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Pressure. >
“지혁 선수! 오늘 던진 공, 커브 맞죠?”
“네.”
“77마일짜리가 하나 있었고, 80마일짜리가 다섯 개 있었어요. 제구가 조금 안 되는 모습도 있었구요. 이 커브는 겨울에 준비한 건가요? 확실히 지난해에 던졌던 공은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다. 변화가 조금 필요했거든요.”
“저번 시즌 성적도 좋았는데?”
“계속 싱커만 던지다간 맞아나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좋은 공이 있는데도 또 다른 공을 개발했다... 흐응.”
조예은은 손바닥만한 노트를 들고 지혁의 말을 빠짐없이 받아적었다. 녹음기까지 들이밀고 있으면서 또 왜 저렇게 적을까 싶다. 볼펜 뚜껑을 살짝 깨물고 있는 예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예은이 녹음기를 옆에 있던 형진에게 살짝 넘긴 동안, 지혁은 게임 내용을 복기했다.
1이닝 동안 투구수가 17개. 르비어에게 던졌던 높은 패스트볼이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바가지 안타가 된 것을 빼고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커브의 위력이 꽤 괜찮았다. 높은 패스트볼을 보여준 이후 비슷한 궤적에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커브는 타이밍을 확실히 빼앗는 공이다.
내심 감탄하기도 했다. 일본의 고등학생 3학년 나이인 후지 미유타라는 녀석의 공이라서, 솔직히 조금 못 미더웠던 것도 사실이다. 신이 지혁을 상대로 사기를 치지는 않겠지만, 그 커브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던져 보니 확실히 커브는 진짜였다. 엄지를 튕겨내는 힘에 따라서 파워와 낙폭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을 것 같고.
‘문제는 제구네.’
브랜든 웹의 싱커를 처음 던지기 시작하고 나서, 만족스러운 제구를 잡는 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도미니카 윈터리그, 스프링캠프, 몽고메리에서의 시즌 초반 몇 경기까지 감안하면 대략 3~4개월 정도 걸렸을까? 지금은 스프링캠프이고 몇 주 뒤에는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어야 한다.
‘어떻게 이 제구를 단기간에 잡아내느냐가 문제겠어.’
*
[ 1회말이 시작되겠습니다. 오늘의 선발투수는 문입니다. 지난 시즌 콜업되어서 6경기에 선발 등판, 3승 1패를 기록했습니다. ]
[ 싱커가 아주 좋은 투수죠. 훌륭한 그라운드볼러입니다. ]
[ 타석에 볼티모어의 1번으로 나서는 데이빗 러프. 작년 더블 A에서 꽤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습니다. 초구. 높게 빠지는 볼. ]
[ 패스트볼 구속이 89마일. 서서히 몸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 같군요. ]
[ 작년 이 투수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1.2마일 정도 나왔었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중인 것 같네요. 2구, 바깥쪽 꽉 찬 쪽에 들어갑니다. 스트라이크. 지금도 89마일이군요. ]
[ 지금 저 코스가 아주 좋습니다. 저 코스에 패스트볼을 집어넣으면, 거기서 빠져나가는 싱커가 훨씬 더 위력을 받거든요. 그 싱커로 작년에 훌륭한 인상을 남겼죠. 시프트를 잘 쓰는 우리 레이스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투수입니다. ]
[ 작년 더블 A, 트리플 A에서 그라운드볼 비율이 무려 58%에 달했던 선수입니다. ]
플로리다 지역 방송국의 캐스터와 해설자가 신나게 지혁의 싱커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지혁은 오늘도 싱커를 던지지 않기로 했다. 주어진 투구수 40개 중에서 싱커는 빠져 있다.
“아. 덥다.”
플로리다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야구를 하는 게 때로는 곤혹스럽기도 하다. 스프링캠프처럼 낮 경기를 할 때는 특히 그렇다. 지금만 해도 좌완 투수인 지혁의 정면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 3구, 몸 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 오. 몸에 맞았군요. 첫 타자에게 몸에 맞는 공을 허용합니다. ]
[ 지금 공은 커브처럼 보이네요. 슬라이더라고 하기엔 낙폭이 큽니다. 저런 공은 저번 시즌에는 던지지 않았었죠. ]
[ 새로운 무기를 시험하고 있나요? 어쨌든 노아웃에 주자 1루입니다. 2번, 제이슨 닉스.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작년까지 더램 불스에서 뛰었죠. ]
초구와 2구는 패스트볼. 좌타자에게서 가장 먼 곳에 박히는 공 두 개가 스트라이크 선언을 받았다. 3구째 커브가 원바운드로 떨어지면서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지혁은 다시 한 번 커브 그립을 쥐었다.
[ 4구, 때립니다. 깎여 맞은 타구가 애매한 위치에 높이 떠오릅니다. 유격수 이형진이 따라붙고, 좌익수도 내려오는데요... ]
[ 음, 안 좋네요. ]
[ 사이에 뚝 떨어집니다. 노아웃에 주자 두 명이 들어찹니다. 빗맞은 타구였습니다. ]
[ 이번 공도 커브였어요. 높은 쪽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공이었는데요. 닉스 선수가 배트 컨트롤을 잘 하면서 끝까지 따라붙었네요. ]
출발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제구도 아직 덜 잡혔는데, 운까지 따르지 않는 경기였다.
*
“루크, 커브!”
“오케이.”
여전히 더블 A팀인 몽고메리 비스킷츠에서 한 시즌을 더 보내게 생겼지만, 메일리는 이번에도 스프링캠프에는 합류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지혁과 메일리는 마치 흔들리던 팔을 멈춰놓기 위해 계속해서 던지던 그 때처럼, 커브를 주고받았다.
“굿 볼. 지금 공은 좋았어. 이대로 감 잡으면 되겠다.”
“실전에서도 이렇게만 들어가면 참 좋을 텐데.”
“욕심도 많네. 이제 막 던지기 시작한 공이라며.”
“그건 그래도. 당장 쓰려면 모자라잖아.”
지혁은 애꿎은 마운드의 흙만 툭툭 걷어찼다. 첫 번째 재능을 받았던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압박감도 달랐다. 신인왕을 수상하지 못하면 소모해야 할 선수 생명이 무려 4년이다. 어느 때보다도 강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다.
“넌 너무 쫓기는 것처럼 보여.”
메일리는 특유의 곰 같은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며 마운드로 올라왔다. 마스크를 벗으니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몽고메리에 있을 때도 그랬어.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누가 널 잡아먹을 것처럼.”
“그래?”
“어. 넌 되게... 뭐랄까, 급하다고 해야 하나? 당장 결과를 내지 못하면 안 되는 사람 같아. 투구폼에 안 좋은 버릇이 있는 걸 잡아내겠다고 하루에 네다섯 시간씩 쉐도우 피칭만 하고. 그 폼을 비디오로 녹화해서 하루 종일 돌려보고.”
여유를 가질 틈이 없으니까. 지혁은 볼멘소리로 대답하려던 것을 참았다.
“하긴, 그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빨리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끔 안쓰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 조금 여유를 가지면 좋을 것 같은데 말야.”
“... 그럴 시간이 없어.”
“아직 넌 24살밖에 안 됐잖아? 부상당하지 않으려고 몸 관리도 철저하게 하는 놈이. 앞으로 야구를 10년은 더 할 건데, 마음을 조금 편하게 먹지 그래?”
“흐. 고맙다. 걱정해 줘서. 그래도 그럴 수는 없어.”
“뭐. 마이너리그에서 구르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 내가 너한테 배웠으면 배웠지, 조언해 줄 처지는 아니니까.”
메일리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났는지 깊은 숨을 내쉬며 프로텍터를 휙휙 벗어제끼기 시작했다.
“내일도 받아줘라.”
“... 그래. 너처럼 지독하게 해야 메이저리그도 밟는 거지.”
메일리의 자조적인 넋두리에서 정체된 마이너리거의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지혁은 신인왕이라는 타이틀에 선수 생명이 걸려 있고, 메일리는 몇 년만 더 정체되면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하고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지혁도, 메일리도 모두 씁쓸하게 웃었다.
*
시즌이 가까워올수록 언론들의 예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만년 꼴지 후보였던 탬파베이 레이스가 성장한 이래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언제나 그랬듯 혼돈의 정점이다.
특히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약해진 것이 거기에 부채질을 했다. 대형 계약을 맺은 스타들의 부진과 어설픈 리빌딩 기간이 맞물리며 애매한 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반면 상대적 약체였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러쉬’를 계속했다.
“ESPN쪽 시즌 순위 예상이네요. 보스턴-토론토-볼티모어-뉴욕-탬파베이.”
“이번 BP. 토론토-탬파베이-뉴욕-볼티모어-보스턴이에요. 이건 좀 희망적이네.”
“재밌네요. 이건 FOX 스포츠에요. 볼티모어-토론토-보스턴-뉴욕-탬파베이.”
패트릭과 연두는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온 기사들을 수북이 쌓아 놓고 점검 중이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가 정말 ‘헬’이긴 하네요. 모든 팀이 다 1위 후보기도 하고, 또 모든 팀이 다 꼴지 후보기도 하네요. 뭐 이래.”
“지옥 같은 곳이지. 후. 그나저나 연두 넌, 문이 던지는 커브 좀 봤어?”
“전 봐도 잘 모르겠어요. 맨날 관중석에서 보다가 직접 던지는 걸 보려니까 적응이 잘 안 돼서... 바로 옆에서 보니까 정말 순식간에 휭 지나가더라구요. 커브인데도.”
“그렇지. 운동선수들은 괴물이야. 커브가 제일 느린 변화구에 속하는데도 75마일 정도는 나오니까. 75마일로 달리는 차에 받히면 그대로 죽는데 말이지.”
“그러니까요. 그 사이에서 아주 조금의 차이를 잡아내야 하니까. 참. 그냥 팬일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욕하기 바빴는데. 헤헤.”
“문이 말하기로는 네가 준 자료를 보고 영감을 좀 받았다는데? 맞아?”
“네. 후지 미유타라고, 일본에서 뛰는 선수 커브를 보고 저거다 싶었대요. 그래서 열심히 뒤져봤죠. 후지라는 선수가 자기가 커브를 어떻게 던지는지 동영상으로 설명해 놓은 자료가 있더라구요. 그걸 한 번 대충 보더니 감 잡았다고 하고 나가더니 던지기 시작했어요.”
패트릭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툭 던져주면 잘 받아들이는 천재과 선수는 아닌데. 어쩔 때는 이상하리만치 천재 같단 말이지. 싱커도 그랬고...”
“어, 이건 지혁이 이름이 딱 나와 있네요.”
“뭔데?”
“FOX 스포츠요. 에디터는 샘 호킨스. 제목이...”
- ‘안개 속’ AL 동부지구. 탬파베이의 생존을 위한 키 포인트 3가지.
- 2015년 3월 29일. FOX 스포츠, 에디터 샘 호킨스.
시즌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도 ‘혼돈의’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여전히 그대로다.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데릭 지터를 떠나보낸 뉴욕 양키스, 재작년 우승 팀에서 작년 리그 꼴지로 추락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반등이 필수적이다. 17년만의 지구 1위를 달성한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여전히 강력하고,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통 큰 영입’을 이어가며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이런 팀들 사이에서 탬파베이 레이스는 완전히 새로운 팀으로 거듭났다. 그 동안 팀의 뿌리이자 중심이었던 앤드류 프리드먼과 조 매든이 팀을 떠났고, 대변혁이 일어났다. 맷 실버맨 사장과 ‘미친 들소’ 대니 랭카스터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팀으로 거듭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다. 이번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거치면서 탬파베이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것도 완전히, 모든 부분에서.
탬파베이 레이스의 2015 시즌은 그동안 상상할 수 없던 모습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의 프런트 오피스의 무브, 시범경기에서의 모습 등을 놓고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 포인트에 대해서 소개한다.
“이 사람도 참 집요한 사람인데.”
“아는 사람이에요?”
“문이 더블 A에 있을 때부터 단단히 꽂힌 사람이거든. 계속 따라다니고 있지.”
“그렇구나아.”
“그래서 세 개의 포인트가 뭐래?”
“첫 번째는 단합이래요.”
- 첫 번째 포인트, 단합. 대니 랭카스터 감독은 팀 케미스트리를 상당히 중요시한다. 스프링캠프 첫 날부터 랭카스터 감독이 모든 선수들에게 주입시킨 것도 팀 케미스트리였다.
시범경기 내내 탬파베이의 선수들은 더그아웃에서 좀처럼 가만있지를 못했다. 안타를 쳐서 1루에 진출하면 곧장 더그아웃을 향해 세레머니를 날렸다. 투수들은 중요한 상황에서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는 훨씬 더 큰 액션을 취하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고, 세레머니를 한다. 이것은 팀의 단합을 강조하는 랭카스터 감독의 지론과 맞아 떨어지는 모습이다.
지난해까지의 탬파베이는 샤이(Shy)한 팀이었다.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이런 모습은 상대를 자극하거나 불필요한 잡음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게임이 안 풀렸을 때 분위기가 확 쳐지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작년 시즌 초반의 무기력했던 탬파베이를 떠올리면 된다.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거의 고요한 클래식 콘서트장 같았다.
랭카스터는 이런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그는 ‘볼넷이나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더라도 선수들에게는 홈런을 친 것과 같은 액션을 주문했다. 우리 스스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플레이가 나오니까.’라고 언급한 바 있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는 달라지긴 했지.”
“지혁이도 가끔은 신나 보이더라구요. 별 것 아닌 플레이를 하고도 세레머니를 하는데. 쟤가 저런 면이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인데. 이런 분위기도...”
“그리고 여기서 지혁이 이름이 나와요. 두 번째.”
- 두 번째 키워드는 ‘신인들의 성장’이다. 탬파베이 레이스는 늘 어린 팀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력이 전성기로 다다르는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고 유망주를 받아왔으니까. 프리드먼 시대부터 시작한 그 기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번 시즌 탬파베이는 몰리나, 페랄타, 조브리스트, 조이스 같은 나이가 있는 선수들을 팔고 유망주들을 데려왔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선수들의 활약은 필수적이다. 특히 올해 성적이 기대되는 선수들이 몇 명 있다. 그 중 제일 선봉에 선 선수는 팀의 다섯 번째 선발 로테이션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는 문지혁이다.
“샘 호킨스라는 이 사람은 정말로 문을 좋아하는 친구지.”
패트릭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