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63화 (64/204)

< 63 - 대변혁의 시작(2). >

11월.

지혁은 거의 1년만에 야구공을 놓고 모처럼 푹 쉬었다.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구단이 마련해 준 집에서 할 일 없이 빈둥댔다. 간단히 러닝을 하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 외에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지혁처럼 빈둥거리고 있는 선수들 몇 명을 데리고 데이토나로 가 티미의 가게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짝 불편할 정도의 이런 꿀맛 같은 휴가는 반 정도는 지혁의 의사였고, 반 정도는 패트릭의 강요에 가까운 협박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구단 주치의인 닥터 로즈베리도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지혁의 상태를 체크했다. 이제는 마이너리그에서 아등바등 구르고, 겨울에도 도미니카나 푸에르토리코에서 야구를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내년에도 25인 로스터 안에 들어서 메이저리그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지혁을 꽤 마음에 들어 했던 프리드먼과 매든이 동시에 빠져나간 시점에서는 더더욱. 자신의 상황과 실력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구단은 그런 측면에서는 지혁에게 확실한 도움이 되는 구단이다.

“이건 또 뭐냐...wRAA... 아. 괜히 받았다, 진짜로.”

세이버매트릭스의 여러 지표들이 담긴 자료를 요청해서 받기는 받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빽빽한 도표에 숫자들만 가득한 것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들도 몇 개 있다. 스트라이크 존에 그림처럼 그려진 지혁의 투구 탄착점 그래프 같은 것들.

전체적인 공들이 낮은 쪽에 운집해 있다.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들쭉날쭉하지만, 패스트볼과 싱커만큼은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 근처에 몰려 있다. 좌타자를 상대로는 몸쪽 낮은 공, 우타자를 상대로는 바깥쪽 낮은 공.

“이건 참, 볼 때마다 괜찮아요. 그렇죠?”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한 쪽 구석에 잘 박아놨는데 단순히 나쁘지 않은 거라고요?”

지혁은 패트릭의 냉정한 평가에 되물었다. 패트릭은 지혁에게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그래프 자료를 빼앗아갔다.

“통계쟁이들이 이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죠?”

“어... 네.”

“오른쪽 위에 숫자들 보여요?”

“으, 또 숫자.”

“Pitchf/x. 그냥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면 피치밸류입니다.”

“싱커가 제일 높네요. 높은 거 맞죠?”

“네. 싱커가 패스트볼보다 훨씬 높고, 패스트볼이 다른 변화구들보다 훨씬 높죠.”

흐음. 당연한 일이지. 이 싱커는 신에게서 받은 싱커니까. 지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싱커가 당신의 가장 훌륭한 무기라는 사실은, 이제 모든 구단의 모든 선수들이 다 알아요. 다음 시즌부터 당신을 상대하러 나오는 타자들은 싱커만 보고 있을 거라는 말이죠.”

패트릭이 산통을 깬다. 하지만 날카로운 지적이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이 공을 던지겠다고 미리 얘기해주고 치게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230마일짜리 패스트볼도 공 다섯 개 안에 쳐낼 수 있을 걸요.”

“230마일은 너무 나간 것 같은데...”

“210마일이 나오는 피칭머신을 맞춰 놓고 때리는 선수들 영상 보여줄까요? 메이저리거들도 아니고 더블 A 녀석들인데. 얘들이 홈런을 몇 개 날렸는지 나랑 내기하겠습니까?”

“아뇨. 됐습니다.”

저렇게 나오는 패트릭은 한 마디라도, 절대 져줄 사람이 아니다. 그걸 알고 있는 지혁은 그냥 물러섰다.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어요. 당신도. 세이버매트릭스는 많은 걸 얘기해줍니다.”

“안 그래도 그래서 받아온 거잖아요. 저 지긋지긋한 숫자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좀 구해볼까요?”

“공부를?”

“네.”

지혁은 탬파베이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하는 수많은 너드들을 떠올렸다. 체임 블룸도, 심지어 앤드류 프리드먼까지도 그런 기질이 조금 있었지.

“나랑은 잘 안 맞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필요하긴 해요. 나도 어차피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으...”

지혁의 겨울 휴가 기간은, 아무래도 숫자와의 싸움이 될 모양이었다.

*

지혁이 개인적으로 세이버매트릭스 공부에 열중하는 동안, 탬파베이 레이스는 대대적인 변혁을 맞이했다. 일단 부사장이었던 맷 실버맨이 사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사장과 단장을 겸임하던 프리드먼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의 비공식적인 후계자나 다름없던 체임 블룸이 실버맨을 보좌하기 시작했다.

체임 블룸을 남겨두고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프리드먼은 그의 사람들을 대부분 레이스에 남겨 두었다. 그를 따라 다저스로 이동한 것은 개인 비서인 케이트 뿐이었으니까. 프리드먼의 사람들이었고, 또 세이버매트릭스에 열중했던 사람들이 모두 남았다.

대신 현장에서는 대대적인 이탈이 있었다. 벤치 코치였던 데이브 마르티네스가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1루 코치와 3루 코치도, 타격 코치였던 쉘튼도 팀을 떠났다.

누가 감독으로 선임되든 투수코치인 힉키를 제외한 코치진 전체를 수혈해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팀을 나간 코치들은 모두 매든 감독을 중심으로 한 가족 같은 분위기에 크게 일조하던 사람들이었다.

[ 탬파베이 레이스 프런트가 1차 감독 후보들을 언급했습니다. 더램 불스의 감독인 찰리 몬토요,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 감독인 돈 와카마쓰, 밀워키 브루어스의 특별 고문이었던 크레익 카운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워싱턴 내셔널스의 전 감독인 매니 액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탬파베이는 이 후보들과 전화 및 서면 인터뷰를 1차적으로 진행한 후... ]

회의실에 울리는 라디오를 신경질적으로 꺼 버린 체임 블룸이 단호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매니 액타만큼은 안 돼요.”

“체임. 그래도 액타만큼 열정적으로 구직에 나선 사람이 없어.”

“액타는 완전히 고집불통이에요. 상황이 안 풀릴 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떨어지고요. 장담하는데, 우리 팀하고 가장 안 맞는 유형의 감독일걸요.”

체임 블룸은 꺼끌거리는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바로 받아쳤다.

“체임. 자네는 대니 랭카스터를 말했잖아. 랭카스터가 액타에 비해서 덜 고집불통이라고? 대체 어느 누가 그런 소리를 해?”

“그건 오해라니까요. 내가 직접 대니를 만나봤어요. 독불장군이니, 과격하고 폭력적인 성격이라느니, 이런 건 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확실해요.”

“하지만 그가 선수를 때린 건 변하지 않아. 랭카스터는 선수 폭행범이야, 체임.”

“그가 현장에 있을 때 만들어낸 벤치 클리어링만 해도 어마어마했지.”

이 회의실 안에서 대니 랭카스터를 차기 감독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오직 체임 블룸 한 명 뿐이다. 사실 앤드류 프리드먼이 그를 추천했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여러 모로 그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사람들 모두가 프리드먼의 사람이나 다름없으니까. 프리드먼이 추천했다고 하면 지금의 부정적인 분위기는 한풀 꺾일 것이다.

‘Fuck. 이 사람들도 설득을 못하는데 팬들이나 선수들한테는 또 어떻게 말해야 해?’

블룸은 애꿎은 뒷머리만 쥐어뜯었다. 프리드먼의 밑에서 마이너리그 팀장이나 할 때에는 이럴 일이 없었는데. 중요한 결정을 프리드먼 대신 내려야 할 위치에 올라오자, 자리의 무게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 자리에 올라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벌써부터 탈모가 오지는 않을까 걱정될 수준이었다.

그렇게 별다른 진전 없이, 해가 지고 달이 넘어갈 때까지도 감독을 찾기 위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체임 블룸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11월이 지나가는 동안 패트릭이 무척 바빠졌다. 에이전트들에게 가장 바쁜 기간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건 좀 심했다. 그 잘생겼던 얼굴에 다크서클이 한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이 모양 이 꼴로 다녀요?”

“그럴 일이 있어요.”

밤을 꼴딱 샌 게 분명하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도 지혁에게 서류 뭉텅이를 한아름 건넨다.

“이건 또 뭔데요?”

“지금 탬파베이가 추진하고 있는 트레이드. 몇 개는 거의 확정 직전이고, 또 몇 개는 조금 두고 봐야겠지만 확정이 될 만한 것들. 잘 봐요. 아, 호세 몰리나는 방출입니다.”

“몰리나가?”

“당신 파트너도 바뀔 겁니다.”

“혹시...”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페르난도 멘데스가 옵니까?”

“몰라요.”

“아~ 나한테까지 왜 이래요. 당신이 이 바닥에서 모르는 게 있다고? 난 그런 꼴을 본 적이 없는데요.”

“정말 몰라요.”

패트릭은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

“으아... 죽겠다. 멘데스는 계약 조건이나 이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멘데스한테 들어오는 계약 조건도 돈은 비슷비슷하고.”

“그럼?”

“본인이 뛰고 싶어하는 데서 뛰겠다네요. 마음 가는 데서 뛰고 싶다고. 어느 팀이 유리하고, 어느 팀이 우승에 가깝고. 이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가 재밌게 야구를 할 수 있는 팀에 가고 싶다는 말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얘가 어디를 고를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면서도, 또 미칠 것 같기도 하다. 메이저리그 포수의 역사를 새로 쓰는 선수다. 페르난도 멘데스와 배터리를 맞출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칠 정도로 환상적인 일이다.

“꼭 우리 팀으로 데려와요.”

“프리드먼도 없는 마당에, 나는 꼭 탬파베이로 데려와야 할 이유가 없어요. 최대한 돈을 많이 주는 쪽으로 선택하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많이 떨어지는데.”

“나는 멘데스랑 같이 뛰고 싶은데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멘데스가 계약하는 데에는 멘데스의 뜻만 중요해요.”

“냉정하긴...”

지혁은 거의 기절하듯 늘어져 버린 패트릭을 바라보며 패트릭이 준 서류를 한 번 훑었다.

제레미 헬릭슨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간다. 애리조나에서 유망주 두 명을 받는 대신이다. 탬파베이는 헬릭슨을 잡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헬릭슨의 에이전트에 표시된 이름을 보면 납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캇 보라스의 선수니까.

불펜 투수이자 클럽하우스의 큰 형 노릇을 톡톡히 하던 조엘 페랄타가 LA 다저스로 간다. 데려오는 선수가 100마일을 밥 먹듯이 던지는 불펜 투수 도밍게스란다. 이건 좀...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력을 보니 평생을 불펜에서만 던지던 선수다.

외야수 맷 조이스와 데이빗 데헤수스도 트레이드 조율 중이다. 매우 높은 확률로 트레이드가 될 것이라고 한다. 흠...

그리고.

벤 조브리스트. 윌 마이어스. 팀 내 타선의 코어 역할을 해 주던 선수들. 이 선수들도 트레이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조브리스트가 컵스에서 우승했던 게... 2016년인가? 지금 옮기는 건가?’

지혁은 열심히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프리드먼이 떠난 이후 탬파베이는 분명히 좋지 않았다. 특히 타선은 한동안 답도 안 나오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시장가가 높은 선수들을 팔고, 그걸로 잠재력이 큰 유망주들을 사오는 정책.

“이대로는 다음 시즌도 엉망이겠는데.”

지혁은 씁쓸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

12월 1일. 2014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었다.

한 달 정도가 흘렀지만 탬파베이의 감독은 여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몇몇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몇몇 유망주들이 팀에 합류했다. 패트릭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만 자면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정보를 미리 가져다주었고, 대부분이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어쨌든 다음 시즌 선발진에는 거의 변화가 없을 것 같네요. 콥, 아처, 스마일리, 오도리찌. 그리고 한 자리.”

“나죠?”

“미정이라고 합시다. 콜로메나 몽고메리도 여전히 쓸 만하니까. 게다가 누구를 트레이드 해 올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 성적이면 걔네한테 밀릴 건 없죠. 더구나 난 메이저리그 성적인데.”

지혁은 당당하게 MLB.com을 켜고 자신의 성적을 가리켰다. 7경기 중 6경기 선발 등판. 3승 1패. 평균자책점 2.53. 시즌 막바지로 갈수록 확장 로스터로 올라온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꽤 상대하긴 했지만, 수치만 놓고 보면 상당히 인상적인 기록이다.

“샘플 사이즈...”

“가 너무 작다고 하려고 했죠? 그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내가 한 발 앞서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겠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 앉겠네.”

“흠, 흠. 근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안 오지?”

패트릭이 화제를 돌리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5분 전에 거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첫 약속부터 지각이라...”

“자르면 되죠.”

“이 사람만큼 조건이 맞는 구직자가 없었습니다. 좀 아깝긴 한데.”

“굳이 새로운 사람을 구했어야 하는 겁니까? 구단에서 직원 한두 명 붙잡고 조금 배우면 될 것 같은데.”

“세이버매트릭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한참 공부해야 해요. 직원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

“쳇. 그냥 사무실에 직원 구하는 거면서 생색은...”

패트릭은 자신의 에이전시 사무실을 하나 차렸다. 명색이 메이저리거 한 명과 페르난도 멘데스를 데리고 있는 에이전트가 사무실 하나 없이 일하는 건 조금 없어 보이니까. 오늘은 그 사무실의 직원 중 한 명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 직원은 지혁을 포함해서 패트릭이 계약할 다른 선수들에게 세이버매트릭스를 가르치고, 그 통계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선수들과 공감해서 미래를 찾아내는 역할을 할 거란다.

“아, 저기 왔네.”

커피를 마시던 패트릭이 문을 열고 허겁지겁 들어오는 사람을 가리켰다. 주위를 둘러보며 패트릭을 찾던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걸음을 조금씩 멈췄다.

“어?”

지혁은 당황했다. 팬웨이 파크에서 만났던 욕쟁이 한국인. 그녀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거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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