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 허슬! >
“재밌는 생각이요?”
“그래. 후지 미유타라는 친구는 그 커브가 끝이야. 다른 잠재력은 아예 없는 친구지. 자네보다 훨씬 못 미치는 투수야. 하지만 그 커브 하나만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꽤 좋은 수준의 공이라네. 지금의 자네가 그 공을 받겠다면 적어도 2년은 써야 할 것 같군.”
“그러면 굳이 후지인가 뭔가 하는 투수의 공을 고를 필요가 없잖아요. 스마일리의 커브를 골라도 2년은 써야 한다면서요. 메이저리그에서 검증된 공이 있는데 왜 후지의 커브를 써요?”
“그러니 제안을 하겠다는 게지.”
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신이 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 오히려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지혁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은 저 존재는 또 어떤 제안을 할까. 그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후지 미유타의 커브는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가 없는 공이야. 후지라는 선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없을 테니까. 난 후지의 커브가 자네의 공과 어울렸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낼지 궁금하네. 매우 궁금해. 흐흐.”
“음...”
“이렇게 해 보는 게 어떤가?”
신은 크게 벌렸던 두 팔을 모아 박수를 한 번 짝하고 쳤다.
“자네가 후지의 커브를 던질 수 있게 해 주겠네. 대신 그 결과로 어느 정도의 수명을 써야 하는지 내기를 해 보는 게야.”
“내기?”
“Rookie of the year(신인왕). 어떤가? 올해의 루키로 자네가 뽑힌다면, 후지 미유타의 커브에 대한 대가는 절반만 받겠네.”
“그럼 1년?”
“클클클. 구미가 당기지?”
당연하다. 눈이 돌아갈 뻔한 제안이니까. 한 시즌이 걸린 문제다.
“단, 올해의 루키가 되지 못한다면 그 때는 1년 더 쓰게. 3년. 어때?”
하아. 한 대 때리고 싶다.
“흐흐흐. 때리면 맞아 주겠네. 나는 아픔을 느끼지도 않을 테고. 재미있기만 하면 되니까.”
“속마음까지 읽지 마세요. 진짜 악마 같으니까.”
지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선수 생명을 가지고 배팅을 하게 생겼다. 신이 지혁의 생에 개입한 이후 늘 그렇긴 했지만.
“딜을 하지 않는다면 2년. 그러면 남은 게 9년. 딜을 하면 커브를 1년 써 보고, 안 되면 거기서부터 2년. 최악의 경우에는 남은 선수 생활이 8년...”
“최선의 경우에는 10년이지. 이번 시즌을 마치고 나면 9년이 남을테고.”
“알거든요.”
38살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프로에 들어온 이후 18년을 보냈다. 그리고 싱커를 얻은 시점에서, 35살까지 공을 던질 수 있다.
지혁은 30대 중반이 되어서 공을 던지던 때를 기억해냈다.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하고, 몸 관리를 위해 몇 시간은 더 투자해야 하고, 아무리 노력하고 발악해도 하루하루 퇴보하는 게 몸으로 느껴지던 시절들이다.
“30대의 문지혁보다, 20대의 문지혁을 선택하는 게 더 낫겠어요.”
“흐흐. 좋아, 좋아. 그럼 할 텐가? 올해의 루키를 걸고?”
“저도 레이스 할 기회를 주셔야죠.”
“오호?”
이왕 걸 거면 승부를 걸어야지.
“솔직히 엄청 쫄리긴 한데... 승부를 봐야 될 타이밍에 도망가는 건 투수의 자세가 아니에요. 이번 시즌 신인왕을 못 하면, 4년.”
“흐하하하! 대담하군!”
“대신, 신인왕을 타면 제로. 선수 생명을 안 까는 대신으로 하죠.”
“더 바라는 게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리해서 기간을 늘릴 필요가 없었을텐데?”
“이번 시즌은 부상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안전하게, 한 시즌. 한 시즌은 풀타임으로 던져야 신인왕을 받든지 말든지 하죠.”
신의 표정이 묘해졌다. 살짝 인상을 쓴 건지 아니면 웃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지혁을 바라보던 신은 이내 활짝 웃었다.
“좋네. 아프지 않고 한 시즌. 올해의 루키로 뽑히면 후지 미유타의 커브는 대가 없는 것으로 하지.”
“푸우우. 제가 잘한 건지 모르겠네요.”
“이제 되돌릴 수 없네. 흐흐.”
신이 웃었다.
*
“좋아, 좋아, 좋아!”
청백전인데도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원정용 남색 유니폼을 입은 A팀 선발투수인 크리스 아처가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마운드 위에서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내려왔다. 더그아웃의 모든 선수들이 일일이 아처와 하이파이브를 해 주며 기세를 올린다.
“호오우! 예쓰!”
신이 잔뜩 난 아처가 더그아웃에서 거의 춤을 추다시피 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선수들 몇 명과는 주먹을 여러 번 마주치며 정신없는 세레머니를 하기도 했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B팀에서는 주전 유격수로 나선 형진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A팀의 존 제이소가 아주 강하게 밀어 때린 타구를 거의 날아가다시피 하며 글러브로 움켜쥔 것이다.
“예에아! 허슬! 허슬!”
이번엔 B팀의 더그아웃이 난리가 났다. 더그아웃의 난간을 쾅쾅 때려가며 휘파람을 불어대고 소리를 지른다. 지혁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두 번째 타자인 마이키 마툭의 중견수 쪽 깊은 타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던 키어마이어가 잔디를 가르며 미끄러져 공을 낚아채자, B팀의 더그아웃은 또 한 번 시끄러워졌다.
“아, 목 아프다.”
“하하하! 나도.”
“그런데 이것도 재밌네.”
선수들이 깔깔댄다. 고작 청백전인데도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포스트시즌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도 연습의 일환이었다.
“자, 집합!”
랭카스터 감독이 착 깔리는 목소리를 크게 내며 5이닝 경기를 마친 선수들을 불러모은다.
“오늘은 B팀이 이겼으니, A팀 놈들은 한 명씩 잡고 밥을 사도록. 약속이니까.”
“예에!”
“이틀 뒤 부터는 시범경기에 들어간다. 비록 내가 너희들을 만난 지 2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팀의 모습을 충분히 알려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예쓰!”
“좋아. 시범경기는 선수들이 몸을 끌어올리는 기간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는 더 중요한 걸 만들기 위해 시간을 보낼 거다. 그게 뭐지?”
“허슬! 허슬!”
랭카스터는 선수들의 열정적인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그래. 허슬이다. 우리는 젊은 팀이야. 난 너희들이 더 패기로워지고, 더 몸을 아끼지 않고, 더 열정적이 된 모습을 바라고 있다. 그래야 팬들이 경기장을 더 많이 찾을 테니까.”
선수들과 함께 랭카스터 감독을 빙 둘러싸고 있던 지혁은 여기가 작년의 그 샬럿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랭카스터 감독의 말이 끝날 때마다 구령을 맞춰서 목소리를 높이는 선수들의 모습이 마치 사기가 잔뜩 오른 군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원시시대의 사람들이 우! 우! 하며 손을 흔드는 모습 같기도 하다.
상당히 웃긴 장면이었지만, 막상 이 무리 안에 들어오면 그 민망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오히려 엄청난 소속감에 사로잡힌다.
“내일은 푹 쉬고, 시범경기에 들어간다. 첫 날 선발은 코치 케빈이 알려줄 거야. 자.”
랭카스터가 가운데 서서 무릎에 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혔다. 선수들이 전부 랭카스터의 동작을 따라했다.
“원, 투, 쓰리!”
“허슬!”
메이저리그 팀이 아닌 NFL이나 NBA의 팀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같이 허슬을 외치고 발을 구르는, 야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
2015년 3월 8일.
스프링캠프 시범경기. 그레이트프루트 리그 네 번째 경기. 포트 샬럿의 샬럿 스포츠 센터에서 펼쳐지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대결. 3회.
- 투수 교체. No, 18. 지혁, 문.
“문! 싱커는 절대 던지지 마.”
불펜에서 마운드로 뛰어나가는 지혁의 뒤에 대고 힉키가 한 마디를 보탰다. 하루종일 들은 말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이다. 힉키가 볼 때는 아직 5선발 자리를 경쟁하는 선수들 중 한 명일 뿐이어서, 스프링캠프 때 부상 위험성이 있는 공을 세게 던지려다가 무리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지혁은 힉키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마운드에 올랐다. 물론 싱커는 던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부상을 우려해서는 아니다. 이번 시즌은 안전하니까. 목표는 이제 갓 배운 커브를 실전에서 얼마나 잘 쓸 수 있느냐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헤이, 르네!”
연습 투구를 위해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지혁은 오른손 글러브를 앞으로 빙빙 돌렸다. 변화구를 던지겠다는 신호다. 그리고 오늘 지혁이 던지기로 한 변화구는 오직 커브뿐이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싱커를 처음 던졌을 때의 기분이 살아났다. 물론 이번에는 이 커브가 안 좋으면 진짜 큰일이라는 마음도 컸지만. 불펜 쪽을 힐끗 돌아보니 힉키 코치도 유심히 지혁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후우.”
신과의 두 번째 계약, 그것도 선수 생명을 담보로 한 계약 이후로 커브를 100%로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갑자기 새로운 커브를 완벽하게 던지면 의심하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불펜에서는 서서히 끌어올려 왔다.
일부러 포수 한참 위로 던지거나 원바운드가 되는 공을 던져가며 힘을 뺐었는데, 이제는 실전이다. 100%로 던질 수 있는, 후지 미유타의 커브를 던질 순간이 온 것이다.
커브의 그립이 손에 딱 잡혔다. 포심 패스트볼을 옆으로 눕히듯 잡고, 실밥에 중지 손가락을 단단히 걸쳤다. 엄지 손가락에도 힘이 딱 들어갔다. 와인드업에서 이어지는 팔 스윙.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똑같이 휘어나오는 팔과는 다르게 손바닥은 3루 쪽을 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엄지를 위로 튕겨내 주면서 중지에 걸친 실밥을 강하게 땅으로 내리꽂듯 긁어냈다.
“나-이스!”
르네 리베라가 첫 공을 받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정도의 공이 떨어져 들어갔다. 지혁도 입을 떡 벌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존 높은 쪽을 향해 날아가던 공이 급격한 탑 스핀을 먹으며 순식간에 호를 그렸다.
“와우. 저 친구 실전파야? 저런 공은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그런 것 같네요.”
랭카스터는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케빈 캐쉬 벤치코치도 당황한 채 대답했다.
“기대되는군.”
랭카스터의 눈빛이 새로운 기대감으로 빛나는 사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3회초, 필라델피아의 타선은 9번 조단 댕크스, 1번 벤 르비어, 2번 오두벨 헤레라로 이어졌다. 지혁은 예정되었던 대로 패스트볼을 주로 던지며 경기를 이끌어나갔다.
“파울!”
몸쪽에 붙는 패스트볼. 87마일 짜리 공을 댕크스가 잡아당겼지만 3루 라인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구속이 아직 덜 올라온 상황이라 그런지 타자들이 타이밍을 쉽게 맞추고 있었다.
‘패스트볼만 네 개 던졌는데...’
이쯤에서 커브를 하나 던질 법 했다. 리베라가 여전히 패스트볼 싸인을 보냈지만 지혁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기어이 커브 싸인을 받아내고 나서야 두 손을 모으고 투구에 들어갔다.
새로운 공을 던진다는 것은, 언제나 참 신기할 정도로 떨리는 일이다. 후지 미유타라는 선수, 이름도 처음 들어본 고등학생의 커브를 메이저리그에서 선보인다는 떨림이 공에서 손을 놓는 순간까지 휘몰아쳤다.
‘좋아!’
공을 놓는 순간에 느낌이 정확하게 지혁의 머리를 찔렀다. 엄지를 튕겨 올리는 순간 살짝 솟구치는 듯한 공에 스핀이 제대로 걸린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정점에 달한 공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한 순간,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췄던 댕크스는 이미 타격을 포기했다.
“스트랔! 배터 아웃!”
스트라이크 존 정중앙, 한복판에 꽂히듯 떨어지는 커브가 댕크스를 농락하며 리베라의 미트에 들어갔다. 구심이 콜을 다 외치기도 전에 댕크스가 배터 박스를 벗어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 걸어가는 모습이 짜릿하다.
“예쓰!”
한 타자를 잡았을 뿐이지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치 처음 싱커를 던져서 아웃을 잡아냈을 때처럼.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한 번 내리쳤다. 커브의 시대에 지혁도 한 발을 디뎌 넣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