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대변혁의 시작. >
야구를 일찍 마무리한 9월은 아름다운 가을날이 펼쳐진 휴가의 달이기도 했고, 또 분하고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는 답답한 달이기도 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들보다 한 달 빠른 휴가를 받았음에도 탬파베이 선수들은 아무도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확장 로스터 기간 동안 메이저리그 팀에 합류했던 36명의 선수들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무리 훈련에 매진했다. 한 시즌 내내 혹사에 가깝게 다뤄왔던 몸을 천천히 끌어내리는 일들을 계속하며, 다음 시즌을 기약하는 일이다. 다음 시즌에는 조금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면서.
물론 그 동안 눈앞에서 놓쳐버린 포스트시즌에서 숱한 드라마가 쓰여지는 것을 직접 목도해야 했다.
각 지구의 1위를 차지했던 여섯 팀들을 모두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와일드카드 출신의 두 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캔자스시티 로얄스. 두 팀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선보였다.
[ 페레즈. 잡아당깁니다! 높이 떴습니다, 파울지역! 산도발... 잡아냅니다! 자이언츠가 승리합니다! ]
7차전. 3대2의 한 점 리드. 매디슨 범가너의 높은 패스트볼을 때린 타구는 하늘로 높이 치솟았고, 샌프란시스코의 ‘쿵푸 팬더’ 파블로 산도발이 파울 지역에서 공을 잡고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결국.”
카메라가 곧장 마운드 위로 넘어갔다. 마스크를 던져 버린 버스터 포지와, 장발을 휘날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쥔 매디슨 범가너가 포옹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회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하나같이 마운드로 몰려들어 서로를 얼싸안고 정상의 기쁨을 만끽한다.
[ 자이언츠! 지난 5년 동안 세 번째 우승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웅! 매디슨 범가너입니다. ]
“...”
클럽하우스 속 TV 모니터에서 세레모니를 하는 다른 팀 선수들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고역스러운 일이다. 특히 시즌 막바지에 부상으로 자리를 비워야 했던 롱고리아나, 투수진을 책임지고 이끌었던 알렉스 콥 같은 선수들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탬파베이에서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들이 저 무대에 있었으니까.
“기왕이면 로얄스가 이겼으면 했는데.”
“제임스랑 웨이드가 괜찮았으면 좋겠네. 연락이나 한 번 넣어야겠어.”
“그러게...”
캔자스시티에는 탬파베이에서 트레이드로 건너간 제임스 쉴즈와 웨이드 데이비스가 있다. 한참을 넋 나간 표정으로 난간에 기대어 있다가 자신들의 라커로 쓸쓸히 돌아가는 두 선수의 모습을 본 롱고리아와 콥도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저 자리에 가야 하는데.”
“... 됐어. 지금은 그런 소리 마.”
롱고리아는 콥의 말에서 아쉬운 기색을 읽어내고는 곧장 자제시켰다. 탬파베이는 어린 팀이다. 어린 선수들이 월드시리즈의 승부를 보며 전의를 불태우는 것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다.
“후.”
그러나 롱고리아도 씁쓸함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이 원래 그런 팀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단기간에 바짝 달려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언제나 중상위권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팀을 유지하는 데 더 힘을 쏟는 팀.
월드시리즈 우승, 그러니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모든 것을 태워내는 다른 팀들과는 관점이 다르다. 물론 이 방법으로 매 시즌마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가시권에 둘 수 있는 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한 발 더 나아가려면 특별한 동력이 필요한 법이다. 신인왕 수상자이자 골드글러브와 실버슬러거를 숱하게 탔고, 올스타에도 꼬박꼬박 도장을 찍은 롱고리아에게는 그 특별함이 매번 아쉬웠다.
“가자. 러닝이나 조금 하고 오늘은 마무리하자고.”
롱고리아는 트로피카나 필드의 워닝 트랙을 오랫동안 뛰었다. 그뿐이었다.
*
“앤드류.”
재즈 음악이 조용하게 흘러다니는 어느 구석진 바, 구석진 자리. 패트릭은 자욱한 담배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어내며 프리드먼의 옆자리에 앉았다.
“왔습니까?”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하다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요.”
“뭐.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건 애초에 없으니까. 없는 일을 완전히 만들어내는 기자들은 기자가 아니라 소설가라고 해야죠.”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끈 프리드먼이 눈앞의 데낄라 샷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이 달게 느껴지는 건 오랜만이네. 야구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마신 술에서 이 맛이 났었는데. 흐흐.”
프리드먼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감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오라고 한 건 아닐텐데.”
“당신도 한 잔 할래요? 내가 살건데.”
“난 생각 없습니다.”
하지만 이내 패트릭은 마음을 바꿨다.
“같은 걸로, 샷 하나만.”
“좋~아. 이제야 패트릭 에이버리 같네. 술자리에서도 지는 건 엄청나게 싫어해야 당신답지. 좋아.”
프리드먼은 데낄라 샷을 들고 패트릭의 것에 한 번 부딪힌 다음 목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패트릭이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훨씬 더 편해진 말투로.
“들리는 얘기로는, 당신 작품이라면서?”
“다 알고 있군?”
“내가 한 방 제대로 먹었으니까.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었지.”
“후- 맞아. 내가 데이브를 부추겼지. 내가 시애틀의 이사들을 설득했고. 그쪽은 사실 설득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 워낙에 다들 반대했던 트레이드라서.”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내가 완전히 당했지. 그 날 생각만 하면 아직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눈앞이 완전 핑핑 돌았다니까.”
프리드먼은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가 생각나는 듯 이마에 주름이 잔뜩 패일 정도로 인상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이걸로 빚은 갚은 셈 치자고.”
“...”
“안 되겠어? 이걸로는?”
“내 첫 고객이었던 스티비는 당신이 놓은 트레이드 함정 때문에 유니폼을 벗었어. 그 친구가 지금 뭐하고 사는지 아나? 내쉬빌 촌구석에서 철물점이나 하고 있어. 이제 막 서른 줄에 들어선 녀석이.”
패트릭은 가시 돋친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지. 하지만 비즈니스였어. 선택은 변하지 않았을 거야. 덕분에 맷 가르자를 데려왔고, 가르자의 유산들이 또 지금의 레이스를 만들었으니까.”
“당신이 그렇게까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스티비를 그 딜에 끼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
“흐, 흐흐. 패트릭. 당신도 그때는 꽤 감정적이었어. 지금이랑은 아주 다르지. 데리고 있는 선수를 위해 죽고 못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미 취기가 많이 오른 듯한 프리드먼이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조금 지껄였다. 패트릭은 담배 연기를 헤치고 흘러다니는 재즈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독한 데낄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데도 이상하게 멀쩡했다.
“어쨌든! 패트릭. 프라이스 트레이드에 관여해서 내 방향을 한 번 막은 걸로는 성이 안 차겠지? 그래서 하나 더 준비했어.”
“들어보지.”
“새 감독.”
“새 감독까지 정해 주고 팀을 떠날 거라고? 그럴 리가 없을텐데.”
“흐흐. 당연하지. 하지만 체임에게 힌트를 줘 놨어. 체임이라면 반드시 답을 풀어낼 거야.”
“누굴 추천했지?”
프리드먼은 깊게 한숨을 한번 내쉰 뒤 대답했다.
“... 랭카스터. 대니 랭카스터.”
“대니 랭카스터라고?”
처음으로 패트릭의 표정이 변했다. 꽤 오래 전에 야구계를 떠난 괴짜 중의 괴짜. 선수들을 향해 폭언을 내뱉고 주먹질을 했다가 쫓겨난 인물이었다.
“어째서?”
“변화할 거면 그냥 변화해서는 안 되거든. 혁명적인, 그런 변화가 필요하지. 현장에서는.”
“그게 무슨 말...”
“쉬, 패트릭! 힌트는 여기까지야. 만약 체임이 대니 랭카스터를 찾아낸다면, 이걸로 정들었던 탬파에 꽤 괜찮은 선물을 남긴 거야. 그리고 자네에게 진 마음의 빚도 대충 털어낸 거고.”
프리드먼은 기울어 가던 몸을 벌떡 일으켜 정면으로 패트릭을 쏘아봤다.
“이제부터는 제대로야.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당신을 스캇 보라스 그 양반이랑 다를 거 없이 대할테니까.”
패트릭은 프리드먼 앞에 놓인 데낄라 샷을 들어 자신의 입으로 털어 넣었다. 레몬 하나를 아그작 씹으며, 웃었다.
“좋아. 비즈니스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
첫 번째 충격적인 소식.
탬파베이의 단장이었던 앤드류 프리드먼이 LA 다저스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지금까지의 탬파베이는 온전히 프리드먼이 구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탬파베이의 구성원들에게 전해진 충격은 어느 때보다 컸다.
외적으로는 스몰마켓에서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프리드먼이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빅마켓인 다저스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두 번째 충격적인 소식.
조 매든 감독이 탬파베이에서 옵트아웃으로 풀렸고 시카고 컵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프리드먼의 이동이 프런트 오피스나 기자, 에이전트들처럼 야구 외적인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면, 매든 감독이 옮긴 것은 선수들과 코치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각자 집으로 흩어진 선수들도 하루종일 전화를 붙잡고 서로에게 연락을 해 확인할 정도의 큰 일이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패트릭의 어이없다는 듯한 물음에,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당황한다고 바뀔 일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런데.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거지?”
“그냥 이렇게 생겨먹었어요. 어차피 바뀌는 일은 없어요. 프리드먼이 떠났고, 매든 감독님도 떠났고. 그저 이게 다죠.”
“하아.”
지혁은 컴퓨터 속 기사들을 훑어 내려갔다. 에반 롱고리아도, 알렉스 콥도, 크리스 아처나 데스몬드 제닝스 같은 선수들도 한결같이 ‘우리는 괜찮다. 곧 괜찮아질 것이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 선수들이 인터뷰를 할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하나도 괜찮지 않았을 텐데.
조 매든이라는 감독이 클럽하우스에서 보여줬던 선수들을 아우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옆집에 사는 자애로운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가, 또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다가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도발하기도 했고, 베테랑과 루키를 모아 한 자리에서 포커를 치기도 했다.
탬파베이라는 팀에 몸을 담았던 거의 모든 선수들이 매든에게 의지했다.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고, 어린 선수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실력을 끌어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에 매든은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매든이 갑작스레 팀을 옮기게 되었으니, 이는 와일드카드를 놓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충격일 것이다.
“아처가 많이 슬퍼하겠는데. 걔는 거의 친할아버지처럼 따랐거든요.”
“남들 생각 말고 본인 생각이나 좀 하시죠.”
“난 뭐. 매든 감독이 좋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나랑 같이 지냈던 시간은 한 달도 채 안 돼요. 팀을 떠났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단순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매든은 당신을 좋게 봤고, 그래서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마련해 줬지만. 이제부터는 아닐 수도 있어요.”
지혁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요. 실력에 자신 있으니까.”
하지만 패트릭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새 감독이...”
잠시 머뭇거린 패트릭이 당부를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절대로. 어쨌든 새 감독으로 대니 랭카스터가 올 수도 있어요.”
“대니 랭카스터?”
낯선 이름이다. 전생에서 탬파베이의 감독이 대니 랭카스터라는 사람이었나?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긴 한데, 대니 랭카스터는 절대 아니었다.
“누구죠, 그게?”
“미친 들소. 대니 랭카스터. 모릅니까?”
“미친... 들소?”
“그 닉네임은 1999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1루 코치일 때 얻은 겁니다. 음... 이건 내 설명보다 동영상을 보는 게 낫겠네요.”
패트릭이 인터넷에서 찾은 동영상은 꽤 낯익은 것이었다. 1루 베이스 위에서 1루수와 타자 주자가 신경전을 벌이고, 1루수가 주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거칠게 툭 밀어버린 순간.
1루 베이스 옆에 떨어진 코치 박스를 벗어난 거대한 체구의 흑인이 1루수에게 달려든다. 프로레슬링에서나 나올 법한 스피어를 1루수에게 박아 넣고, 순식간에 벤치 클리어링으로 번졌다. 카메라는 지독하게 그 난장판의 주인공을 쫓았다. 헬멧을 내동댕이치고, 엄청난 덩치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포효하는 남자.
그 남자의 등판에 정확하게 쓰여 있다. Lancaster.
“이 사람이...”
“네. 미친 들소. 어쩌면 내년부터 당신의 감독일지도 모르는 사람.”
와우. 이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였다.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려놨던 로드맵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포효하는 저 들소가... 새 감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