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60화 (61/204)

< 60 - 전설을 마주하여. >

양키 스타디움. 역사를 함께 하던 구 양키스타디움을 폐장하고 새로 건축한 이 구장은 어딜 가도 깨끗하고 번쩍거린다.

고풍스러운 입구,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과 기둥들은 야구장이 이렇게 고급스러워도 되나 싶을 정도의 느낌을 준다. 노을의 주황빛을 받은 양키 스타디움이 눈부시고 따뜻한 색감을 반사할 때는 이곳이 야구장인지 거대한 성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여기 진짜 좋지?”

“응.”

“완전히 어두워지면 스타디움 바깥에 금색 조명을 틀어주거든? 그때는 무슨 박물관에 온 것 같아. 그 밑에 베이브 루스랑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이 딱 박혀있고.”

“오. 그거 멋진데? 나도 이따가 한 번 봐야 되겠다.”

“여기서 던지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야. 난 그래서 좋아.”

어제 선발 등판했던 크리스 아처가 양키 스타디움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웃었다. 아처는 이곳에서 6경기 등판해 5승을 쓸어 담은, 자타공인 ‘양키스 킬러’다.

하필이면 복귀전 일정이 어제로 잡히는 바람에 볼티모어와의 경기에 나섰지만 아마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구단 버스가 경기장에 들어서기 한참 전부터 양키 스타디움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더니, 버스에서 내려서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내가 여기서 새 역사를 쓰겠다, 뭐 이런 거?”

“어. 멋지잖아.”

새로운 역사라.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꿈까지 꿔 본 적은 없었지만, 왜인지 듣기 좋은 말인 건 분명했다. 지혁은 괜히 아처의 팔을 툭 건드리며 농담을 건넸다.

“오늘 역사 한 번 써 봐?”

“네가? 크크크. 무슨 역사?”

“글쎄. 뭐가 됐든 간에.”

폭탄 머리를 들썩이며 깔깔 웃는 아처와 함께 구장 안에 들어서고 나니 팬웨이 파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개장한지 얼마 안 된 구장이라 그런지 새 것의 느낌이 물씬 나면서도 자신들의 오래된 역사는 그대로 가져 온 것 같은 유구함도 군데군데 보이고. 그리고 지혁의 마음을 가장 뛰게 만든 것도 있다.

‘저 스트라이프 유니폼.’

지혁이 메이저리그를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양키스는 꿈의 구단이었다. 악의 제국이라 불리웠고, 최정상에 있었으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구단이니까. 양키스의 선수들이 하얀 유니폼에 검은 스트라이프가 새겨진 특유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하는 장면은 30년 전 어린이 문지혁의 이상향 중 하나였다.

게다가 오늘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그 이름을 새긴 선수들이 우루루 출몰한다. 전생에서는 결코 상대해 볼 수 없었던 양키스의 전설, 아니 메이저리그의 전설. 데릭 지터나 이치로 스즈키 같은 선수들 말이다.

‘전설들 앞에서 역사를 쓴다.’

지혁의 심장이 벌써부터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파죽의 10연승을 달리고 있는 탬파베이 레이스. 1회초 공격이 시작됩니다. 오늘 뉴욕 양키스의 선발투수, 구로다 히로키. 시즌 10승 8패, 평균자책점 3.78을 기록 중입니다. ]

[ 양키스도 바짝 긴장해야 할 겁니다. 위만 바라보면서 와일드카드 레이스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탬파베이가 밑에서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왔습니다. 이제는 동률이에요. ]

[ 초구는 볼로 시작합니다. 타석에는 벤 조브리스트. ]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 지혁은 야구장 안의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마운드에 선 구로다는 일본 투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족적을 남긴 투수고, 유격수 자리에는 데릭 지터가. 우익수에는 이치로 스즈키가 서 있다. 마크 텍세이라가 1루에 있고, 상대편 벤치에는 조 지라디가 있다.

얼마 전 상대했던 보스턴은 지혁에게 낯익은 선수들이 많았다면, 지금의 뉴욕은 지혁이 상대해 본 적 없던 기억 속 선수들의 향연이다.

동영상으로만 보고, 소문으로만 듣고, 상상 속에서만 떠올렸던 상대들과의 대결. 지혁이 전생에 보냈던 시대보다 앞선 한 시대를 대표했던 아이콘들과의 대결이 눈앞에 와 있다. 신에게서 기회를 받은 이후 가장 떨리는 순간이 지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구로다가 1회 안타 두 개를 맞으며 고전하는 시간이 참 더디게 느껴졌다. 방망이를 잡은 저 선수들과 조금이라도 빨리 마운드에서 부딪히고 싶어서. 손에 쥔 야구공만 계속 돌려가며 기다렸다.

“저 친구 왜 표정이 왜 저래?”

“투수들만 아는 뭔가가 있어요.”

“흠?”

“불이 붙은 겁니다.”

힉키는 매든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왼손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야구공이 딱 싱커 그립에 알맞은 지점에 멈췄을 때, 구로다가 간신히 1회를 마무리했다. 지혁은 고개를 한 바퀴 격렬하게 돌린 뒤에 모자를 눌러쓰고 일어섰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전설과 마주할 시간이다.

*

[ 자코비 엘스버리가 첫 타석에 들어섭니다. 1회초 멋진 수비가 아니었으면 양키스는 두 점 이상을 실점했을 겁니다. ]

[ 놀라운 수비였죠. 돈값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

[ 타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시즌 현재까지 .287의 타율과 14개의 홈런, 37개의 도루를 기록중입니다. ]

지혁의 첫 상대는 FA 시장에서 초대형 계약을 맺고 뉴욕의 외야를 책임지게 된 엘스버리. 어떤 팀의 1번 타자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엘스버리는 양키스의 선봉장이다. 빠른 발로 2루타나 3루타도 손쉽게 생산해내는 첨병. 파워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신중하게. 몰리나가 앉은 스트라이크 존 경계선에 정확하게.

[ 초구! 바깥쪽 가장 먼 곳에 스트라이크가 들어갑니다. ]

[ 아주 훌륭한 로케이션이네요. 첫 공인데 경계에 정확하게 걸쳤습니다. 호세 몰리나의 프레이밍과 덧붙여진다면 저 공은 볼 판정을 받을 수가 없겠네요. ]

10연승을 달려온 팀의 상승 분위기에 개인적인 이유까지 더해져 제대로 불이 붙은 지혁의 투구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2구도 정확하게 존 모서리에 걸치는 패스트볼. 그리고 3구째, 좌타자인 엘스버리의 몸쪽으로 날아오다가 무릎 근처로 파고드는 싱커가 엘스버리의 방망이를 가볍게 이끌어냈다.

[ 공 세 개로 삼진! 출발이 아주 좋습니다, 문. 양키 스타디움에 와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

[ 지금까지 던진 공 세 개가 모두 완벽하게 제구되고 있네요. 바깥쪽 두 개 이후 몸쪽에서 떨어지는 공. 이렇게만 던지면 칠 수 있는 선수가 없습니다. ]

[ 과연 이 선수를 상대로도 저런 피칭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2번, 데릭 지터입니다. ]

장내 아나운서의 너무나도 유명한 그 멘트. 이제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멘트가 양키 스타디움에 울린다.

‘Now batting for the Yankees, No, 2. Derek Jeter. No, 2.’

(양키스의 타석에 들어섭니다, 2번 타자, 데릭 지터. 등번호 2번.)

뉴욕의 왕. 데릭 지터.

이미 아나운서가 ‘Now...’에 들어간 시점부터 양키 스타디움에 운집한 모든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며 지터를 환영한다. 아직 타석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박수를 치며 지터의 이름을 연호한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지터에게 아낌없는 성원이 쏟아진다. 한 시즌 내내 그랬고, 앞으로 남은 시즌에도 계속 그럴 것이다.

전설 속에 존재하던 데릭 지터가 특유의 느끼한 눈빛으로 타석에 들어서는데 온 몸에서 소름이 돋는다. 홈플레이트 뒤의 관중들은 전부 기립해서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다시 볼 수 없을 지터의 등을 쳐다보고 있다.

‘리스펙트합니다, 미스터 전설 씨.’

지혁은 초구를 던지기 전에 왼손으로 모자를 잡고 한 번 까닥여 줬다.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터를 상대해야 하는 악당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스트-라이크!”

한복판에 꽂히는 싱커. 지혁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을 짜냈다. 그야말로 전력투구 중의 전력투구. 93마일까지 찍힌 싱커가 격렬하게 움직이며 존을 관통했다. 똑같은 공 하나, 단순한 스트라이크 하나였지만 지혁은 자신의 온 기백을 담아 던졌다. 전설을 마주하는 방법이었다.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던지는 것.

딱!

[ 4구를 잡아당깁니다만 3루수 정면으로 향합니다. 롱고리아가 잡아 1루로. ]

[ 공에 힘이 실려 있네요. 문. 확실히 기세가 좋습니다. ]

[ 엘스버리와 지터를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이어지는 3번은 브라이언 맥캔입니다... ]

싱커만 네 개를 던졌고, 지터를 첫 타석에서 땅볼 처리했다. 묵묵히 벤치로 향하는 지터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하던 지혁은 다시 한 번 모자를 고쳐 썼다.

메이저리그에 복귀한 게 오늘처럼 신날 때가 또 없었다. 데릭 지터, 카를로스 벨트란, 그리고 이치로 스즈키라니. 상대해야 할 타자들을 보면서 설레는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설레는 마음을 투구에 담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던졌고, 훨씬 더 경기에 몰입했다. 다른 것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와일드카드 경쟁을 하고 있는 외부적인 상황도, 5선발 경쟁을 하고 있는 내부적인 상황도. 오로지 눈앞에 있는 전설들과 마주하는 것 뿐이었다.

*

[ 전 이제 이 루키가 조금 무섭습니다. 이 정도라면 나쁘지 않은, 꽤 좋은, 인상적인 같은 수식어를 넘어선 것 같지 않나요? ]

[ 어떻게 보시나요, 호르헤? ]

뉴욕 양키스의 네트워크 채널. 해설자 한 명이 진지한 목소리로 엄살을 떨자, 캐스터가 특별 초대한 호르헤 포사다에게 바톤을 넘긴다.

[ 타자들이 아직 저 루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만, 또 화면으로만 보기에는 못칠 것 같은 공은 아닌데. 양키스 선수들도 처음 만나는 거니까요. ]

[ 그렇군요. 낯선 투수이긴 하죠. ]

[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디트로이트, 토론토, 보스턴, 그리고 우리 팀까지. 타선의 무게감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은 칭찬할 수밖에 없겠네요. 포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트너로 삼기 아주 좋은 선수예요. ]

[ 어떤 측면에서 그렇죠? ]

[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전력으로 피칭하네요. ]

때마침 자막으로 정리되고 있는 내용으로 캐스터가 말문을 돌렸다.

[ 음. 생애 처음으로 양키 스타디움을 방문한 경기에서 가장 오랫동안 안타를 허용하지 않은 기록이 아웃카운트 17개를 잡을 때 까지라고 하는군요. 메츠의 드와이트 구든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오늘 탬파베이의 선발 투수인 문은 몸에 맞는 공 1개와 볼넷 2개만 허용한 채 아직까지 안타를 맞지 않고 있습니다. ]

[ 이 기록은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

[ 6회말로 들어갑니다. 아웃카운트 세 개 안에 안타를 쳐내지 못하면 기록을 내주고 맙니다. 타석에는 9번, 스즈키 이치로. ]

이치로가 방망이를 든 오른팔을 지혁을 향해 겨누고, 자신의 오른팔 옷깃을 잡아당기는 준비 동작을 취한다.

지혁은 그 장면을 감상했다. 지혁이 전생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든 아시아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선수다. 후보에 들자마자 첫 해에 바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선수.

‘첫 타석보다 조금 물러난 것 같은데?’

첫 타석의 결과는 몸에 맞는 볼이었다. 몸쪽에 싱커를 던진다는 게 힘이 많이 들어간 탓에. 아슬아슬하게 유니폼을 스친 채 출루를 허용했다. 전체적으로 오늘 좌타자의 몸쪽을 공략한 것을 의식했는지 이치로도 반 발자국 쯤 멀리 위치를 잡았다.

몰리나도 그것을 다분히 의식하고는 바깥쪽으로 멀리 빠져 앉았다. 초구는 바깥쪽에 한 개 정도 빠지는 패스트볼. 몰리나가 환상적인 프레이밍으로 마치 존 안에 걸친 것처럼 만들었지만, 심판이 고개를 저었다.

원 볼 카운트에서 잠시 동안 이치로와 눈빛을 마주쳤다. 메이저리그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역사를 쓸 때까지 늘 한결같았던 이치로의 힘있는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흰머리인지, 아니면 염색한 것인지 헷갈리는 이치로의 구레나룻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혁은 왜인지 이치로가 어떻게 타격할지 알 것 같았다. 2구째 싱커와 패스트볼 싸인을 모두 거부한 지혁은 체인지업을 선택했다.

[ 2구째를 준비하는 문. 던집니다... 번트! ]

‘그럴 것 같았어.’

지혁은 투구를 마치자마자 앞으로 뛰어나갔다. 한가운데 패스트볼처럼 날아가던 체인지업이 마지막 순간에 회전을 잃어버리고, 이치로의 번트가 생각보다 힘없는 곳에 떨어졌다. 오른손에 낀 글러브로 부드럽게 공을 들어올리고 왼발을 축으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1루에 빠르게 송구했다.

“아웃.”

마흔의 이치로는 여전히 빨랐다. 지혁의 수비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는데도 아주 간발의 차였다. 전생에 이치로의 업적을 워낙 잘 알고 있었던 탓일까. 방금 전 이치로가 기습 번트를 댈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던 게 다행이었다. 그 감을 캐치하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내야안타를 줄 뻔 했다.

[ 아주 좋은 수비를 보여주네요. 이치로의 좋은 시도였습니다만. ]

[ 정말 루키답지 않네요. 훌륭합니다. ]

[ 다시 1번으로 이어집니다. 양키스가 상위 타선으로 돌아오는 이번 회에는 뭔가 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타석엔 자코비 엘스버리. 첫 타석에서는 삼진, 두 번째 타석에서는 1루수 땅볼이었습니다. ]

전설들을 마주하는 경기. 승부 하나하나를 즐기면서, 지혁은 차근히 나아가고 있었다. 지터도 잡아내고, 벨트란도 잡아내고, 이치로도 잡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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