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71화 (72/204)

< 71 - 시즌 첫 경기. >

[ 개막시리즈 2차전. 1회초 경기가 시작됩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투수, 문지혁 선수입니다. 루키인데 두 번째 경기에 선발로 올라옵니다. ]

[ 랭카스터 감독이 의외의 결정을 내렸죠? 콥 선수의 손가락에 작은 물집이 잡혔는데, 이 자리에 문지혁 선수를 투입했습니다. ]

[ 랭카스터 감독은 스마일리와 오도리찌가 시범경기 등판 일정에 맞춰서 몸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페이스가 안 맞았다고 말했습니다. 자. 과연 오늘은 탬파베이가 어떤 경기를 보여줄지 궁금하네요. 스프링캠프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슈를 만들어냈습니다. ]

[ 그렇죠. 아무래도 팀이 완전히 바뀌었다 보니까요. ]

[ 볼티모어의 첫 타자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알레한드로 데아자. 어제 경기에서 홈런까지 때려내며 활약했습니다. ]

첫 타자인 데아자는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서는 좌타자였다. 지혁은 이례적으로 빈자리보다 가득 찬 자리가 더 많은 2층 관중석을 한 번 훑어보다가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싱커 그립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한 시즌을 시작하는 첫 경기, 초구. 가장 자신있는 공을 던지는 게 당연하다.

[ 초구,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싱커. 스트라이크입니다. ]

[ 무브먼트가 좋네요. 역시 싱커의 움직임은 아주 훌륭합니다. ]

[ 90마일짜리 공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문. 작년에 이 싱커로 재미를 꽤 봤습니다. 2구입니다. 바깥쪽 빠지는 볼. ]

지혁은 패스트볼을 던지고 고개를 돌려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했다. 91마일. 최고구속까지는 아니지만 평균구속까지는 끌어올렸다. 시즌 개막에 맞춰 컨디션을 서서히 끌어올린 보람이 있다. 이런 노하우라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은 지혁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3구째 던진 패스트볼이 몸쪽 무릎 높이를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박힌다. 심판이 잠시 움찔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손을 들어 스트라이크 콜을 보냈다.

‘좋아. 이 공 잡아주면 싱커 쓰기에 아주 좋지.’

리베라도 곧장 싱커 싸인을 보내 왔다. 방금 전 무릎 높이의 공을 봤으니, 여기서 떨어지는 공에는 무조건 배트가 따라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제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무릎을 들었다가 앞으로 쭉 내뻗으며 던지는 순간에 팔꿈치를 바깥으로 틀었다. 두 손가락이 실밥을 강하게 때리는 게 무브먼트도 끝내줄 것이다.

따악!

[ 4구, 데아자가 퍼올립니다. 높이 뜹니다. 우익수, 스티븐 수자가 옆으로 이동하면서... 라인 근처에서 잡아냅니다. 원 아웃. ]

때려냈다. 물론 빗맞은 타구였다. 하지만 데아자의 방금 그 스윙은 그야말로 골프를 치는 듯한 극단적인 어퍼 스윙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한참 아래의 공을 퍼올린 것이다.

‘거의 발목 앞에서 때린 것 같은데?’

지혁은 벤치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랭카스터와 힉키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랭카스터가 그랬었다. 어제 홈런을 때린 녀석들은 어퍼 스윙에 집착할 거라고. 데아자가 바로 어제 홈런을 때려낸 타자였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선수, 2번 타자 스티븐 피어스. 공교롭게도 이 녀석도 어제 홈런을 때린 타자다.

리베라는 싸인을 보내기 전 벤치 쪽을 한참 보더니 높은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지혁은 초구를 가슴 높이로 향하는 바깥쪽 존에 꽂아넣었다.

“스트라이크! 원!”

심판이 힘차게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외친다. 하지만 정작 반응을 보여야 했던 피어스는 아예 타격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꿈쩍도 않았다. 2구째, 그것보다 볼 반 개 정도가 더 높은 쪽으로 향한 공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짜로 낮은 공만 노리고 있나?’

눈높이로 오는 먹음직스러운 패스트볼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낮은 공을 노리고 있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 타자는 스윙을 하고 싶은 카운트. 지혁은 계속해서 높은 쪽 공을 요구하는 리베라의 싸인에 고개를 저었다.

‘싱커야.’

확인을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지혁은 싱커를 땅에 쳐박아버릴 생각을 했다. 아예 원바운드가 될 정도로 낮게 던져보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알 수 있으면서 확신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3구, 때립니다. 파울인가요? 파울이군요. 홈플레이트를 때렸습니다. ]

[ 볼티모어 타자들이 문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나온 것 같습니다. 낮게 떨어지는 공에는 어김없이 스윙이 나오고 있네요. 방금도 거의 원바운드로 떨어지는 공인데 자세가 무너지면서도 스윙을 했어요. ]

[ 그렇군요. 싱커에 대해 분석을 충분히 하고 나온 모양입니다. ]

캐스터와 해설자도 눈치 챈 것을 현장의 선수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방금의 3구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낮은 공, 그리고 거기서 낮게 휘어지는 싱커. 지난 시즌 지혁의 필승 패턴이었던 코스를 확실하게 노리고 나온 것이다.

“이러면 커브를 안 던질 수가 없겠네.”

지혁은 껌을 우물거리면서 혼자 되뇌었다. 랭카스터의 말이 맞다. 홈런을 쳤던 타자들은 극단적으로 어퍼 스윙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 볼티모어의 ‘뻥타선’은 작정을 하고 나온 모양이다.

리베라가 검지와 새끼를 펴서 싱커 싸인을 보내자 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리베라가 곧장 검지와 중지로 싸인을 바꾸었다. 커브. 지혁은 곧장 와인드업 자세에 들어갔다. 타이밍에 맞춰 피어스도 어깨에 걸쳐 놓은 방망이를 흔들며 지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높은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처럼. 한복판이어도 괜찮아. 오히려 조금 높을수록 좋아.’

커브가 들어가야 할 쪽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린다. 마지막 순간 엄지로 공의 아랫부분을 튕겨 올리는 순간까지도. 그리고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살짝 치솟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다가,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존 안으로 정확하게 떨어지는 공이다.

[ 네 번째 공, 스윙! 스티븐 피어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문. 방금 공은 커브였죠? ]

[ 그렇습니다.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았네요. 싱커 쪽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한복판에 정확하게 떨어지는 공이었는데도 어중간한 스윙이 나오고 말았군요. ]

[ 지금은 어떻게든 커트라도 해 보려는 스윙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커브가 이미 리베라의 미트에 박힌 뒤였습니다. 스타트가 아주 좋네요, 문. ]

“그래! 바로 그거야!”

“예에쓰! 나이스 피칭!”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놀랍게도 가장 앞에서 지혁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은 랭카스터 감독이었다. 커다란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치면서 이쪽을 가리키는 게 마치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들소 같아 보였다.

“헤이, 문. 집중해!”

롱고리아가 내야를 한 바퀴 돌린 공을 지혁에게 돌려주며 주의를 주었다. 자꾸만 벤치 쪽으로 눈이 돌아가는 것을 억지로 그만두면서 타석에 들어서는 트래비스 스나이더를 바라보았다. 어제 경기 5타수 4안타를 때려낸 선수였다.

따악!

놀라운 타격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초구에 던진 바깥쪽 꽉 찬 싱커를 제대로 된 타이밍으로 밀어낸다. 우익수 쪽 파울 라인을 벗어나는 타구였지만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다.

‘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나 보네.’

마지막 순간에 휘어지는 무브먼트가 예사롭지 않은 싱커였는데도 끝까지 따라가서 정확하게 배트에 맞춰낸 타격감. 심상치 않은 이런 타격감 앞에서는 커쇼가 와도 위험하다. 지혁은 최대한 조심스러운 피칭을 했지만, 몸쪽으로 바짝 붙은 공을 억지로 때려낸 트래비스의 타구가 지혁의 옆을 스치며 중견수 앞으로 흘러나가 버린다.

[ 2아웃에 1루가 됩니다. 스나이더의 중전 안타. 4번 아담 존스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

볼티모어의 캡틴인 존스는 위협적인 연습 스윙을 돌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존스는 팔이 길어 낮은 공도 잘 때리는 타자다. 지혁과 리베라는 초구부터 과감하게 높은 쪽 패스트볼을 찔러넣었다.

[ 원 스트라이크 투 볼. 공 세 개가 모두 높은 쪽에 형성되고 있습니다. ]

[ 저번 시즌과는 확실히 달라진 레퍼토리가 보입니다. 스프링캠프 내내 이런 투구 패턴을 시험하는 듯한 모습이었거든요. 피어스를 삼진 처리했던 커브를 장착한 데서 오는 자신감인 것 같네요. ]

[ 네 번째 공, 스트라이크. 한복판에 커브입니다. 방금 이 공이군요. 이 커브. ]

[ 그렇습니다. 높은 쪽 존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가 떨어지죠. ]

존스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며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다. 마운드에서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혁은 확실히 자신감을 얻었다. 랭카스터가 한 말이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이 커브는 생각보다 더 체감이 좋은 공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커브가 날카롭게 떨어지면 패스트볼에 반응이 늦을 수밖에. 방금 전에 보여준 커브가 떨어지는 지점에서 떨어지지 않고 존 높은 쪽으로 밀려들어간 패스트볼. 아담 존스의 스윙이 늦었다.

지혁은 왼손으로 허공을 한 번 내리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커브. 이 새로운 옵션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한다는 자신감을 가득 채운 채로.

*

[ 오늘 경기, 두 아시아의 좌완 투수가 팽팽하게 맞붙고 있습니다. 탬파베이의 문, 5이닝 동안 매니 마차도에게 맞은 솔로 홈런이 실점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볼티모어의 첸 웨이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로건 포사이드의 투런 홈런을 제외하고는 점수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6회초로 접어듭니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문. 타석에는 1번, 데아자. ]

[ 문지혁 선수에게는 이번 회가 위기입니다. 상위 타선이고, 이제 세 번째로 공을 보거든요. 어느 정도 눈에 익었을 겁니다. ]

[ 불펜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스티븐 겔츠가 불펜에 있군요. 현재까지 투구수는 77개입니다. 오늘 2타수 무안타의 알레한드로 데아자. 초구를 그냥 보냅니다. 한복판에 들어가는 커브. ]

“좋아, 아직 살아있네!”

2루수로 나선 포사이드가 끊임없이 뒤에서 지혁을 격려해 준다. 매 경기 끝날 때마다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는 친구다. 덕분에 마운드에서 한결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다.

지혁은 첫 타석에서 낮은 공을 퍼올렸던 데아자의 타격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초구에 던진 커브도 한가운데로 들어갔지만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도 낮은 공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투구수가 80개 정도 됐으니까... 서서히 맞춰 잡는 쪽으로 가야겠다.’

이제는 배트에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투구수를 절약하려면 노리고 있는 낮은 공을 적당히 던져주는 것도 방법이니까.

타악!

아니나 다를까. 바깥쪽 낮은 쪽에 형성된 싱커가 들어오자 데아자가 엉덩이를 빼면서 툭 가져다 댔다. 타구가 애매한 쪽으로 흘렀다. 유격수가 잡기에는 조금 깊은 코스.

[ 3-유간 깊은 코스, 롱고리아가 달려들어오며 커트합니다... 그리고 1루로! 와우! 엄청난 어깨입니다, 에반 롱고리아! ]

[ 하하. 대단하네요. ]

[ 과연 골드글러브 수상자답네요. 대단한 수비를 보여줍니다. 송구하기 전까지 스텝이 조금 꼬이는 것 같았는데 빠르게, 또 강하게 송구를 해내네요. ]

[ 지난 이닝에 마차도가 멋진 다이빙 캐치를 보여줬었는데, 마치 보라는 듯이 롱고리아도 해내네요. 3루수 경쟁도 대단합니다. ]

더그아웃이 난리가 났다. 아처를 중심으로 한 어린 선수들이 난간을 탕탕 때리며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다 질러댄다. 롱고리아도 더그아웃을 바라보며 검지를 한 번 들어보인다.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 세레머니를 적극 권장한 랭카스터 감독 덕분이다.

두 번째 타자인 스티븐 피어스는 존에서 낮게 떨어지는 커브를 크게 들어올렸다. 타구에서는 빗맞은 소리가 났는데, 공이 제법 멀리 뻗는 게 불안했다. 하지만 중견수 키어마이어는 엄청난 거리를 따라가 펜스 앞에 손을 대고는 공을 안전하게 잡아냈다. 투 아웃.

[ 첫 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냈던 트래비스 스나이더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7타수 5안타. 대단한 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

[ 방망이에 제대로 불이 붙어 있죠. ]

평소 같았으면 크게 위압감이 드는 타자는 아니었지만, 오늘의 스나이더는 미겔 카브레라 같은 압박을 뿜어내고 있다. 아주 살짝이라도 삐끗하는 공이 나오면...

‘이런!’

싱커를 마지막에 긁어내는 순간 살짝 빠졌다. 실밥을 때리는 힘이 밋밋했다. 차라리 바깥으로 완전히 빠지는 공이면 좋았을 것을. 존 가운데서 한 개 정도 바깥쪽에 형성된 공이 딱 봐도 허술하게 날아갔고, 초구부터 휘둘러져 나온 스나이더의 방망이에 맞으며 통렬하게 외야로 향해나간다.

[ 우측! 깊숙하게 날아갑니다! 펜스 근처... ]

지혁은 간절하게 우측 펜스를 돌아보았다. 동점을 주기 싫어. 넘어가지 마!

그리고 그 때 우측 외야를 담당하던 뉴 페이스, 스티븐 수자 주니어가 날아올랐다.

[ 잡아냅니다! 잡아냈습니다! 스티븐! 수자! 주니어! 엄청난 캐치입니다! ]

뒤로 달려가면서 점프한 수자 주니어가 펜스에 부딪혀 넘어져 구르면서도 공을 꽉 움켜쥔 글러브를 번쩍 치켜들었다.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지혁은 두 손으로 뒷목을 감싸안으며 소리쳤다.

“오 마이 갓!”

더그아웃의 모든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난간을 넘어 뛰쳐 나온 선수들도 모두 같은 자세로 다 같이 소리치고 있었다. 트로피카나 필드를 메운 관중들도 모두 같은 자세로 외야에서 몸을 일으키는 수자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거야! 허슬!”

랭카스터의 우렁찬 외침도 그라운드를 쩌렁쩌렁 울렸다. 6이닝 1실점. 투구수 84개. 4피안타 1피홈런. 삼진 3개. 스티븐 수자 주니어의 슈퍼 캐치와 함께 6회를 끝낸 시점에서 지혁은 승리투수 요건을 갖춰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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