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59화 (60/204)

< 59 - 기적의 끝을 잡고(2). >

“핸드폰 줘 봐요. 빨리.”

패트릭은 자신의 핸드폰을 받자마자 곧장 탬파베이 클럽하우스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의 트위터를 훑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기자들이 가장 빠르다. 왜 교체되었는지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투구수도 아직 괜찮고, 공도 좋은데 교체라...”

아무 말도 없으면 다행이다. 단순히 매든의 선택에 의한 교체라면. 혹시라도 조기 교체가 부상 때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순식간에 몇 명의 기자들을 추적하던 패트릭이 인상을 팍 구겼다.

- 문의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듯.

이 시점에서 부상은 최악인데. 이제 막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올라와서, 이제 막 두 번 선발 등판했고, 오늘 경기에서 승리를 따낸다손 치더라도 이제 막 경쟁의 장으로 들어온 셈인데. 지금 상황에서의 부상은 너무도 좋지 않다.

패트릭이 곧장 탬파베이의 프런트 오피스로 전화를 걸려는 순간, 그의 전화가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누구야?”

“그거 제 번호요! 저, 잠시만요.”

패트릭의 액정을 지켜보던 연두가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그거 제 핸드폰인데, 제가 잃어버려서요. 지금 혹시 어디 계신가요? 받으러 가려고 하는데요.”

연두는 적을 것을 찾다가 다이어리가 없어진 걸 확인했다. 허겁지겁 자신의 손바닥에다가 상대방의 위치를 적더니 패트릭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찾았어요!”

그리곤 뒤도 보지 않고 관중석 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참, 정신없는 여자다. 딱 질색이야. 이제 막 7회초가 시작된 팬웨이 파크 안쪽 깊숙한 통로로 들어가며 패트릭은 방금 그 정신없는 여자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털어내 버렸다.

*

클럽하우스에는 이미 꽤 많은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댈 준비만 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순위가 뒤바뀌었다. 탬파베이가 보스턴을 잡는 동안 토론토는 볼티모어에게 졌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는 탬파베이가 3위로, 그리고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는 6위로 올라섰다. 토론토가 한 칸씩 내려갔고.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유니폼까지 갈아입은 지혁이 라커룸에서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 쪽으로 우루루 몰려간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패트릭은 고민해야 했다.

끼어들어야 하나? 경력만 놓고 보면 분명히 햇병아리인데, 막상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할 때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흐름을 끌고 가는 선수란 말이지.

“손톱 끝이 아주 살짝 깨졌습니다. 지금도 던질 수 있는 상태예요. 저는 던질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도 그렇고 트레이너도 그렇고, 아주 조금의 이상도 용납을 안 하시더라고요. 하하.”

패트릭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지혁은 딱 한 번의 대답으로 부상에 관한 모든 질문에 완벽하게 대처했다. 괜히 손톱의 상태가 어땠고, 뭘 던질 때 이랬고 저랬고, 통증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기사를 왜곡할 여지 자체를 주지 않는다. 괜한 걱정을 한 셈이었다.

“다음 등판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시겠군요?”

“물론입니다. 감독님이 다음 등판을 지시하시면, 그 때에 맞춰서 최고의 몸 상태로 만들어 놓을 겁니다.”

그 이후에는 시덥잖은 몇 개의 질문이 다였다. 깔끔하게 기자회견을 끝낸 지혁이 패트릭을 발견하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깄어요?”

“손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괜찮아요. 중지 쪽 손톱이 살짝... 자.”

확실히 약간 금이 간 정도다. 손톱이 들려 덜렁거리거나 찢어져 너덜거리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그냥 더 던져도 됐을 것 같은데요?”

“... 오늘 경기는 이미 넘어갔었잖아요. 다음 경기도 있고.”

지혁이 몸을 숙여 작게 속삭였다.

“잠깐, 다음 경기를 볼 처지...”

“여기서 말하지 말고. 다음에 따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얘기합시다.”

몸을 일으킨 지혁이 자신의 라커를 정리하는 동안 패트릭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투수에게 조금의 무리도 시키지 않는 건 감독이나 코칭스태프의 입장이다. 아니면 이미 자리가 공고한 슈퍼스타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일이고. 투수라면, 게다가 지혁처럼 메이저리그에 이제 막 올라온 투수라면? 조금이라도 마운드에 있고 싶어서 있는 부상도 숨기는 판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탬파베이 유니폼을 입고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가장 절박해야 할 투수가 스스로 교체를 요청했다라. 갑작스런 위화감에 패트릭은 인상을 썼다.

이따금씩, 문지혁이라는 선수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운드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24살밖에 되지 않은 선수가 마치 앞일을 내다보는 것 같이 생각할 때. 기자들을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다룰 때.

냄새가 났다. 특별한 냄새가. 오늘은 유독 더 진했다. 패트릭은 자신의 고객이자 동반자인 이 선수에게서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냄새를 맡았다.

*

“아니, 아무리 불러도 세이프가드가 내 말을 안 들었다니까요!”

연두는 온 몸으로 억울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피곤함이 눈 밑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구장 관리인은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 우리 신고할 거예요!”

연두의 전화를 받고 팬웨이 파크로 달려나온 티나도 옆에서 떽떽댔다. 물론 조금은 무서운지 티나의 몸 뒤에 반쯤 숨어 있었지만.

“아가씨. 증명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잃어버린 것도 없고, 다친 데도 없고, 자리에 있던 관중들은 이미 다 빠져나갔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다니까 그러네. 나 참.”

“CCTV 있을 거 아니에요! 방송국 카메라도 있고! 있는 걸 돌려보면 나오는데 그걸 왜 안 돌려줘요? 인종차별에 관중 위협이라니까요? 그리고 잃어버린 게 왜 없어요? 내 다이어리 잃어버렸다니까요?”

“CCTV는 프라이버시 문제가 걸려 있어서 중대 범죄가 아니고서는 못 돌려요. 방송국 카메라는 내 소관이 아니고. 다이어리는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잖아요. 해당 블록 쓰레기통을 다 뒤집어엎어야겠어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요? 그거 하나 찾자고 우리가 다?”

“와, 진짜...”

이런 게 외국인이 느끼는 서러움일까? 잔뜩 화가 나서 한참을 따지면서도 관리인의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맥이 탁 풀렸다.

“내가 진짜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기자 부를 거예요.”

“부르세요. 잘 됐네. 그럼 나는 좀 쉬어도 될까요? 지금 아가씨 때문에 나 포함해서 내 밑에 몇 십 명이 한 시간 동안 대기 중인데.”

“뭐라구요?”

“기자 불러서 얘기하세요. 할 말 있으면 다 해요.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린 그냥 구장 직원이고, 구장에서 술 취한 개인이 차별적인 행동을 한 것 밖에 더 되나. 뭐, 기자가 나서서 인종차별 문제로 커지고 보스턴 시장이 한 마디라도 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다시는 구장에 못 오게 할 수는 있겠네. 할 수 있겠죠? 자, 잘 해 봐요.”

연두는 알아듣지 못할 상대에게 한국어로 있는 힘껏 욕이나 퍼붓기로 결심했다.

“개새끼. 더러운 새끼. 하여튼 생긴 대로 놀아요, 생긴 건 어디 굴러다니는 똥 덩어리 같이 생겨가지고.”

태연한 표정으로 저 꼬장꼬장한 면전에다 한바탕 퍼붓고 나니 조금 후련해졌다. 한 시즌 내내 꼼꼼하게 감상평을 기록해 온 다이어리가 없어진 건 정말 눈물나게 아까웠지만, 연두로써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꺄아악!”

사람도 거의 다 빠져나간 팬웨이 파크에서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살벌하게 욕을 뱉었는데. 연두에게 누군가 한국어로 물었다.

“어...?”

“한국 분이신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문지혁 선수!”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린 것도 모른 채 지혁을 가리키던 연두의 뺨이 곧 붉어졌다. 무시무시한 쪽팔림이 온몸에 사무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 난 몰라... 미쳤어, 이연두. 너 진짜 미쳤어. 어떡해...”

“저기요?”

목덜미와 귀까지 새빨개져 가고 있는 연두에게 지혁이 한 발짝 다가섰다. 연두는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서도 한 발짝 물러났다.

“오지 마세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저 야구 선수인데. 무슨 일이지 말씀하시면 도와드릴게요.”

“아니, 아니에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떨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지혁은 시계를 한 번 내려다봤다. 구단 버스에서 스탭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정말 모처럼 한국어를(물론 정확히는 한국어로 된 욕이었지만) 들어서 발걸음을 멈췄었지만, 다시 가야 할 시간이다.

“그래요, 그럼 일 보세요.”

“잠깐만요!”

돌아서려는 지혁을 멈춰 세운 연두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사진이요?”

“저, 탬파베이 패, 팬이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그래요. 찍어요.”

지혁은 연두의 핸드폰을 받아 자연스럽게 셀카를 찍었다. 한 손으로는 새빨간 얼굴을 가리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브이자를 만들어 낸 이 여자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여기요. 잘, 풉. 잘 나왔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멋졌어요. 파이팅하세요.”

“제가 감사하죠. 하하. 그런데 무슨 일로 지금까지 여기 있는 거예요?”

“아, 그건...”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해 한참을 뻘쭘하게 있던 티나가 갑자기 연두 앞으로 나섰다.

“헬로. 영어 할 줄 알아요?”

“네.”

“잘 됐네. 얘는 제 친군데요, 관중석에서 미친놈 때문에 도망치다가...”

순식간에 쫑알거린 티나에게 전말을 들었다. 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연두의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나는 지금 가야 하지만, 일을 처리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불러줄게요. 걱정하지 말고. 알았죠?”

“안 그러셔도 되는데에요...”

“그럴 순 없죠. 메이저리그 올라와서 처음 만난 팬인데. 경기장까지 찾아와 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경기장에서 만나게 되면 인사해 드릴게요. 하하. 그럼 전 먼저.”

지혁은 그 말을 남기고 구장 바깥에 서 있는 탬파베이 레이스의 원정 버스로 달려갔다.

“미쳤어... 이건 기적이야.”

“뭐라구?”

“기적이라구.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연두는 거의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쪽팔릴 수가 없어. 하아...”

*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무키 베츠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맥기가 포효합니다. 탬파베이가 보스턴 원정에서 4연전을 스윕합니다. 2위 뉴욕 양키스와의 격차를 한 게임 반차로 줄여내는 데 성공합니다. ]

[ 기세가 놀랍습니다. 최근 10경기에서 8승 2패를 기록하네요. ]

팬웨이 파크 원정 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박살낸 탬파베이는 홈으로 돌아왔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홈 3연전.

제레미 헬릭슨이 1차전 선발로 나서서 위기에 빠졌지만 경기 후반 타자들이 역전에 성공했다. 2차전 선발로 나선 지혁은 7이닝을 소화하며 3실점으로 버텨냈고, 시즌 두 번째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3차전은 제이크 오도리찌의 8이닝 호투가 곁들여지며 시리즈를 쓸어담기에 이르렀다.

- 7연승의 탬파베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2011년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을까? 탬파베이의 후반 질주.

-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레이스, 탬파베이를 주목하라.

언론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팬들도 점점 더 많이 경기장을 찾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당연히 선수들 사이에서도 묘한 기류가 뿜어 올랐다.

매든 감독은 끊임없이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입했고, 롱고리아와 콥은 앞장서서 성적으로 선수들을 이끌었다. 압도적인 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시리즈에서 그 기세가 절정으로 달했다.

- 알렉스 콥, 7이닝 12K 무실점! 탬파베이 2 : 0 볼티모어.

- Price who? 드류 스마일리, 탬파베이 합류 이후 벌써 4승. 탬파베이 4 : 1 볼티모어.

- 웰컴 백, 크리스! 10연승을 앞장서서 이끌다. 탬파베이 4 : 3 볼티모어.

10연승. 믿어지지 않는 경기력이었다.

타선은 한 경기에서 딱 필요한 점수만큼을 냈고, 투수진은 그야말로 철통같이 지켜낸다. 탬파베이가 자랑하는 수비는 거대한 장벽을 쌓아 놓은 것처럼 단단했고, 걸핏하면 슈퍼 캐치를 선보였다. 선수들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탬파베이가 기세를 올린 동안, 다른 팀들은 평범한 성적을 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뉴욕 양키스와 승률이 같아졌고, 와일드카드 경쟁에서도 3위 시애틀 매리너스에게 한 게임차로 따라붙었다. 2위인 캔자스시티 로얄스와는 한 게임 반 차이까지.

그렇다. 탬파베이는 기적의 끝을 잡고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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