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 악마야! >
따아악!
라이브 배팅. 이번 시즌 새로 영입된 아스드루발 카브레라가 위협적인 타구를 연달아 때려낸다. 미들 인필더(2루수 혹은 유격수)이면서도 해마다 15홈런 이상을 때려줄 수 있는 선수.
저번 시즌의 유넬 에스코바나 벤 조브리스트와 비교하면 확실히 공격력은 좋아졌다. 물론 그만큼 수비는 조금 아쉬워졌다.
“저 친구 공이 가벼운데?”
“높은 공을 넣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흐음. 저래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버티겠어? 힘이 덜 붙는데.”
“낮은 공을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힉키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르네 리베라에게 싱커 싸인을 주문했다.
‘좋아.’
오늘 벌써 2루타 코스로 향하는 공만 열 개 넘게 허용한 지혁이 마운드 위에서 끄덕거렸다. 아무리 힉키가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말했어도, 새로운 감독 앞에서 이번 스프링캠프 내내 장타를 내주는 모습만 보였었는데. 이런 식으론 눈도장을 찍는 건 안 되지.
부웅!
카브레라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바깥쪽 존 경계에서 흘러나가는 싱커가 날카롭게 휘며 떨어졌다. 낮은 쪽을 공략해 들어가기 시작하자 지혁의 피칭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패스트볼의 체감 속도도 훨씬 더 빨라졌을 것이다. 하루에 딱 열 개만 허용된 싱커를 다 던지는 동안, 카브레라와 로니, 카살리가 공을 맞춰내지도 못했다.
“보셨죠?”
“확실히 좋군.”
마운드를 걸어 내려오는 지혁에게 랭카스터가 커다란 주먹을 내밀었다. 지혁은 순간 흠칫했지만, 곧 주먹을 맞댔다.
“좋아. 컨디션은 어때?”
“아직 한 70%정도입니다. 점점 올라오고 있습니다.”
“굿. 컨디션 잘 유지해.”
“옛.”
자꾸만 감독님이라는 호칭 대신 Sir를 붙여야 할 것 같아서, 랭카스터가 말을 걸 때마다 움찔움찔 한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웃고, 훨씬 더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본능적인 공포심이 드는 외모를 갖고 있으니까.
“문. 오늘 느낌은 어땠어?”
“비슷했어요. 맞아 나갈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곤란해.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하지만 에이캡(주 : 아스드루발 카브레라의 별명. A-Cab)도 너무 편하게 치던데요.”
힉키는 연신 괜찮다며 지혁을 위로했다.
“커브는 어떻게 됐어?”
“기존에 던지던 그립 말고 새로 그립을 잡아보고 있어요.”
원래부터 지혁이 던지던 커브는 정말 어쩌다가, 아무도 예상을 못할 때 타이밍을 빼앗는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혁은 애초에 커브를 ‘던질 줄만 안다’고 말해 놨다. 만약에라도, 아주 혹시라도, 신에게서 새로운 커브를 받게 된다면 해놓을 말이 필요하니까. 새로 커브를 배워보겠다는 말만 해 둔 상태다.
“곧 시범경기가 시작하니까. 거기서 한 번 던져볼 수 있게끔 하면 좋겠는데.”
“... 노력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것도 다 지켜보고 있겠지. 신과의 딜을 또 해야 하는 것일까. 지혁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
“클클클. 쉽지 않은가 보군.”
“...네.”
그럴 수밖에 없지. 지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나라라도 잃은 줄 알겠어.”
“안 그래도 줄은 선수 생명인데 또 줄게 생겼으니까 그렇죠.”
오랜만에 만난 신은 여전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클클거리는 특유의 가래 낀 웃음소리도 그대로였다.
“꼭 필요한 겐가? 커브.”
“하이 패스트볼을 써야 한다면요.”
“그렇게 생각했군. 뭐, 정석적이지. 자네 패스트볼로는 높은 공은 위험하니까.”
“다른 방법도 있나요? 그게 정석이라면, 변칙도 있겠네요?”
“흐흐.”
신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지혁은 대답 없이 맥주는 마시는 신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게.”
“안 알려주고 계시잖아요.”
“오해일세. 야구에는 정답이 없다는 게 바로 정답이지.”
신을 말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누가 와도.
“어휴.”
혼자 깊은 숨을 내쉬고 있는 와중에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클클거리던 신은 거짓말같이 모습을 감춘다.
“뭡니까?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아, 패트릭.”
“누구한테 무슨 일 생겼습니까? 얼굴이 아주 썩어 들어가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걱정이 많아서.”
죽상인 지혁과는 다르게, 패트릭은 한결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패트릭이 샬럿으로 돌아온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정체된 2월 중순이었다.
페르난도 멘데스의 계약 조율이 꽤 길어졌던 탓에 생각보다 일주일 더 클리블랜드에 가 있었던 그는 결국 멘데스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시켰다.
쿠바산 초특급 유망주로 불리는 요안 몬카다가 시장에 나오면서 멘데스와의 가격 경쟁이 붙었고, 자연스럽게 멘데스의 협상도 늘어져 왔다. 스몰마켓 팀인 클리블랜드를 굳이 원하는 멘데스 때문에 패트릭이 생각보다 훨씬 더 고생을 해야 했다.
“무슨 걱정?”
“하이 패스트볼, 그리고 커브요.”
“꼭 던져야만 하는 겁니까?”
“지금의 패턴으로는 부상 위험이 크대요. 이제 타자들도 낮은 공을 노리고 들어오고.”
“그렇네. 확실히 필요하긴 하겠네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패트릭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지혁을 돌아보았다.
“야구에 대해서, 내가 조언하길 바라는 겁니까?”
“생각을 들어볼 수는 있잖아요.”
“나는 이쪽으로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프로들은 따로 있잖아요.”
“프로?”
“드류 스마일리라던가. 제이크 오도리찌라던가. 하이 패스트볼을 잘 쓰는 다른 선수들 말입니다. 이걸 나한테 물어보면 안 돼요. 나는 당신이 만들어 낸 결과를 가지고 구단하고 딜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쪽으로는 진작 물어봤죠. 걔네 둘 다 약간 천재형 과라서. 손에서 휙하고 쭉 미끄러트리면 된다는데.”
“하하핫.”
패트릭은 기분이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좀처럼 소리 내어 웃지 않는 사람인데.
“커브를 배울 거라면 다른 선수들의 자료를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어쩔 수 없지.”
“그...렇죠. 어디서 재능이 툭 떨어지지는 않으니...까요.”
“연두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던데. 아직 자료 못 봤어요?”
“걔가요? 걔는 하이 패스트볼에만 완전히 꽂혀서 제가 쳐낸 이후에 말도 잘 안 걸어 주던데. 조금 삐진 것 같더라구요.”
“아닌데? 나한테는 당신이 던질만한 커브를 찾아보느라 어제도 밤 샜다고 하던데요?”
응? 스프링캠프에 참여한 이후 연두와 제대로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없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엄청 바빠 보이기는 했었다.
“연두한테 한 번 가 봐요. 걔가 괜찮은 커브를 던지는 투수들을 찾아 놨을 겁니다. 조금 부추기면 선수한테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 던지는지 배워 올 기세였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패트릭은 지혁의 어깨를 한 번 치고는 조금 자야겠다며 자신의 사무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휴. 시키지도 않은 걸 참 열심히 하네.”
지혁은 중얼거리며 연두가 밤낮으로 박혀 있는 비디오실로 향하려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커피라도 한 잔 사가야겠다.”
그러게 왜 말도 안 하고 고생을 사서 해.
*
“야, 연두야. 연두야?”
비디오를 틀어 놓고 책상에 엎어져 있는 연두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산발이 된 머리가 조금 안쓰러우면서도 또 퍽 고맙다. 지혁은 쌔근쌔근한 연두의 숨소리를 들으며 연두가 켜 놓은 모니터 속으로 눈길을 돌렸다.
“뭐야, NPB?”
처음엔 어느 팀인지 헷갈렸다. 유독 초록에 가까운 인조잔디 색깔과 돔 구장인 형태, 그리고 두건을 머리에 동여맨 관중들이 뿔나팔을 들고 응원하는 모습까지. 일본 프로야구인 NPB 자료였다. 메이저리그나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미국에서는 구하기가 쉽지만, NPB의 자료는 그렇지 않다. 연두는 정말로 고생하고 있었다.
“얘는 누구지...? 오타니는 아닌데.”
전생에서 미국에 넘어왔던 일본 투수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그 선수들 중 한 명은 아닌 것 같았다.
“흐음.”
패스트볼은 대략 130km 후반 정도가 나오는 투수다. 일본투수 답게 투심 계열의 슈트볼을 자주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스트라이크 존의 높은 쪽으로 향하는 패스트볼들이 위협적으로 맞아나간다. 폴대 근처로 향하는 파울 두 개를 얻어맞은 뒤에야, 이 선수의 손끝에서 커브가 떠났다.
“와, 뭐야?”
지혁은 솔직히 정말로 놀랐다. 진심으로 놀라움 섞인 감탄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패스트볼이 손에서 빠진 것 같은 궤적을 그리던 공이 순식간에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타자의 눈높이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던 커브가 존 낮은 쪽에 정확히 박힐 정도의 낙폭이었다.
“음... 지혁이야...?”
“어. 나야. 깼어?”
“아야... 머리 아파. 나 언제부터 잔 거지? 지금 몇 시야?”
“오후 다섯 시 조금 안 됐어. 그냥 집에 가서 누워서 자야지. 여자애가 여기 이렇게 엎어져서 자면 어떡하냐.”
“할 거 무지 많단 말야... 흐아암.”
“자, 커피. 이거 한 잔 마시고 정신 좀 차려.”
부스스한 머리를 슥슥 털어내는 연두에게 지혁은 차가운 커피를 건넸다.
“오올. 아이스 아메리카노. 제일 싼 걸로 사왔네? 고마워.”
“눈곱이나 좀 떼고 인사해라.”
“그런 건 못 본 척 좀 해, 멍청아.”
아직도 잠이 잔뜩 붙어있는 눈을 간신히 뜬 연두가 살짝 웃으며 커피를 쭉쭉 빨아들였다.
“이 투수 누구야?”
“음... 라쿠텐 골든이글스, 78번... 이름이 뭐더라? 아, 후지. 후지 미유타. 고등학생이야.”
“고등학생이라고?!”
“어. 2학년 때 중퇴하고 바로 프로에 들어갔어. 이게 1년 만에 프로에서 데뷔전을 치렀을 때 경기래.”
이런, 썅. 욕설이 나올 법 했던 것을 간신히 밀어넣었다. 없는 재능을 질투하게 되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 고등학생이 저런 커브를 던질 수 있는 거야?
“커브가 되게 좋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나머지가 프로에서 통할 정도가 아니래. 라쿠텐에서도 자리를 못 잡고 있어.”
“다행이네.”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얘 영상은 왜 보고 있던 거야?”
“몰라서 묻냐? 하여튼... 지 때문에 밤새서 커브란 커브는 다 찾아보고 있는데.”
연두가 있는 힘껏 눈을 흘긴다. 지혁은 머쓱하게 연두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었다.
“고맙다, 고마워. 지금까지 모아 놓은 자료들 좀 줄래? 집에 가서 한 번 훑어보게.”
“내 자료를? 이걸로 괜찮아?”
“응. 패트릭도 너한테 찾아가보라고 하더라. 한 번 쭉 보고 참고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참고할게. 배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배워보고. 그렇게 해야 너도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아...”
연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가져가.”
“고마워. 고생해.”
“응.”
*
그날 밤, 지혁은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이건 그나마 시간이 조금 단축된 편이었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세이버매트릭스 데이터를 기준으로 삼아 좋은 커브로 줄을 세워놓은 연두의 자료 덕분이다.
“여기까지는 최소한 2년은 줘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네.”
“젠장.”
커브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 변화구인만큼, 잘 던지는 투수들도 많았다. 같은 팀 투수인 드류 스마일리의 커브마저도 2년은 줘야 던질 수 있는 공이라고 하니,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11년 남았고 이번 시즌 치르고 나면 10년 남는데...”
남은 선수 생명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맨 처음 싱커를 골랐을 때는 오히려 거부감이 없었다. 그 때의 실력으로는 메이저리그는커녕 더블 A에서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싱커가 있는 지금 굳이 선수 생명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새로운 재능이 필요한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지혁을 미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신님.”
“얘기하게.”
“제가 만약에 큰 부상을 당해요. 그러면 그것도 어떻게 해결해 주실 수 있나요?”
“흐흐. 자네는 재밌어. 정말 재밌는 친구야.”
신은 손에 든 맥주를 깔끔하게 비워내고는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 간 그 어떤 놈들도 자기가 부상당할 거라고는 생각을 안 했었거든. 절대로 부상을 당하지 않겠다고만 생각했지. 그만큼 자신들의 재능에 자신감도 갖고 있었고. 그런데 자네는 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단 말이지. 난 그게 참 재밌어.”
“...”
“지금까지는 이렇게 해결해 왔었네. 당장 마운드에 설 수 있을 때까지 6개월이 필요하다고 하면, 남은 선수 생명에서 그 두 배를 쓰는 조건을 걸었지.”
“말도 안 되잖아요!”
“그 조건을 받아들인 놈들이 한 트럭, 아니 한 트럭까지는 아니지. 대부분이야.”
“대체 왜요?”
“당장 1년, 2년을 통째로 쉬게 되면 가장 젊을 때 가장 좋은 공을 못 던지게 되니까. 1년이건 2년이건 쉬게 되면 다른 공의 구위도 현격하게 떨어질 테고. 자네 선배들은 그런 걸 두려워했지. 현재의 상태를 잃어버리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진다거나, 내가 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그런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래의 생명을 감수했다네.”
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지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신이 아니라 악마 같으시네요.”
“흐흐. 그 말도 많이 들었지. 보기 나름이라네. 나는 누구 한 명이 이 생태계를 뒤흔드는 건 바라지 않거든. 그뿐이라네.”
지혁의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부상을 당하면 꼼짝없이 부상당한 기간의 두 배를 소모해야 한다. 지금처럼 싱커볼러로 계속 선수 생활을 해 나가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는 경고음이 울렸다.
“휴우. 신님.”
“얘기하게.”
“후지 미유타? 그 새파란 어린놈의 커브는 어때요?”
“흐흐흐.”
신이 웃으며 되물었다.
“내게 재밌는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볼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