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65화 (66/204)

< 65 - 레드 오션과 블루 오션. >

어수선했던 탬파베이 레이스도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새로운 감독도 선임했고, 수많은 선수들이 나가고 들어왔다. 프리드먼의 팀에서 벗어나겠다는 움직임이 발빠르게 진행되었고, 이제는 서서히 안정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물론 그건 내부적인 평가였지만.

‘미친 들소’가 10년간의 야인 생활을 벗어나 탬파베이 레이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것은 많은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덕분에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슈는 충분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슈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아주 일부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팀이 될 것 같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게 2월에 들어섰다. 이제 곧 스프링캠프가 시작될 것이다.

지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러닝머신 위에서 한참을 달리고, 스트레칭과 간단한 근력 운동을 한 뒤 비디오를 봤다. 작년 시즌 팀에 합류한 드류 스마일리의 것이 반 정도 되고, 나머지 반은 LA 다저스의 클레이튼 커쇼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의 클리프 리, 그리고 사이영 상을 받았던 해의 데이비드 프라이스의 것이다.

연두와 패트릭이 엄청나게 쌓아놓은 자료들이다. 1월 말 즈음부터 연두와 패트릭은 확실하게 일을 분담했다. 패트릭은 페르난도 멘데스를 포함해 추가적으로 계약한 여러 선수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구단으로 자주 드나들었고, 연두는 내부적으로 선수들과의 미팅이 필요한 작업을 처리했다.

그 중에서도 지혁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세이버매트릭스와 함께.

“이거 봐. 클리프 리가 방금 벨트레를 상대한 타석. 존 높은 데다가 그냥 던지잖아.”

“커쇼가 낮게 던진다는 건 착각이야. 오히려 존 높은 쪽을 정말 잘 공략하는 투수야.”

“작년에 스마일리가 탬파베이에 와서 정말 좋은 성적을 냈던 이유. 높은 패스트볼.”

그냥 조용히 비디오만 보면 좋을텐데. 연두는 테이블에 놓아 둔 투구 차트를 하나하나 짚으며 일일이 쫑알거린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 공에 대한 타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마이너리그 타자들도 마찬가지야. 코치들이 다 낮은 쪽 공을 치는 스윙을 가르치니까. 그러니까 포인트는 존 높은 쪽에 얼마나 잘 넣을 수 있느냐 하는...

야, 문지혁. 너 듣고 있어?”

“어. 귀에 딱지 앉겠다. 한 달 내내 들었어.”

하이 패스트볼. 지혁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높은 공의 시대가 도래한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투수들은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을 공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타자들은 빠르고 간결한 레벨 스윙을 선호했고, 그런 스윙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낮은 쪽을 공략하면 레벨 스윙으로는 공을 멀리 보내지 못한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낮은 공으로 땅볼을 유도했고, 그게 정석이 되었다.

그 기간이 오래 되자 타자들이 서서히 적응해갔다. 타석에 들어서면 무릎 근처로 오는 낮은 쪽 공에 영점을 맞춰놓기 시작한 것이다. 떨어지는 공을 강하고 빠르게 퍼올리는 어퍼 스윙으로 전환하는 타자들이 많아졌다. 지금, 그러니까 2015년은 낮은 공 투수들에게 타자들이 거의 다 적응을 끝낸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의 블루 오션이 바로 높은 쪽 빠른 공.

타자들 대부분이 낮은 공을 의식하고 있을 때 허를 찌르는 것. 물론 제대로 공이 맞으면 꼼짝없이 장타가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지만, 의도적으로 존의 높은 쪽을 노리는 것은 충분한 시도 가치가 있는 전략이다.

세이버매트릭스에 나타나는 피치밸류와 코스 별 타격 지표도 그것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탬파베이 레이스 같이 친 세이버매트릭스적인 구단은 이 자료를 놓치지 않았고, 드류 스마일리나 제이크 오도리찌, 제레미 헬릭슨 같은 선수들이 이 코스를 아주 영리하게 이용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해. 나 같은 투수에게는 말이야.”

지혁은 중얼거렸다.

“높은 공을 타자들이 잘 못 친다니까? 이건 도전이야, 지혁아.”

“아니야. 위험 부담이 너무 큰 도전이야. 실패할 거라고. 나는 알아.”

연두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운드에 올라가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 지혁처럼 ‘높은 공의 시대’를 몸으로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더더욱.

공 하나를 잘못 던졌을 뿐인데 그게 홈런이 된다. 아니, 잘 던졌다고 생각한 공도 홈런이 된다. 스트라이크 높은 존으로 들어가는 공은 타자들이 가장 편하고 이상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스윙과 딱 맞는 궤적을 그린다. 파워 승부가 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공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투수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공이 무식하게 빠르고 단단하거나, 혹은... 커브를 잘 던지거나. 스트라이크 존 높은 쪽을 노리는 패스트볼처럼 출발했던 공이 밑으로 떨어지게 되면 타자들은 타이밍을 맞출 수가 없다. 높은 공을 잘 던지면서 성적을 잘 내는 투수들의 공통점이 있다.

빠르고 무거운 패스트볼, 그리고 훌륭한 낙폭을 가진 커브.

“답답하네, 진짜. 왜 이렇게 무서워 해? 네 공은 충분히 좋은 것 같은데! 패스트볼 피치밸류도 좋고, 얼마 안 던지긴 했지만 높은 공 성적도 좋잖아.”

“너는 타석에 안 서 봐서 몰라. 그리고 마운드에 안 올라가 봐서 몰라.”

지혁은 스마일리의 피칭을 돌려 보면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내가 세이버매트릭스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야. 통계만 보면 뭐가 나올 것 같지? 야구는 수학이 아니야. 높은 존에 패스트볼을 100개 던져서 홈런 1개를 맞았다고 해도, 그 1개 때문에 투수는 자신감이 떨어져. 그 1개만 머릿속에 남는단 말이야. 어휴, 이연두. 너 듣고 있냐?”

속이 상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연두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패트릭의 에이전시에 들어와서 지혁의 새로운 투구 패턴을 개발하는 것은 연두에게는 처음으로 주어진 자기 프로젝트니까. 뭔가 해내 보겠다는 마음은 연두도 강할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 이 패스트볼로 승부를 봤던 지혁은 결과를 알고 있다. 타자들의 괴물 같은 힘을 높은 패스트볼로 이겨낼 구위가 지혁에게는 없다. 낮은 패스트볼,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에 휘어져 가라앉는 싱커. 지금의 조합으로는 높은 존을 공략할 수 없다.

“그래도 저번 시즌에 내가 던진 낮은 공들은 꽤 잘 통했으니까. 일단은 이대로 갈 거야.”

지혁은 여전히 자료만 쳐다보고 있는 연두에게 통보하듯 알렸다. 일단은 잘 통하던 투구로. 해 보는 데 까지는 해 봐야 되니까.

*

2월 10일. 탬파베이의 스프링캠프는 올 해도 어김없이 포트 샬럿에서 열린다. 대니 랭카스터 신임 감독은 20일까지 모이라는 짤막한 말만 남겼다. 하지만 투수조 조장인 알렉스 콥이 따로 연락을 해 왔다.

- 투수조는 조금 일찍 모여서 같이 몸을 만들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 생각 있는 사람들은 조금 일찍 모이는 게 어때? 물론, 개인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고.

원래 몸을 조금 일찍 끌어올리는 편인 지혁은 망설임 없이 캠프에 조기 합류했다. 콥의 연락 덕분이었을까? 샬럿의 스포츠 센터에 합류한 첫 날부터, 탬파베이의 투수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문! 예에-”

크리스 아처는 특유의 폭탄 머리를 아직도 깎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곱슬머리가 흩날리는 민들레 씨처럼 보일 정도다.

“오랜만이야, 크리스. 휴가는 잘 보냈어?”

“뭐, 그냥 그랬어. 나쁘지도 않았고, 좋지도 않았고. 하하.”

“너 인터뷰 엄청나게 했더라?”

“와우. 장난 아니었어. 이번 오프시즌은 감독님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매든 감독님 인터뷰로 한 번, 그리고 이번 감독님 인터뷰로 또 한 번.”

아처는 ‘이번 감독님’을 언급하며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는 랭카스터 감독에 대해서 알아?”

“조금? 이야기만 들어 봤어. 그리고 그 스피어 영상도 봤고 말야.”

아처는 낄낄댔다. 하지만 다른 투수들 중 몇 명은 조금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선수를 때렸다는 전과가 있는 감독이니까. 선수들 입장에서는 기꺼운 경력은 절대 아니다.

“누가 감독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마운드에 올라가서 우리의 공을 잘 던지는 게 중요한 거지.”

“동의.”

콥이 믿음직스럽게 말하고, 스마일리도 낮게 대답했다.

“자. 그럼 간단하게 몸이나 풀자.”

개인적인 일이 있다는 제이크 오도리찌를 제외한 선발투수 네 명은 천천히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파란 야구장에서 쏟아지는 플로리다의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자, 또 다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다는 설렘이 날아든다.

날이 지나가고, 스프링캠프 소집일이 다가오면서 그 설렘은 갈수록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2월 20일. 탬파베이 레이스의 2015 시즌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

샬럿 스포츠 센터의 클럽하우스가 북적북적하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팀의 선수들 60명 가까이가 모였다. 여기에 아직 도미니카에서 합류하지 않은 선수들과 NRI(주 : 로스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초청선수들) 몇 명이 더 합류하면 랭카스터 호가 본격적으로 닻을 올릴 것이다.

고작 스프링캠프를 시작하는 것뿐이지만, 기자들도 엄청나게 몰려 있었다. 그들의 표적은 오직 단 하나. 대니 랭카스터. 대니 랭카스터가 공식적으로 첫 모습을 보이는 날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날아온 기자들마저도 랭카스터 감독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을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지혁 선수. 랭카스터 감독은 만나 봤나요?”

“아뇨. 아직이요. 저도 오늘 처음 만나는 거예요.”

“굉장히 괴팍한 성격이라고 소문이 나 있잖아요?”

“네, 뭐... 전 잘 몰라서요. 하하.”

“형진 선수는요?”

“저도 잘 모르긴 해요. 그런데 재밌을 것 같아요. 화끈하신 분일 것 같아서.”

“아하하! 화끈!”

조예은이 깔깔거렸다. 확실히 형진의 말에 리액션이 더 좋다. 매든 감독이 형진보다는 지혁과 조금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면, 랭카스터 감독은 지혁보다는 형진과 더 잘 어울릴 법 하다. 적어도 보이기로는.

“5선발 경쟁은 아직 안 끝났지?”

“네, 선배님.”

한국의 스포츠 채널 해설위원 중 한 명인 김지우가 지혁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물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뛴 경험이 있는 김지우는 이해한다는 듯 픽 웃었다.

“하필이면 5선발 경쟁을 하는데 감독이 바뀌네. 너도 고생하겠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실력으로 줄 세우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 자신 있어 보이니까 좋네. 새 감독한테도 그 자신 있는 모습을 잘 어필해. 이 동네는 자신감으로 반 먹고 들어가더라.”

“네.”

쿠어스필드에서 완봉까지 기록했던 선배니까, 지혁도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문! 선수들 전부 라커룸으로 모이라는데요.”

한국에서 넘어온 기자들 몇 명과 인터뷰를 하던 지혁에게 클러비가 다가와 소식을 알렸다. 클러비들이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선수들을 전부 불러모으고 있다.

“야, 이형진!”

“어. 불렀냐?”

“가자. 들소 감독님 만나러.”

“몇 달 만에 인터뷰 하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부르네. 누군지 모르겠지만 타이밍 잘 맞추는 양반이야.”

작년에도 여전히 메이저리그 팀에 올라오지 못한 형진이 씁쓸해하며 지혁과 함꼐 발걸음을 옮겼다. 클러비들이 라커룸으로 들어오려는 기자들을 ‘첫 미팅은 비공개입니다.’며 막아서는 틈바구니를 헤집고 나아간다.

“와. 덩치가...”

지혁은 본능적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에, 지금 당장 NFL의 러닝백을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의 몸을 가진 거대한 흑인 사내가 당당히 서 있었다. 팔짱을 낀 팔꿈치 근육이 터져나갈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저 사람을 보면서 들소를 떠올렸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미친 들소...’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니 랭카스터와의 첫 만남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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