인데요. 문이 이 시프트와 얼마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
“굿!”
오늘 지혁의 파트너인 베테랑 포수 호세 몰리나가 마스크를 벗고 지혁을 격려해줬다. 오늘 싱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패스트볼도 생각보다 손끝에 잘 걸렸다. 어제 야간경기를 치르고 곧장 낮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에 중점을 뒀는데, 덕분인지 구속도 꽤 잘 나오고 있고.
“좋아. 이 정도면 괜찮아.”
지혁은 스스로를 격려하며 마운드에 서서 우타석에 들어선 호세 레이예스를 응시했다. 잘 치고 잘 뛰는, 내보내면 곤란한 선수. 베테랑인 레이예스의 얼굴에 비웃음 비슷한 것이 입가에 걸려 있다. 루키의 공 따위 자신 있다는 표정이다.
“플레이 볼!”
구심의 선언이 있자마자 지혁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몰리나의 거대한 몸과 그 몸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미트만 바라보고 패스트볼을 뿌렸다.
“스트라이크! 원!”
[ 초구, 스트라이크. 바깥쪽 경계에 잘 걸쳤습니다. ]
[ 폼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디셉션이 있는 것 같네... ]
[ 바로 던집니다. 2구. 바깥쪽 높은 코스에 또 들어갔습니다. 스트라이크 투. ]
[ 와. 인터벌이 정말 빠르군요. ]
[ 하하하. 짐이 뭔가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그 사이에 벌써 공 두 개를 던졌습니다. 오, 이런! 이번엔 제 말 도중에 3구를 던졌습니다. 레이예스가 방망이 끝으로 간신히 밀어냈습니다. 파울. ]
경기 초반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빠른 인터벌을 가져가기로 한 것은 지혁의 아이디어였다. 그와 호흡을 맞출 포수가 카살리처럼 경험이 부족한 선수가 아닌 호세 몰리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39살의 몰리나는 정말 구를 대로 구른, 닳을 대로 닳은 선수였다. 괜히 지혁이 스스로 공을 결정하는 것보다는 몰리나가 내는 첫 번째 사인에 무조건 맞춰서 던지면서 최대한 투구폼과 공을 볼 시간을 덜 주려는 심산이었다.
패스트볼 세 개 이후에 싱커. 계속해서 바깥쪽을 공략하다가 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 결정구를 위한 몰리나의 준비는 완벽했다. 지혁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으쌰!”
짧은 기합과 함께 지혁의 손끝에서 떠난 싱커가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을 파고들다가 순식간에 꺾여 떨어진다. 레이예스가 오른손을 놓으면서 방망이를 가져다 대 보려 했지만 몰리나의 앞에서 원바운드까지 된 공을 맞추지는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몰리나가 재빠른 동작으로 바운드시킨 공을 주워들어 레이예스를 태그했다. 시작이 삼진. 선발 데뷔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호세 레이예스를 상대로 한 투구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다.
2번 타자 멜키 카브레라를 상대로도 비슷한 패턴의 피칭이 이어졌다. 패스트볼과 싱커를 제외한 어떤 공도 던지지 않되, 엄청나게 빠르고 짧은 인터벌로 순식간에 승부를 이어갔다.
초구와 2구, 낮게 떨어지는 싱커를 그냥 지켜본 카브레라는 3구째 패스트볼에 스윙을 돌렸지만 빗맞은 타구가 나왔고.
“써드!”
3루수와 유격수 사이 애매한 위치에 떠오른 공을 롱고리아가 잡아내며 투 아웃. 지혁은 초반 전략이 먹혀 들어가는 게 매우 만족스러웠다.
[ 출발이 상쾌합니다. 보통 루키들이 1회에 고생을 하기 마련인데요. 두 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
[ 말씀대로입니다. 1회는 많은 투수들이 힘겨워하는데, 오늘 선발로 나온 두 투수는 모두 아주 잘 시작하고 있습니다. ]
[ 타석엔 호세 바티스타. 시즌 타율이 2할8푼4리. 홈런은 20개를 쏘아올렸습니다. ]
[ 지금부터가 문제입니다. 무자비한 타선이거든요? 바티스타, 엔카나시온, 아담 린드. ]
다음 타자는 호세 바티스타. 2011년 홈런왕이었고, 파워 하나만큼은 카브레라보다도 더 좋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 공을 쪼개버리는 듯한 스윙과 큰 리액션으로 ‘몬스터 홈런’을 숱하게 만들어낸 놈이다. 경기 전에 수도 없이 돌려본 자료에 의하면 토론토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타자다.
‘약점은 낮은 공... 떨어지는 공이 필요한데. 슬라이더를 던져 볼까?’
마운드에서 잠깐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호세 바티스타가 특유의 건들거리는 폼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껌을 질겅질겅 씹는 입.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까지 보이는 눈빛. 방망이를 들어올리기 전에 묘하게 외야 쪽을 가리키는 듯한 동작. 잠깐, 홈런 예고 세리머니?!
‘이 새끼가?’
전형적인 녀석이다. 투수의 신경을 긁는 DNA가 선천적으로 포함된 듯한 녀석. 저런 타입의 타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대놓고 투수를 무시하는 제스쳐를 취한다고?
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가볍게 두 팔을 벌려봤지만 바티스타도, 심판도 무시했다. 이 곳, 메이저리그가 루키에게 관대한 곳은 아니니까.
게다가 바티스타는 그런 쪽으로는 타고난 선수인 모양이었다. 프로 생활을 통틀어서 만나봤던 모든 선수들 중에서도 수위권에 들 것이다. 그만큼 기분이 더러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투수를 자극하는 데는 천부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그냥 마운드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다.
[ 초구. 몸쪽으로 바짝 붙습니다. 93마일의 패스트볼. ]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을까? 지혁의 초구가 바티스타의 몸에 가까이 붙었다.
엉덩이를 쭉 빼며 공을 피한 바티스타가 인상을 팍 썼다. 당장이라도 방망이를 던지고 마운드로 달려들 듯이 지혁을 꼬나본다. 몰리나로부터 공을 돌려받은 지혁이 침을 한 번 뱉었다. 그리고 지혁도 살벌한 눈으로 바티스타를 쳐다봤다.
2구. 몰리나가 바깥쪽에 미트를 댔다. 하지만 공이 몸쪽으로 붙었다. 싱커가 낮은 쪽 스트라이크 존에서 바티스타의 뒷발 발등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Holy fuck!”
바티스타가 욕설을 내뱉었다. 힘이 들어가서 제구가 잘 안 된 거였는데, 그럴 수도 있지, 이 새끼야.
지혁은 바티스타의 큰 액션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몰리나가 넉넉하게 바깥쪽에 자리잡았고, 이번엔 낮은 쪽에 싱커가 제대로 꽂혔다. 살짝 아슬아슬한 공이지만...
“스트-라이크!”
주심이 손을 올렸다.
‘다행이다. 쓰리볼 몰렸으면 기분 더러울 뻔 했는데.’
지혁이 느끼는 것과 바티스타가 느끼는 것은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바티스타는 한두 발 정도 뒤로 물러나면서 구심에게 항의 비슷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 바티스타는 판정이 아쉬운 모양이군요. ]
[ 아슬아슬하게 걸쳤습니다. 싱커의 무브먼트가 꽤 좋아서 타자 입장에서는 멀어 보였을 수 있죠. ]
[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문의 네 번째 공입니다. 살짝 빠지는군요. 높은 위치에 들어가는 패스트볼. 볼 쓰리가 됩니다. ]
후우. 바티스타가 허리를 뒤로 젖히며 오버액션을 하는 꼴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쓰리볼.
파워가 어마어마한 타자에게 반드시 스트라이크를 잡아야만 하는 카운트로 몰린 것은 더더욱 기분이 나쁘다. 그렇다고 유인구를 던지자니 저 건들거리는 놈에게서 피해가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고.
‘싱커. 낮게.’
몰리나의 싸인은 변함없었다. 지혁이 고개를 저었지만 손가락이 꿈쩍도 않는다. 존에서 떨어져도 좋으니 최대한 낮게. 어쩔 수 없이 낮게 싱커를 던졌다. 최대한 낮은 곳에 걸치게 던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구심은 꼼짝하지 않았다.
“볼. 베이스 온 볼스.”
구심은 몸을 일으키며 1루를 가리킨다. 바티스타가 방망이를 툭 떨어뜨리며 명백한 비웃음을 흘리고는 1루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이런. 썅.”
공을 많이 보지 않게 하려는 초반의 전략이 두 타자에게는 통했는데. 바티스타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만 놓고 보면 바티스타의 신경전에 지혁이 말린 꼴이 되어버렸다.
“침착하게 해!”
4번, 엔카나시온을 상대하기 직전 조브리스트가 뒤에서 격려하는 말을 건넸다. 지혁은 묵묵히 세트 포지션에 들어갔다. 1루에 있는 바티스타가 쓸데없이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심기를 거슬리게 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흥.
1루를 바라보고 서서 한참동안 바티스타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던 지혁이 투구에 들어갔다.
[ 타석엔 엔카나시온. 초구. 바깥쪽으로 들어갑니다. 스트라이크. ]
[ 슬라이더네요.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던졌습니다. ]
[ 1루에 있는 바티스타 선수는 올 시즌 도루 5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리드폭을 꽤 길게 가져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
[ 다리가 긴 선수죠. 루키 투수를 흔들어보려는 마음도 있는 것 같군요. ]
2구를 던지기 전에도 지혁은 한참 동안이나 바티스타를 응시했다. 바티스타는 그럴 때마다 반 발자국씩 리드를 늘렸다가 줄였다가를 반복하며 지혁을 도발했다.
엔카나시온에게 던진 2구는 볼 판정을 받았다. 몸쪽으로 붙인 패스트볼이 한 개 정도 깊숙했다. 3구는 바깥쪽에 걸쳐 들어갔다고 생각되던 싱커. 지혁이 보기엔 분명히 들어간 것 같았지만 볼 판정이다.
그러나 지혁은 3구가 볼이 된 것이 아쉽지 않았다. 한 가지 기가 막힌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1루에 있는 바티스타는 지혁을 흔들기 위해 별 쇼를 다 하고 있었다. 방금도 마치 빠른 주자들이나 하는 것처럼, 도루를 하는 척 하며 잠깐 스타트를 끊었었다.
“타임.”
4구를 던지기 전, 지혁은 몰리나의 싸인을 전부 거부했다. 그러자 몰리나가 타임을 걸고 마운드에 올라왔다.
“이봐. 루키.”
“예?”
“저런 쓰레기 같은 놈한테 왜 관심을 줘?”
“쓰레기? 바티스타요?”
“그래. 넌 루키야. 저 놈은 루키를 노리고 일부러 도발하는 녀석이고. 그냥 넌 미트만 보고 던져. 공 괜찮아. 그러니까 미트에만 집중해.”
“잠깐만요, 호세.”
몰리나가 지혁의 엉덩이를 한 번 치고 다시 홈플레이트로 내려가려던 차에 지혁이 멈춰 세웠다. 계획은 계획대로 세워 놨는데 아직 내려가면 안 되지, 이 양반아.
“왜?”
“바티스타는 계속 리드폭을 늘리고 있어요. 이번에도 인터벌을 최대한 길게 가져갈게요. 바깥쪽 한 개 빠지는데다 던질 테니까 바로 1루로 뿌려 주세요.”
“1루 픽오프라고?”
“네. 홈에서 날아올 거라고는 생각 안 하고 있을 거예요. 저 새끼 저거 아주 신났는데 제대로 한 번 먹여야죠.”
몰리나가 1루 쪽을 한 번 흠칫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얄미운 얼굴로 1루의 주루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티스타는 분명히 이 루키 투수를 흔들려는 마음만 갖고 있지, 본인이 역으로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좋아. 한 번 해 보자.”
몰리나가 내려가고, 지혁은 연기에 들어갔다. 바티스타가 째려보는 눈빛을 한참 받아주다가 눈빛을 피하듯이 슬쩍 시선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러자 바티스타가 반 발자국 정도 리드폭을 더 늘렸다. 인터벌이 길어지자 다시 반 발자국을 더.
‘넌 뒤졌어, 새끼야.’
슬라이드 스텝으로 4구째를 던진다. 바깥쪽 패스트볼. 넉넉하게 두 개 정도 빠지는 아웃코스에 들어간 공을 튀어오르는 동작과 동시에 포구한 몰리나가 곧장 1루로 송구했다. 지혁의 시선이 공을 따라 1루 베이스 위로 향했다.
자기 딴에는 투수를 흔들어 보겠다고 도루하는 시늉까지 하던 바티스타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황급히 복귀했지만 1루수 로니의 글러브가 베이스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웃!”
1루심의 호쾌한 액션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지혁은 모자를 벗으며 몰리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보내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내려가며 한국어로 바티스타 욕을 한 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나이스 태그였어요. 고마워요, 로니.”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루키한테 순전히 의지할 거라고 생각했어?”
로니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쪽 구석에서 포수 장비를 풀고 있는 몰리나를 가리키며 농담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양반 어깨가 원래는 고등학생 정도 되는데. 까마득한 루키 챙겨준다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낸 거야. 그러니까 다음 이닝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어?”
“네. 하하.”
챙겨주긴. 내가 만든 건데. 하하.
1루 베이스에서 주루사를 당한 바티스타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쌤통이다,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