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64화 (65/204)

< 64 - 뉴 레이스. >

“앉아요.”

“왜 이 분이 여기 있으신 거...죠...?”

“내 선수입니다.”

연두는 지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패트릭의 앞에 앉았다.

“커피는 제가 사죠. 차가운 걸로 괜찮습니까?”

“네. 아무거나 괜찮아요.”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그 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패트릭이 커피를 주문하러 간 사이에 지혁이 말을 걸었다.

“그 날은 잘 해결했나요?”

“아, 네에... 정말 감사했어요. 관리인한테 사과도 받았고, 탬파베이 쪽 직원 분께서 힘을 써 주셔서 입장권도 몇 장 받았어요.”

“다행이네요. 하하. 계속 신경 쓰였었거든요.”

“어휴, 저 때문에 그러시면 안 되는데...”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긴 했지만, 지혁은 이 묘한 인연의 면접자를 최대한 풀어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패트릭의 구인 공고에 지원한 거 확실해요?”

“네.”

“야구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일로 할 정도로...?”

연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가지고 온 자료를 꺼냈다.

“이게 다 뭐죠?”

“아, 그겁니까?”

어느 새 다가온 패트릭이 지혁이 보려던 자료를 냉큼 집어갔다. 그리고는 자료를 넘겨보며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연두는 마치 숙제 검사를 맡는 아이처럼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고, 봐도 모르는 지혁은 그냥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 숨막히게 어색한 공기가 흘러다녔다.

“이연두 씨. 이름 맞나요?”

“네.”

“나이는 스물 넷. 맞죠?”

“네.”

“한국, 서울 출신이고. 노스이스턴 대학교에서 비즈니스랑 수학을 전공했네요. 맞나요?”

“네.”

“그리고 우리는 구면이고.”

“그... 네. 그렇죠.”

패트릭이 연두가 만들어 온 자료를 탁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케이. 왜 야구 쪽 일에 지원했죠? 전공은 수학인데.”

순간 연두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패트릭은 단번에 알아챘다.

“야구를 많이 좋아해요. 대학교에서 수학을 배우면서 이 전공을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1학년 때 세이버매트릭스라는 걸 알게 됐고, 야구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빠져버렸죠. 저는 이 일이 재미있어요.”

“재미있다와 잘 할 수 있다는 다른 의미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재밌어해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닌가요? 물론 에이전시에서 인턴을 구할 때는 시키는 일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를 보는 거겠죠? 제가 만들어 온 포트폴리오, 저는 자신 있어요.”

와우.

지혁은 내심 깜짝 놀라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부끄러워하는 모양새와 모기 같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똑부러진 대학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패트릭은 눈썹을 까닥거리고는 자료를 가리켰다.

“좋습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좀 들어보죠.”

연두는 첫 번째 장부터 자신이 분석해 온 내용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문용어들이 등장하고 숫자들이 날아다녔다. 그래프 몇 장이 순식간에 넘어가고 선수들의 도표가 한 번 쌕 지나가더니, 심지어는 투수들의 어깨와 팔 동작을 비교한 자료까지 나왔다. 분명하게 알아들은 것은 없지만, 아마 전체적인 내용으로 봤을 때 탬파베이 레이스의 프런트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를 유추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합격이네. 무조건.’

패트릭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바뀐 것을 지혁은 눈치챘다. 저 표정은 패트릭이 매우 기분이 좋지만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얘는 대체 뭐하는 여자애야?’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는 연두의 표정에서는 처음의 그 부끄러워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잔뜩 신이 난 여자 친구가 여행 계획을 짜는 것처럼 잔뜩 들떠 있다.

그런 표정으로 탬파베이의 단장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감독 후보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또 투수들은 이렇게저렇게 운용할 것이다, 하는 말을 하고 있다. 지혁은 평생을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

윈터 미팅이 다 지나갔다. 그리고 탬파베이의 실버맨 사장은 윌 마이어스를 트레이드하는 초강수를 뒀다. 몇몇 기자들은 ‘탬파베이가 윌 마이어스를 판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라며 대놓고 조롱하곤 했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엿이라도 먹이려는 듯 실버맨은 결정을 내렸다. 그것도 아주 초대형 트레이드로.

윌 마이어스 + 라이언 해니건 <- 스티븐 수자 주니어, 르네 리베라, 버치 스미스, 릭 바우어, 트레비스 오트, 호세 카스티요, 제럴드 레이예스.

제임스 쉴즈의 대가로 캔자스시티에서 넘어왔던 마이어스는 팀 내 최고의 타자 유망주였다.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가치도 증명했다. 그런 마이어스를 트레이드 시킨다는 것은 실버맨이 당장 눈앞의 성적보다는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 우리는 더 젊고, 운동능력이 좋은 팀을 만들려고 합니다.

“저 인터뷰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왜?”

“정확하게 말하면 거짓말은 아닌데, 반만 맞는 말이야. 젊고 운동능력이 좋아진 건 맞아. 그런데 그런 팀을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  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너는 왜 자꾸 패트릭을 닮아가냐? 말을 직접적으로 딱 해주면 얼마나 좋아?”

“하아암.”

연두는 지혁을 앞에 두고서도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을 했다. 누가 보면 푹 젖은 빨래를 널어놓은 줄 알 모양새다. 책상에 축 늘어진 연두의 옆에는 컴퓨터 본체만큼 쌓여 있는 서류 무더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너, 아주 편해졌다?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못하더니.”

“응. 매일 보니까. 그리고 그 때는 난 그냥 팬이었잖아. 지금은 직원이고. 또 친구고.”  실수였다. 연두가 패트릭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된 날, ‘90년생이에요? 그럼 친구네?’라고 한 번 말했던 게. 처음에는 낯을 꽤 가리는 것처럼 보이던 연두는 일주일 쯤 지나자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세상 편한 친구처럼 굴었다.

“그나저나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실버맨 단장이 지금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뭘까?”

“글...쎄?”

“프리드먼의 흔적을 지우는 거야. 새로운 팀으로 거듭나는 거지. 그냥 프리드먼의 스타일로 계속 끌고 가다가는 아무런 임팩트를 못 남기잖아. 실버맨은 그냥... 음, 바지사장 같아 보이잖아.”  연두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으며 말했다.

“데이브 마르티네스 코치, 쉘튼 코치, 제레미 헬릭슨, 조엘 페랄타, 호세 몰리나... 지금까지 실버맨 단장이 내보낸 사람들이야. 뭐가 느껴져?”

“흠... 아무것도?”

“멍청아. 가족 같이 하하호호 해주던 사람들이 다 나갔잖아. 큰 형처럼 라커룸 분위기를 만들어주던 선수들도, 수줍어하는 성격인 헬릭슨도.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겠다는 뜻이라고.”

“야. 넌 그냥 팬이었다면서, 우리 팀 라커룸 분위기는 어떻게 아는데?”

“패트릭이 말해 줬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인터뷰나 기사만 잘 읽어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거든.”  팀을 바꾼다. 프리드먼의 흔적을 지워낸다. 실버맨의 목표가 그거란 말이지?

“그럼, 투수들은?”

“투수들 뭐?”

“투수들 중에도 프리드먼이 아끼던 사람들이 있잖아.”

“나도 모르지. 실버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아?”

“뭐야. 지금까지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얘기하더니.”

“저 친구는 아직 인턴입니다, 문.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패트릭이 멋드러진 수트를 풀어헤치며 사무실로 들어오며 대답을 낚아챘다.

“이번 윈터 미팅에서는 건질 게 하나도 없었어.”

사무실 중앙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패트릭이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휙 풀어냈다.

“저 친구가 말했던 계획은 대부분 사실입니다.”

“팀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것 말입니까?”

“네. 애초에 트레이드가 예상됐던 션 로드리게스는 팀에 남았어요. 반면에 윌 마이어스는 보냈습니다. 파이터형 선수들은 팀에 남기고, 상대적으로 조용조용한 선수들은 보내는 거죠. 팀의 분위기를 보다 익사이팅하고 적극적인 쪽으로 바꾸려는 겁니다. 만약 그 중심에 랭카스터를 감독으로 둔다? 그러면 분위기는 확실해지겠죠.”

“아-하.”

지혁은 대충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난 시즌의 탬파베이는 조금 무른 감이 있었다. 리더 역할을 하는 롱고리아나 콥도 강하게 얘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매든 감독을 위시로 한 코칭스탭들도 그랬다.

덕분에 어린 선수들이 편한 마음으로 플레이하긴 했지만, 긴장이 풀어지거나 경기력이 떨어졌을 때 반등할 계기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버맨의 전략은 확실해요. 저 친구도 면접 볼 때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지금부터의 탬파베이는 기존의 탬파베이와는 다를 겁니다. 연두. 그때 뭐라고 표현했지?”

“레이스 3.0...이요.”

피식. 패트릭이 다시 들어도 웃기다는 듯 웃고는 말했다.

“작명 센스는 좀 웃기지만, 어쨌든 저건 맞는 말입니다. 프리드먼의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왔습니다. 당연히 새 팀으로 거듭나겠죠. 잘 적응해야 합니다. 할 수 있겠죠?”

“뭐, 당연한 말을.”

적응이라면야, 뭐. 전생에 몇 팀을 떠돌았는데. 오르락내리락 했던 마이너리그 팀들까지 다 합치면 거의 스무 개에 가까운 구단을 돌아다녔다. 아마 볼 수 있는 라커룸 풍경은 다 봤을 것이다. 지혁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연두한테 설명은 들었습니까? 당신의 피치밸류와 타자별 피칭 전략에 대해서 정리한 자료를 줬는데. 연두?”

“아, 그게...”

“아직입니까?”

연두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럴 땐 또 전형적인 인턴사원 같단 말이지.

“내가 오늘 스트레칭을 좀 오래 하느라 늦었거든요. 허리가 살짝 결려서. 내가 늦게 왔으니 쟤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겠죠. 자. 시작합시다.”

지혁은 연두의 손목을 잡고 따로 마련된 회의실로 이끌었다.

“내 덕분에 산 줄 알아. 저 사람 뒤끝 어마어마하니까.”

생색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

[  ‘No 프리드먼, No 매든’. 탬파베이는 어디로? ]

- 탬파베이는 겨우내 많은 선수를 트레이드했다. 특히 야수들은 핵심적인 몇몇 선수들만 제외하고 완전히 뒤바뀌는 그림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대형 유망주 윌 마이어스의 삼각 트레이드. 마이어스를 샌디에이고로 보내고 수비형 포수 르네 리베라, 외야 유망주 스티븐 수자 주니어를 받아왔다.

또 하나의 외야수 맷 조이스는 LA 에인절스로 보냈다. 유격수 유넬 에스코바는 워싱턴 내셔널스로 내보냈다. 그리고 모두가 충격적이라고 여겼던 벤 조브리스트 트레이드가 있다. 롱고리아와 함께 탬파베이를 대표하는 선수였던 조브리스트는 시장에 나온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선수였고, 결국 오클랜드가 그를 낚아챘다.

하지만 레이스의 공격력은 작년 시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격수 자리에는 아스드루발 카브레라를 영입했고, 지명타자인 존 제이소가 조브리스트의 반대급부로 들어왔으니까. 조브리스트가 조금 아쉽겠지만, 닉 프랭클린이나 로건 포사이드 같은 준비된 선수들이 대체할 것이다.

탬파베이의 문제는, 이 트레이드에 감독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감독이 공석이라는 것이다. 11월부터 감독을 구하기 시작한 탬파베이는 아직도 난항을 겪고 있다. 감독 후보에 올랐었던 많은 사람들이 면접을 마친 상황이지만 탬파베이의 프런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대체 왜일까?

... (중략)

*

“정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어? 체임?”

“네.”

맷 실버맨조차도, 체임 블룸이 왜 이렇게까지 대니 랭카스터에 집착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체임 블룸에게도 권위가 필요하다. 프리드먼의 밑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단장 보좌에 오른 이상 특별한 권위를 챙겨줘야만 한다. 그래야 다른 구단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니까.

“사장님. 랭카스터를 감독에 앉히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1~2년 정도는 성적은 포기해야 하잖아요. 선수들이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 기간 동안에 랭카스터가 팀의 체질을 바꿔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크흠.”

체임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말을 너무 빨리 한 탓이다.

“중계권 계약도 갱신해야 하구요. 랭카스터 같은 이슈메이커가 감독이 되면 분명 미디어의 주목이 쏠릴 겁니다. 비록 소문이 안 좋게 나서, 나쁜 쪽이기는 하지만, 티켓 파워는 있는 사람이에요. 랭카스터가 감독이 되고 나면 사람들은 그가 또다시 스피어를 박아 넣지는 않을까 궁금해서라도 TV를 더 보게 되지 않을까요? 뭔가 흥행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랭카스터가 이끄는 팀이 만약 성적이라도 좋다? 작년 말처럼 11연승을 한다? 그럼 완전 폭발하는 거죠!”

블룸은 프리드먼이 대체 왜 랭카스터를 추천했는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대답을 지금 실버맨 앞에서 쏟아내고 있었다.

“... 지금 내가 말이지. 엄청나게 잘못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실버맨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 기분이 허튼 것이었다면 좋겠네, 체임.”

“그럼...”

“그를 데려와.”

마침내 결정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제부터가 진짜 새로운 시작이 될 거예요. 진짜 뉴 레이스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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