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57화 (58/204)

< 57 - 아직은. >

2회, 선두타자 엔카나시온에게 패스트볼 승부를 들어갔다가 빗맞은 안타를 줬다. 억지로 당겨친 타구가 유격수 에스코바의 키를 아주 살짝 넘어가는 기분 나쁜 안타였다.

하지만 5번으로 나온 아담 린드를 평범한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했고, 6번 디아너 나바로는 3루수 직선타로. 콜비 라스무스를 상대로는 떨어지는 공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좋아!”

매든 감독과 동료들의 하이파이브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있어야 할 자리에 온 것처럼. 두근거리고 흥분에 가득 찼던 마음이 이닝을 거듭할수록 가라앉았다.

3회는 조금 길었지만, 그래도 점수를 주지 않았다. 도미니카에서 같은 팀에 있었던 후안 프란시스코에게 볼넷을 줬지만 일본인 내야수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2루수 앞 병살타로 돌려세웠다.

2사 후에 들어선 레이예스에게 3루수 앞 번트안타를 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멜키 카브레라를 파울 플라이로 처리해내면서 마무리.

그리고 4회. 호세 바티스타와의 재대결.

[ 3이닝 동안 볼넷 두 개, 안타 두 개를 허용하고 있는 탬파베이의 문. 바티스타를 상대합니다. 초구는 볼. ]

[ 아주 좋은 시작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 공도 좋았습니다. 배트를 유인할 수 있는 공이었어요. ]

[ 오늘 존이 조금 좁은 것 같죠? 피칭존에는 걸친 공으로 표시됐습니다. ]

루키라서다. 심판의 존이 루키에게 보다 짜게 적용된다는 건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이다. 초구도 카운트를 잡기 위해 던졌던 공인데.

‘눈빛이 좀 바뀌었는데?’

타석에 선 바티스타에게서 1회와는 다른 분위기가 뿜어졌다. 멍청한 주루사를 한 번 당했으니 이번 타석에서 반드시 만회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지혁은 1회 때보다도 훨씬 더 조심스럽게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볼.”

바깥쪽, 비슷한 코스. 이번에는 아주 미세하게 존 안으로 더 걸쳐 들어갔는데, 여전히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몰리나는 한참 동안이나 미트를 포구 위치에 대고 있으면서 무언의 압력을 가했지만 심판이 꿈쩍도 않는다.

투 볼로 몰린 카운트. 뭔가 해내겠다는 의지가 강한 타자. 게다가 홈런왕 출신의 거포. 바티스타는 분명히 풀스윙을 돌릴 것이다.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하나 내주더라도 풀스윙을 돌린다. 맞았다간 공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며 로저스 센터 천장을 맞춰버릴 것 같은 타구가 나올, 그럴 스윙. 공을 던지기 전에도 알 수 있었다.

지혁은 서서히 글러브를 들어올리고는 있는 힘껏 몸통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세 손가락으로 감아쥔 야구공이 미끄러지듯 손에서 빠져나갔다.

[ 3구, 때립니다! 힘없이 유격수 앞으로 굴러가는 타구. 에스코바가 간단하게 처리합니다. 문이 4회도 경쾌하게 시작합니다. ]

[ 체인지업인가요? 방금 공은 오늘 경기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 같네요. ]

[ 다시 보시죠. ]

[ 체인지업, 맞네요. 여기서 체인지업을 선택했네요. 정말 스마트합니다. 패스트볼과 싱커에 타이밍을 맞춰서 풀스윙을 돌렸는데 체인지업이 들어오면 이런 힘없는 타구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

[ 타이밍을 완벽히 빼앗았습니다. 매든 감독의 모습이 나옵니다. 웃고 있을 수밖에 없죠. ]

호세 바티스타를 처리한 지혁은 마운드 위에서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24살짜리 투수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베테랑의 향기가 난다. 풀풀. 그것도 그냥 베테랑의 향기가 아닌, 밑바닥부터 구르고 깨져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베테랑의 향기가.

그래서 매든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아, 이런.

지혁은 공을 던지는 순간 후회했다. 오늘 경기에서 유일하게 장타를 허용했던 엔카나시온에게 어려운 승부를 하려다가 카운트가 몰렸고, 마지막 공은 손에서 빠져버렸다.

6회, 멜키 카브레라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1아웃은 잡아놓은 상태. 엔카나시온을 볼넷으로 내보내며 주자가 두 명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벤치에서 매든 감독이 움직였다.

“블루-제이스! 블루-제이스!”

모처럼 잡은 기회에 토론토의 홈 팬들이 들썩이는 상황. 스코어 1대1의 팽팽한 경기에서 투구수 100개에 육박한 루키에게 더 이상 마운드를 지키게 할 수는 없으리라. 매든이 야구공을 손에 쥐고 마운드로 걸어 올라왔다.

“여기까지네.”

“...”

“잘 했어. 아주 잘 했어.”

롱고리아와 조브리스트도 마운드로 모여들어 지혁을 격려한다. 매든이 손을 내민다. 글러브 속에 담긴 공을 내주려고 하니 손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문.”

매든이 지혁의 이름을 한 번 부르자 어쩔 수 없었다. 모자를 벗고 땀을 닦으며 지혁은 공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마운드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옮겼다. 토론토의 홈 팬들이 내려가는 루키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듯 ‘블루-제이스!’를 더 크게 연호한다. 더그아웃으로 내려가는 계단 다섯 개를 밟기가 아쉬웠다.

“수고했어.”

힉키 코치가 씩 웃으며 뒷통수를 세게 한 번 쳐 줬다. 루상에 두고 온 주자 두 명이 계속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지만, 지혁은 얌전히 더그아웃에 앉았다.

푸우우.

입술을 털어봤지만, 여전히 마음이 마운드 위에 있다.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 경기의 여운에서 지혁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

9회까지 1대1의 스코어가 유지되었다. 팽팽하던 경기는 어제 2차전과 마찬가지로, 큰 것 한방으로 갈렸다. 벤 조브리스트가 들어서야 할 타석에 대타 로건 포사이드를 출전시킨 매든의 한 수가 적중했다. 토론토의 마무리 투수인 케이시 얀센은 다이나믹한 폼으로 커터를 뿌렸지만 한복판으로 몰렸고, 포사이드는 있는 힘을 다해서 풀스윙을 돌렸다.

배트에서 공이 뻗어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탬파베이 더그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만세를 불렀다. 로저스 센터 외야 관중석 2층에 떨어진 타구를 바라보며 포사이드도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후우우아아! 이 미친 친구야!”

“로건! 로건! 예쓰으!”

누군가는 헬멧을 벗기고, 누군가는 정신없이 머리를 내려쳤다. 지혁도 루키답게 있는 힘을 다해서 기뻐해줬다. 벤 조브리스트의 백업 자리를 전전하고 있던 포사이드가 한 방을 터뜨린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였다.

“팀의 기세를 살린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매든은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4연승을 거뒀다는 것도 물론 좋지만, 로건 포사이드라는 선수가 정말 필요할 때 한 방을 해줬다는 건 우리에게 큰 의미입니다. 로건은 언제나 묵묵하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죠. 로건이 오늘 보여준 한 방은, 로스터에 있는 25명이 모두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드러나지 않는 선수들이 활약해주기 시작하면 팀에 추진력이 붙습니다.”

“ESPN의 케니 제이입니다. 한 가지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오늘 선발 등판한 문지혁 선수의 투구를 어떻게 보셨는지 평가 부탁드립니다.”

“오, 문. 아주 좋았습니다. 토론토를 상대로 주눅들지 않았고, 본인 스타일대로 본인의 피칭을 했죠. 훌륭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선발로 테스트하실 예정입니까?”

“물론이죠. 크리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서 뛸 겁니다.”

“크리스 아처가 복귀하고 나면 로테이션이 좀 꼬일 텐데요?”

“그 때는 기분 좋은 고민을 해야겠죠.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

“어때요?”

“잘 했네요.”

“끝?”

“그러면 뭘 더 바랍니까?”

“거 참. 칭찬할 때 좀 더 쓰면 좋을텐데.”

패트릭은 덤덤했다. 지혁은 괜히 투덜거렸지만, 패트릭이 덤덤한 게 오히려 평소 같아서 좋았다. 매든 감독부터 트로피카나 필드 경비원 아저씨까지. 하나 같이 아주 좋은 경기였다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다. 애초에 그들의 기대치가 크리스 아처의 자리를 땜빵할 수 있는 5선발용 루키 정도였으니까. 그 기준에서 본다면 성공적인 투구겠지.

오늘 경기, 5.1이닝 1실점. 볼넷이 네 개, 피안타가 세 개. 루키가 메이저리그 팀을 상대해서 처음 던진 성적표치고는 나쁘지 않은 게 분명했지만. 좋았다고 말하기도 찝찝했다. 특히 볼넷 때문에 투구수가 많았던 게 마음에 계속 걸렸다.

상대하는 타자들의 차원이 달라서 그렇다. 더블 A나 트리플 A의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뿐이다.

게다가 심판의 존도 루키에게 비협조적이다. 타고난 구위가 대단해서 한가운데 쑤셔박아도 되는 투수가 아닌 지혁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다. 어설프게 승부에 들어갔다가 곧장 담장 바깥으로 날아가 버리니까.

모든 타자에게 어려운 승부를 할 수밖에 없다. 선구안도, 타격 스킬도, 타격에 대한 이해도 모두 압도적으로 다르다. 그렇기에 마운드에 선 지혁에게 가해지는 압박감도 그만큼 크다. 전생에서 패전처리로 뛸 때보다도 더 그렇다.

지금은 선발이고, 선발투수를 상대하는 타자들의 마음가짐과 승부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투수를 상대하는 타자들의 마음가짐은 천양지차니까.

“여전히 구위가 좀 부족한가...”

엔카나시온이 지혁의 싱커를 잡아당겨 좌측 담장을 노바운드로 때리는 2루타를 만들어냈던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본다. 한 개 정도 높았지만 나름대로 꽤 괜찮게 제구된 공이었다. 하지만 저 어마어마한 파워에 걸리니 여지없이 뻗어나갔다.

싱커를 손본 지 정말 얼마 안 됐다. 웹의 싱커를 알렌의 방법대로 조련한 이후 훨씬 더 파워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저 우락부락한 타자들의 파워를 완전히 이겨내지는 못한다. 하긴, 채프먼이 던지는 105마일짜리 패스트볼도 홈런으로 만드는 녀석들인데.

이 파워를 이겨내려면 제구를 잡아야 한다. 어떻게 쳐도 땅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코스로만 집어넣어야 한다. 아직까지 공이 날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경기 후반으로 가서 악력이 떨어질수록 더 그렇고.

문제는 제구다.

지혁은 되뇌었다. 문제는 제구다. 신경 써야 할 것은 제구, 제구다.

*

4연승의 분위기가 끊겼다. 디트로이트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부터 시작된 상승세는 토론토 원정 시리즈를 스윕하며 불이 붙었었는데. 그 상승세가 단박에 뒤집어져 버렸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강했다. 정말 강했다. 그들의 홈구장인 ‘캠든 야즈’는 아찔할 정도로 공이 잘 날아갔다.

탬파베이의 1차전 선발투수는 제이크 오도리찌였다. 하이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쓰는 독특한 신인. 그런데 이 날은 공에 위력이 덜 실렸다. 구속도 92~93마일 정도를 겉돌았고, 공을 때리는 힘도 약해보였다.

“...”

더그아웃에 있는 모든 선수들이 말을 잃었다. 찬물로 벼락을 맞은 것처럼.

3회말. 1대0의 리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볼티모어의 테이블 세터인 닉 마카키스와 스티브 피어스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고 경기가 뒤집어진 것이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5회말, 델몬 영에게 좌월 홈런. 다음 타자인 J.J. 하디에게 우중월 홈런. 교체 투입된 커비 예이츠가 또 그 다음 타자인 크리스 데이비스에게 큼지막한 우월 홈런. 백투백투백을 허용한 것이다.

“이런 날도 있지. 내일 경기에서 제대로 복수하자고.”

롱고리아가 이례적으로 패배 후 선수단을 불러모았다. 한 경기에서 다섯 개의 피홈런. 그것도 몰아서. 와장창. 까마득한 곳으로 날아가는 공들을 바라보며 마치 미어캣마냥 고개를 돌려야 했던 탬파베이 선수단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냥 한 경기야. 내일 그대로 되갚아주면, 기세를 살려나갈 수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마!”

매든 감독도 롱고리아의 말에 힘을 실었다. 시즌은 막바지로 향하지만, 아직 매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