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61화 (62/204)

< 61 - 기적을 쓰기 직전에. >

자코비 엘스버리의 세 번째 타석. 아웃카운트 16개를 잡아내는 동안 안타를 맞지 않았던 지혁은 잠시 타임을 걸고 땀을 훔쳤다. 투구수가 90개를 넘어섰다. 손가락으로 공을 쥐는 힘도 많이 헐거워졌다.

‘이제 후반... 이놈들도 다 적응했겠지.’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웬만한 투수의 공은 한 경기 안에 적응하는 놈들이다. 어지간한 디셉션으로는 이 무대의 타자들에게서 숨을 수 없다. 토론토나 보스턴의 타자들도 그랬다.

이 선수들의 반응 속도는 세계에서 야구를 하는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나고, 그에 맞춰서 스윙을 조정하는 능력도 그렇다. 양키스의 타자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손에 쥔 공을 빙글빙글 돌리며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느 쪽이 가장 좋은 선택일까? 저번 타석에서 땅볼을 유도해 낸 바깥쪽 싱커? 아니면 허를 찔러서 높은 쪽 패스트볼? 양키 스타디움의 홈 관중들이 시끄럽게 응원하는 소리를 들으며, 지혁은 몰리나의 손가락 끝을 바라봤다.

‘여기서 슬라이더?’

아니야. 세로로 꺾어내는 공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지혁은 고개를 젓자, 몰리나가 금방 싸인을 바꾼다. 패스트볼. 힘으로 승부. 후우. 깊은 숨을 쉬며 와인드업 자세에 들어갔다.

“으랴아!”

몰리나가 패스트볼 싸인을 낸 몸쪽 낮은 코스에다 공을 쑤셔넣는다. 엘스버리가 다부지게 꽉 쥔 방망이를 힘차게 돌렸다. 낮은 쪽 공에 뒷무릎이 무너지며 스윙을 했던 첫 타석과는 완전히 다른 컴팩트하기 그지없는 스윙. 인코스의 공을 가뿐하게 잡아당긴 순간 타구가 낮은 탄도를 그리며 총알처럼 깔려나간다.

지혁의 시야를 순식간에 벗어난 공은 꼼짝없이 외야로 빠져나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익수에게 닿기 전, 공이 멈춰섰다.

[ 벤 조브리스트가 몸을 던집니다! 놀라운 반사신경입니다! 그대로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네요. 정말 모처럼 잘 맞은 타구가 나왔는데요. ]

[ 탬파베이의 수비가 도와줬네요. 방금 공은 정말 제대로 맞았어요. ]

[ 2루수 직선타로 물러나는 엘스버리. 정말 아쉬워합니다. ]

[ 빠졌으면 우중간을 그대로 갈랐을 것 같은데요. 하하. 원아웃에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둘 수 있던 기회가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으로 바뀌네요. ]

슈퍼 캐치가 또 나왔다. 수비를 강조하는 탬파베이의 컬러가 다시 한 번 반짝반짝 빛난다. 상승세인 팀의 분위기가 선수들에게 없던 힘도 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지혁은 조브리스트에게 모자를 한 번 벗어 보였다. 조브리스트는 가슴께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한번 들어 보일 뿐이다.

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마운드에 섰다. 경기 초반 여유롭던 지터의 눈에도 꽤 진지한 독기가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

[ 타석에 데릭 지터. 오늘 2타수 무안타입니다. ]

캐스터는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 아, 방금의 아웃카운트로 문지혁 선수가 드와이트 구든과 함께 타이기록을 달성하네요. 양키 스타디움 첫 등판에서 1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안타를 하나도 맞지 않은 단 두 명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

[ 단독 기록은 주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크흠. ]

[ 기록을 떠나서 안타가 꼭 필요하긴 합니다. 탬파베이와는 계속 마주쳐야 하는데, 상대전적이 안 좋은 투수가 유독 많은 편이네요. ]

크게 의미를 둘 만한 기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의 희생양이 되는 건 언제나 기분이 나쁜 일이다. 양키스의 레전드 자격으로 중계 부스에 나와 있는 호르헤 포사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타석에 선 데릭 지터가 특유의 동작으로 방망이를 흔들거린다.

[ 초구. 싱커가 낮게 떨어집니다. 볼. ]

[ 이번에는 뭔가 나올 것 같네요. ]

[ 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호르헤? ]

[ 지터의 앞발을 보면 타이밍을 잘 맞추고 있네요. 저 투수의 공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그리고 저 투수도 꽤 지쳤네요. ]

[ 그런가요? ]

[ 무브먼트가 초반에 비해서 많이 죽었어요. 아마 살짝 오버페이스를 한 게 아닐까 싶네요. ]

포사다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마운드에 선 지혁은 체력이 꽤 많이 떨어져 있었다. 전설적인 투수들과의 승부는,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점에서 즐거웠지만 또 그만큼 커다란 압박을 줬다.

타석에 들어서는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경력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고, 그 거대한 기운에 도전하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갖지 않고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 시즌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6회까지 꽉 쥐어짠 집중력을 유지했으니, 체력적으로 무리가 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따악!

지터가 바깥쪽 존에 걸치는 싱커를 결대로 밀어 때렸다. 타구는 1루 쪽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타구의 소리도, 타격의 타이밍도 기세가 바뀌고 있음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관중들도 그 낌새를 눈치 챘는지 더욱 크게 지터의 이름을 부른다.

“푸우우.”

지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운드에서 살짝 내려와 고개를 위로 젖혀 잔뜩 어두워진 뉴욕이 밤하늘을 한 번 시야에 담았다.

‘진짜 마지막이다. 지터만 딱 잡고 내려가야겠네.’

오늘이 아니면 데릭 지터를 다시 상대할 기회는 영영 없다. 42세의 데릭 지터가 아직도 저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냥 맥 빠진 공으로 어설프게 유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혁은 마음을 굳게 먹고 팔을 휘둘렀다. 볼 한 개 정도 높은 패스트볼이 몸쪽으로 파고들었고, 타이밍을 맞춘 지터도 빠른 스윙으로 응답했다.

[ 3구, 때립니다! 3루 라인 쪽! ]

스윗 스팟에 맞은 공은 아니다. 살짝 안쪽에 맞은 공. 하지만 타구의 스피드는 제법 살아 있었다. 베이스 위를 타고 흘러나갈 것 같던 공 앞에 롱고리아의 글러브가 나타났다. 롱고리아가 백핸드로 어려운 공을 건져올리는 순간 지혁은 얼른 쭈그려 앉아 롱고리아의 시야를 확보해 줬다.

[ 잡아내는 롱고리아. 그대로 길게 1루로! ]

롱고리아의 손 끝에서 떠난 송구가 1루수 로니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양 방향에서 날아드는 야구공과 달려드는 데릭 지터가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같은 순간에 1루 베이스 위에서 만났다.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1루심은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세이프!”

두 팔을 양 옆으로 쫙 벌렸다.

예에에에에쓰!

양키 스타디움이 오랫동안 참아온 홈 팬들의 함성에 휩싸였다. 고작 내야안타 하나였을 뿐인데.

지혁은 이 압도적인 함성이 스스로를 휘감는 순간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오늘의 피칭이 더할 나위 없었다는 칭찬 같이 느껴졌다. 양키스의 전설들을 상대로 1피안타로 막아냈다는 뜻이니까. 지혁은 데릭 지터가 1루에 서 있는 모습을 꽤 오래 바라봤다.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으로.

그런데 송구를 받은 1루수 로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한두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챌린지? 공이 먼저 들어갔나?’

로니가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인 3루 쪽을 보며 뭔가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보며, 혹시 챌린지를 요청하는 줄 알았다. 지혁도 3루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3루 베이스 위를 보는 순간, 오늘 경기에서 좋았던 점도, 나빴던 점도, 지터나 이치로를 상대했던 감상들도 전부 날아가버렸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에반!”

탬파베이의 거대한 기둥이 무릎을 부여잡고 드러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

[ 뉴욕 양키스의 구로다는 3.1이닝 동안 4실점하며 일찍 마운드를 내려갔습니다. 이후 지라디 감독은 무려 8명의 투수를 사용하며 반전을 노렸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반면 탬파베이 레이스의 문지혁은 6.2이닝을 1피안타로 막아내며 무실점, 시즌 3승째를 거두었습니다. 5대1로 승리를 거둔 탬파베이는 양키스를 한게임 차로 밀어내고 드디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2위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

[ 양키스의 타선이 루키 투수의 공을 공략하지 못했죠. 문의 뒤를 이어 올라온 알렉스 콜로메와 스티븐 겔츠의 공에도 손을 못 썼습니다. ]

[ 안타가 단 두 개 뿐이었어요. 하지만 양키스의 공격에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탬파베이에도 아주 안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팀 공격력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비중이 큰 선수죠. 에반 롱고리아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

스포츠 프로그램의 여성 진행자가 화면이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멘트를 이어나갔다.

[ 6회말입니다. 데릭 지터가 양키스의 첫 번째 안타를 뽑아낸 순간이었는데요. ]

[ 3루 쪽 라인을 빠져나가는 깊숙한 타구였습니다. 백핸드로 잘 따라가서 잡아냈는데, 이 공을 1루로 던지는 순간에 무릎이 돌아갔어요. 아주 어려운 수비였습니다. 골드글러브 수상자인 롱고리아가 아니었으면 던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요. ]

[ 탬파베이 레이스의 구단 주치의인 로즈베리에 따르면, 왼쪽 무릎 쪽이 살짝 뒤틀린 것 같다고 합니다. 정확한 부상 부위와 정도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 내내 허리 쪽에 고질적인 부상을 안고 있었던 롱고리아가 추가적으로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이번 시즌 안에 다시 돌아오기는 힘들 것 같다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

뉴욕의 원정 호텔에서 TV를 보던 지혁은 어두운 표정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버렸다. 경기를 끝내고, 수훈 선수 인터뷰도 마치고 나서 빠져나올 때의 양키 스타디움은 금빛 조명으로 번쩍거리고 있었지만, 탬파베이 선수들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웠다.

캡틴 롱고리아의 공백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지금처럼 시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시점에는 더욱 그렇다. 어린 선수들이 많고 그만큼 주위 환경에 휘둘리기 쉬운 선수들을 단번에 휘어잡고 또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은 탬파베이 안에서 오직 롱고리아 뿐이다.

투수조 조장 알렉스 콥이 있긴 하지만 콥은 야수들의 생각이나 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니까.

지혁은 투수들조차도 라커룸 안에서 롱고리아를 의지했던 것을 떠올렸다. 심지어는 매든 감독이나 쉘튼 타격코치도, 프리드먼 단장까지도 롱고리아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것을 계속 짊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짊어질 선수니까.

롱고리아가 빠진 타선, 롱고리아가 빠진 수비, 롱고리아가 빠진 클럽하우스. 그리고 롱고리아가 빠진 트로피카나 필드. 기적 같은 와일드카드 획득을 노리던 탬파베이호의 밑바닥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뚫고 바닷물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

“다들 잘 했다. 지금까지.”

매든의 음성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여느 때의 흥겨운 클럽 음악도,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도 없었다. 선발 데뷔전을 치러 4.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마이크 몽고메리도, 구원 등판해서 여섯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낸 알렉스 콜로메도, 만루홈런을 때려낸 케빈 키어마이어도. 물만 들이키며 쓰디쓴 입맛만 다신다.

“우리는 8월 중순까지만 해도 승률 5할을 밑돌고 있었어. 시즌 마지막으로 오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로 뭉쳤고, 여기까지 왔지. 너희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집중력을 끌어올렸던 시즌 막바지의 모습을 유지한다면.”

매든은 TV 속에서 환호하고 있는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선수들을 가리켰다.

“저 자리가 너희들의 자리가 될 거다.”

딱 한 게임 차였다. 캔자스시티는 시즌 최종전에 가서야 와일드카드를 손에 쥐었다.

탬파베이는 롱고리아가 빠진 이후에도 잇몸으로 메워냈다. 어린 선수들이 주축이 돼서 겁내지 않고 덤볐고, 10승 7패를 기록했다. 시즌 내내 롱고리아가 있는 상황에서도 5할을 밑돌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괄목할 만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대진운이 너무 좋았다. 중부지구 최하위 미네소타와 다섯 경기를 치렀고 서부지구 4위인 휴스턴과 세 경기, 서부지구 꼴찌인 텍사스와 네 경기를 치렀다. 이미 시즌을 포기한 채 유망주들을 테스트하던 팀들과의 경기를 쓸어담은 캔자스시티는 결국 29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합류했다.

“일 년 동안 다들 수고했어. 당분간 야구를 생각에서 지워버리고 푹 쉬어. 기분 좋게 다시 만나자고.”

매든은 선수들 하나하나의 어깨를 직접 잡아주며 한 시즌의 종료를 알렸다. 2014년 메이저리그, 탬파베이의 시즌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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