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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66화 (67/204)

< 66 - 첫인상. >

랭카스터 감독은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선수들 하나하나와 눈빛을 마주치고 있었는데, 지혁은 눈이 마주치자 간단히 모자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했다. 정확히는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않고 이쪽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야, 좀 무섭지 않냐?”

형진이 낮게 속삭거리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로. 랭카스터의 첫인상은 ‘무섭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 모두 모였나?”

게다가 동굴 속에서 울려퍼지는 것 같은 엄청난 저음의 목소리까지. 이 이상 험상궂을 수 있을까? 이 라커룸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전부 똑같이 생각하는 듯, 고요한 적막만 감돌았다.

“반갑다, 제군들. 나는 대니 랭카스터. 너희들의 새로운 보스다.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

무표정한 얼굴로 선수들의 면면을 한 번 훑은 랭카스터가 갑자기 있는 힘껏 인상을 썼다.

“너희들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안다. 저 밖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놈들 중에는 인간이 덜 된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있지. 그 소문은 저 녀석들의 악질적인 펜놀림에서 나온 거라고 미리 말해두고 싶군.”

휴우. 몇몇 선수들과 랭카스터 감독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가지. 자네들에게 이런 말까지 하는 게 조금 쪽팔린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난 첫 날이고 앞으로 몇 년을 같이 할 사이인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안 되니까. 내가 지방덩어리이자 인간쓰레기인 팻 버딘 녀석에게 주먹질을 가한 건.”

마이너리거 중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귀에 똑똑히 들렸다.

“사실이야.”

랭카스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몇몇 선수들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하지만. 그 개새끼가 동료의 누이들에게 치근덕거리고, 내 와이프를 희롱한 것도 사실이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

워후.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라커룸 속에 놀라움이 번졌다.

“내가 그 새끼를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어.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놈이었고, 입이 아주 더러운 놈이었지. 사생활도 아주 문란했고. 그 무뢰배의 얼굴에 펀치를 먹인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아직도 믿고 있네.”

아무리 봐도 스프링캠프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자리에 모인 모든 선수들이 랭카스터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거기서 멈춰있었지. 메이저리그에 돌아온 게 10년 만이야. 너희들이 이 쪽팔린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훈을 얻길 바란다.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녀석에게 난, 자비가 없어.”

또 다시 사람을 치겠다는 뜻이야 아니었겠지만, 선수들의 시선이 엄청난 근육의 팔뚝으로 쏠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거에 맞으면 그냥 한 방에 시즌아웃 되겠는데?’

이런 생각을 한 게 지혁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맹세하지. 너희들 중에 내 와이프를 희롱하는 녀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진 않을 거야. 내 주먹에 맞으면 어떤 상태가 될지 아무도 모르거든. Shit. 기자놈들 때문에 내가 이런 소리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더 이상 험악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새 감독이 팀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선수들을 모아 놓고 하는 얘기가 이런 것이라니.

“음... 감독님?”

“에반. 얘기해.”

롱고리아가 이 무서운 분위기를 깨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롱고리아는 오히려 험악한 분위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첫 미팅에서 어울리는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내가 이 팀의 멤버들에게 어떤 말을 할지는 내가 결정해.”

“그건 감독님의 마음이지만. 분위기는 아주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어린 선수들도 많은데, 이런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면 곤란합니다.”

“곤란? 곤란이라고 했나?”

지혁은 롱고리아가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랭카스터 감독이 팔짱을 풀고 허리에 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네. 곤란하죠.”

롱고리아는 당당하게 랭카스터 감독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두 사람이 주먹을 내뻗으면 바로 안면에 펀치를 가할 수 있는 거리가 되자, 몇몇 선수들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었던 거겠지.

“다시 말해 봐, 에반.”

“곤란합니다.”

“곤란하다고.”

“네.”

롱고리아와 랭카스터 감독의 눈빛이 허공에서 으르렁거리며 부딪혔다.

“에반!”

“대니!”

마침내 랭카스터가 뻑 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

“푸하하하핫!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크리스 아처가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커룸이 뒤집어졌다. 탬파베이에 2년 이상 머물렀던 선수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몇몇은 눈물까지 훔쳐내며 라커룸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뭐야?”

“이게 뭐...야?”

“헤이! Welcome to the new season!”

랭카스터는 지금까지의 험상궂은 표정을 완전히 바꾼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롱고리아와도 하이파이브를 하며 서로 좋다고 난리였다. 제이크 맥기, 크리스 아처, 제임스 로니 같은 선수들은 거의 땅을 치며 웃어대고 있다.

“깜짝 서프라이즈야, 너희들!”

알렉스 콥이 여전히 얼이 나간 듯 굳어 있는 선수들의 등을 내리치며 웃었다. 이번 시즌 팀에 새로 합류한 선수들과 마이너리거들, 그리고 작년에 루키였던 선수들이 이 몰래카메라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쟤 표정 좀 봐! 으하하핫!”

“동영상 찍고 있지?”

어느 샌가 나타난 클러비들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충격과 공포에 빠진 라커룸 분위기를 촬영하고 있다. 지혁과 형진의 단단히 속아넘어간 그 표정도 카메라에 정면으로 담겼다.

“아... 하느님. 뭔가 이상했어.”

“난 에반이 진짜 미친 줄 알았어. 한 대 맞으면 갈비뼈 세 대는 그냥 나갈 것 같은데...”

선수들이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이윽고 깔끔하게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 같이 웃기 시작했다.

“헤이, 에반. 연기가 정말 대단한데?”

“감독님도요. 진짜 무서웠어요.”

“나야 평소대로 한 거지. 하하하. 자! 전부 주목!”

랭카스터 감독이 피자 한 판 정도는 되어 보이는 손으로 박수를 쩍쩍 쳤다. 속은 선수들을 가리키며 웃음을 참지 못하던 선수들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던 랭카스터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반갑다. 내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예스! 마음에 들다마다요, 보스!”

아처가 휘파람까지 불며 응답하자, 랭카스터는 허리를 젖히며 껄껄 웃는다.

“아주 좋아, 크리스. 내가 원하는 대답이야. 휘유. 너희들! 오늘의 이 이벤트는 SNS를 통해서 다 퍼질 거니까. 당분간 놀림당하는 건 각오해야 해.”

지혁은 순간 패트릭과 연두를 떠올렸다. 고생길이 열렸군.

“난 너희를 잘 모른다. 너희도 나를 잘 모르겠지. 이제부터 스프링캠프 한 달 동안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내가 시즌 내내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야구를 너희에게 알려줄 거야. 그리고 너희는 그 관점에서 나를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는지 보겠다. 오늘은 첫 날이니까 간단하게 워밍업을 하고 몸을 끌어올린 뒤, 오후 미팅에서 보자. 이상!”

선수들이 자리에서 우루루 일어나 그라운드로 나가는 와중에도, 랭카스터 감독은 클러비를 붙잡고 촬영한 동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야, 지혁아. 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몰카 충격이 너무 컸어.”

“나도 그래. 그래도 난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뭘?”

“작년이랑은 180도 달라질 것 같다는 거.”

지혁과 형진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 뉴 레이스. 그 선장인 랭카스터와의 첫 만남은 공포스러운 몰래카메라로 시작되었다.

*

“자, 간단하게 스트레칭하러 출발.”

힉키 투수코치가 스프링캠프를 시작하면 늘상 하던 대로 투수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투수조는 첫 훈련을 시작했다. 지혁은 잠깐 빠져서 힉키에게 다가갔다.

“코치님.”

“왜?”

“저 말인데요. 작년처럼만 던져도 되는 걸까요?”

“휴. 겨울 내내 걱정만 하다가 온 놈이 여기 또 있네.”

“또 누가 있었나요?”

“프라이스가 그랬지.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자. 그래서 문제가 뭐야?”

지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이 패스트볼 문제인데요.”

“오, 이런.”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안 그래도 내가 한 번 권유해볼까 하고 있었거든.”

“코치님도요?”

“나 말고 또 누가 있나?”

“아... 그냥,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요.”

힉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불펜의 타석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방망이로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을 휘저었다.

“네가 잘 공략하는 쪽은 여기. 타자들의 무릎 근처. 지금까지는 제법 잘 통했어. 이유가 뭘까?”

“싱커가 있으니까요?”

“맞아. 싱커도 있지. 이 근처에서 낮게 잘 떨어지니까. 그런데 저번 시즌 막판에 잘 먹혔던 건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지. 낯설어서야.”

힉키는 투수코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어퍼 스윙을 한 번 해 보였다.

“요새 모든 구단의 타격 코치들이 무릎을 살짝 굽히면서 들어올리는 스윙을 가르치고 있어. 낮은 공에 대처하는 방식이 좋아지고 있지. 타격에 재능이 떨어지는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웬만한 녀석들은 이 스윙을 하기 시작할 거야. 손에 꼽는 타자들은 이미 이 스윙과 레벨 스윙을 병행하고 있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톱니바퀴 싸움이야. 물고 물리는 거지. 낮은 공을 노리는 스윙을 할 때는 높은 공을 집어넣고, 높은 공을 노릴 때는 싱커로 떨어뜨리고. 네 싱커가 아무리 어퍼 스윙을 해도 절대 맞지 않을 구위를 가졌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수싸움을 할 필요는 있지.”

힉키는 방망이를 내던지고 지혁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또 있어.”

“그게 뭐죠?”

“낮은 공 일변도로 가면 결국 싱커 의존도가 커져. 싱커 의존도가 커지면 부상이 더 금방 찾아오겠지. 이건 지금까지의 다른 이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야.”

“부상...”

확실히 그럴 듯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치르려면, 마이너리그에서 던졌던 작년보다 훨씬 더 센 싱커를 많이 던져야 할 것이니까. 더램에서만 해도 싱커를 빼고 던져도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경기가 있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싱커를 전력으로 던져도 통제가 안 되는 게임이 많으면 많았지.

부상이라는 키워드가 머리를 때렸다. 지혁의 제일가는 무기인 싱커에 대한 의존도를 조금은 낮출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얻어맞고만 있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하이 패스트볼은...”

“가볍긴 하지. 네 패스트볼은 싱커가 흔들어 줄 때에야 위력이 있으니까. 자. 내가 생각했던 방법을 말해줄게.”

힉키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패스트볼의 구위를 끌어올리는 건 힘든 일이야. 단기간에 되지도 않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다른 길을 찾아야 해. 커브를 배워. 낮은 쪽의 패스트볼은 싱커가 위력을 살려줄 거야. 높은 쪽의 패스트볼은 커브가 위력을 살려줄 수 있어.”

“아아.”

문제가 되돌아왔다. 결국 답은 커브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니야. 실천해 보는 거지. 여기는 스프링캠프야. 지금이 아니면 테스트 할 기회가 없어.”

힉키는 생각보다 단호했다.

“5선발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이 패스트볼과 커브 조합으로만 스프링캠프를 보내 봐. 네 자리는 내가 지켜봐 줄 테니까.”

하지만 지혁의 귀에는 힉키의 마지막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5선발 자리를 지켜 주겠다는 엄청난 말이었는데도. 지혁은 온통 신을 만날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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