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72화 (73/204)

< 72 - 상황이 안 좋아야 영웅이 나타난다. >

랭카스터는 10년 만에 메이저리그로 돌아온 감독이었다. 팻 버딘의 안면에 주먹을 날려 그 못생긴 코를 완전히 부러뜨려 버린 이후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전전하며 아마추어 리그에 몸을 담았다.

물론 아마추어 리그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무대에서 펼쳐지는 야구는 승부와는 거리가 멀 때가 간혹 있다. 야구를 업으로 삼아야 할 선수들에게 출전 시간을 고르게 분배해야 할 때도 있고, 학점이나 개인사 같은 문제로 꼭 필요한 선수들이 꼭 필요한 시점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있다.

메이저리그는 그런 것이 없다. 엄청난 재정과 수많은 선수들이 있다. 당장 가용 가능한 인원만 해도 40명이다. 메이저리그의 승부는, 이 선수들을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가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온전히 감독의 능력에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랭카스터에게 ‘감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장의 감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지만, 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곤 한다. 지금처럼.

[ 7회초, 여전히 승부는 한 점 차. 마운드에 에르네스토 프리에리가 올라왔습니다. ]

[ 음. 일찍 바꿨네요. 투구수가 84개... 아직 여유가 있다고 봤는데요. ]

[ 선택은 불펜이었습니다. 랭카스터 감독의 투수 교체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궁금해지는군요. ]

지혁은 왼쪽 어깨에 시원한 아이스 팩이 들어간 천을 칭칭 덧대 감고 더그아웃에 앉았다. 어깨는 여전히 괜찮고, 팔꿈치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는 상태였다. 게다가 올해만큼은 부상의 위험에서도 자유롭다. 하지만 다시 마운드에 올라갈 수는 없다.

힉키 코치가 6회 마운드에서 내려온 직후 교체를 알려주었다. 그뿐이었다.

“어-어...”

아담 존스는 타석에 들어서서 공 한 개도 보지 않았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제대로 노렸다. 프리에리의 99마일짜리 패스트볼이 한복판으로 들어갔고, 존스의 방망이는 호쾌하게 돌아갔다.

[ 좌측으로 깊게. 이 타구는 넘어갔군요. ]

[ 의심의 여지가 없죠. ]

[ 트로피카나 필드 2층에 떨어지는 엄청난 홈런입니다. 아담 존스의 시즌 첫 번째 홈런. 이 타구로 게임은 다시 동점이 됩니다. 스코어는 2대2.]

더그아웃의, 트로피카나 필드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

- 문지혁, 2015시즌 첫 등판 6이닝 1실점 호투... 팀은 역전패.

연두는 한국의 포털사이트와 야구 커뮤니티를 둘러보다가 결국 창을 닫아버렸다. 지혁의 호투를 칭찬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태도는 명백하게 달랐다. 랭카스터 감독의 투수 운용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투구수가 84개밖에 되지 않는데 대체 왜 일찍 지혁을 내린 것인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인신공격과 욕설은 덤이고.

“대체 한 경기 가지고 사람을 죽일 것처럼 달려드네. 이 사람들 랭카스터 감독 앞에 서면 눈도 못 마주칠 텐데. 어휴.”

지혁의 선발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 중 한 명이 아쉬운 소리를 조금 한 모양이었다. 랭카스터 감독의 투수 운용은 물론이고 2,3루 기회를 놓친 존 제이소, 심지어 1,3루 기회를 놓쳤던 에반 롱고리아에게도 날선 비난이 이어졌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이 워낙 한국에서 인지도가 적었던 팀이기에, 프랜차이즈 스타고 나발이고 없는 모양이었다. 지혁을 도와주지 못하면 그 즉시 죽일놈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날선 반응은 미국의 팬 포럼도 마찬가지다. 대니 랭카스터 감독은 덩치만 큰 멍청이라는 반응은 1분 동안 서른 개도 넘게 찾아낼 수 있었다. 프리드먼이 떠난 이후 실패와 착각을 이어오고 있다는 조롱도, 앞으로 다시 암흑기가 찾아올 거라는 저주도 있다.

“시작이 좋지 않네...”

한국에서는 시작이 반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만약 그런 의미에서만 이번 개막 시리즈의 결과를 보자면, 탬파베이의 ‘반’은 최악에 가까운 결과였다. 에이전시에서 일하게 되면서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야구와 야구 산업 전반을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연두는 여전히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구단의 팬이었다. 아쉬운 한숨이 사무실을 떠다녔다.

*

볼티모어와의 개막 시리즈에서 1승 2패. 그리고 이어진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첫 번째 인터리그 시리즈에서도 1승 2패. 토론토와의 원정 시리즈에서도 1승 3패로 무너졌다. 시즌 첫 열 경기가 초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탬파베이의 분위기는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셈이다. 3승 7패.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날 때는 보통 겹쳐서 오기 마련이다. 탬파베이가 자랑하던 선발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투수조 조장인 알렉스 콥의 손가락 부상이 조금 길어지면서 4월에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드류 스마일리도 가벼운 어깨 통증에 개인사가 겹쳐 두 경기를 모두 건너뛰었다.

크리스 아처가 팀의 에이스라는 호칭을 얻을 만큼 위력적인 투구를 보여주며 두 개의 승리를 챙겨냈고, 제이크 오도리찌가 작년보다 나은 성적으로 초반을 버티고 있는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지혁은 두 번째 경기에서 마이애미 말린스의 타선을 상대로 5.1이닝을 2실점으로 막았지만, 결과는 노 디시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경기도 에르네스토 프리에리의 블론이었고. 프리에리는 개막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트리플 A로 내려가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그랜트 발포어라는 노장 불펜투수는 지명할당 되어버렸다. 열 경기 만에!

랭카스터 감독의 불펜 선택이 기자들의 집중 타겟이 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탬파베이의 선택을 비웃는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미디어에 대한 악감정이 심한 랭카스터 감독은 갈수록 언론을 상대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도박사들은 그가 언제 기자들 중 한 명을 때려눕힐 것인지를 놓고 내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좋지 않을 때, 팀을 추스르는 역할을 해 줘야 하는 사람이 케빈 캐쉬 벤치코치다.

“아직 시즌은 길어. 괜찮아.”

캐쉬 코치는 하루 종일 괜찮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았다. 투수조와 야수조를 오가며 눈 먼 농담을 걸기도 하고, 초반 부진한 성적에 괴로워하는 선수들을 다독이기도 한다. 마땅히 해야 할 플레이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랭카스터 감독에게 따끔한 지적을 들은 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도 캐쉬의 역할이고.

하지만 그런 캐쉬 코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 땅에 쳐박힌 팀 분위기가 쉽게 올라오지는 않았다. 뉴욕 양키스와의 홈 시리즈 첫 경기. ‘악의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탬파베이가 상대하기에는 벅찬 감이 있었다.

[ 잘 맞았습니다! 뒤로! 키어마이어가 점프합니다만 펜스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갑니다! 오늘 경기 두 번째 홈런, 에이로드. ]

맷 안드리스의 메이저리그 선발 데뷔전은 40살의 에이로드에게 처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2이닝만에 홈런 두 개를 내주며 5실점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트리플 A에서 대거 수혈한 불펜진이 힘을 내며 나머지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는 것. 그리고 타선이 어거지로 넉 점을 짜내며 5대4까지는 추격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2차전. 시즌 초반 3연패와, 3승 8패라는 최악의 부진에 빠진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로 지혁이 출격을 대기하고 있다.

*

“오늘 부담이 꽤 클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평소랑 다를 건 없어요.”

경기 시작 전 기자들과의 인터뷰 시간. 랭카스터 감독에게 우루루 몰려들었다가 짧은 단답형 대답들만 잔뜩 듣고 지혁에게 몰려든 미국 기자들에 둘러싸인 탓에, 예은의 친절한 질문에도 본능적으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날아갔다.

“음... 우리 인터뷰는 경기 끝나고 해요! 파이팅해요. 꼭 이겼으면 좋겠네.”

예은은 신경이 곤두선 지혁의 마음을 알아본 것인지 더 이상 달라붙지 않고 마이크를 거둬들였다. 여러모로 부담이 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지명할당 된 선수까지 나오는 뒤숭숭한 팀 분위기. 안 좋은 결과에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기자들과 팬들.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과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루키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혁은 루키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아주 익숙했다. 메이저리그에서 강팀에 몸담고 있지 않는 한 늘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혁은 오히려 오늘의 선발 등판에서 이런 점을 조금 이용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심하게 부담을 받는 척 하며, 신경을 곤두세운 척 하며 인상을 쓰고 라커를 돌아보았다.

‘어디 보자...’

라커룸 안의 분위기가 꽤 싸늘해졌다. 모든 선수들이 안 좋은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집중해야 하는데, 먹잇감을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지혁은 기자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려고 커다란 헤드폰으로 귀를 덮어버리고 비디오 룸으로 향했다.

“후우우.”

“어, 보스?”

불도 켜 놓지 않고 혼자 앉아서 비디오를 돌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랭카스터 감독이었다.

“문? 왜 여기로 왔지?”

“음, 아마... 감독님과 같은 이유로요.”

“도망이군. 좋아.”

“집중 때문이라고 하죠.”

랭카스터는 억지로 픽 웃어보는 것 같았다. 지혁은 그 때 처음으로 이 무섭게 생긴 사람에게 친근감이나 동정심 같은 것을 느꼈다.

“...”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지만, 지혁은 랭카스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기자들로부터 도망치는 감독들은 많이 봐 왔으니까. 덩치는 사람보다는 괴물에 조금 가까워 보이지만, 랭카스터도 사람이라면 아마 그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감독들은 그런 족속이니까. 시즌은 길다고 그렇게 선수들에게 주입하면서도 한 경기 한 경기의 결과에 모든 것을 올인해야 하는 사람들.

랭카스터가 가끔 몸을 뒤척거릴 때 나는 의자의 끼익대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비디오 룸 안의 공기가 어색하다. 랭카스터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지혁은 한참을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경기는 쉽지 않을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흐음-. 오랜 침묵을 깨고 랭카스터가 말을 걸더니, 한숨인지 한탄인지 모를 묘한 숨소리를 낸다.

“지금까지 네게 많은 이닝을 허락하지 않았지.”

“두 경기였을 뿐입니다. 다 이유가 있으셨겠죠.”

“물론. 시즌 초반이라 투구수를 많이 주고 싶지는 않았네.”

“...”

지혁은 아처와 오도리찌를 떠올렸다. 첫 등판에서부터 투구수 100개를 넘겼었다. 둘 모두.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직 자네를 완전히 못 믿고 있다고 해야겠지. 내가 본 건 스프링캠프에서의 피칭이 다였으니까. 게다가 경력이 오래된 것도 아니고. 솔직하게 말이야.”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오늘은 마음껏 한 번 던져 봐.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루키들은 부담을 덜 받곤 하니까. 그래서 나는 대학 시절 중요한 경기에서 신입생들을 투입하기도 했었어.”

“으음...”

조금은 날 선, 공격적인 말이었다.

새로 팀에 부임한지 갓 두 달. 충분히 선수들을 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스프링캠프 성적이 좋다고 할 수 없었던 아시아의 루키. 잠시 생각해보면 랭카스터가 지혁을 완전히 믿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감독님.”

“얘기해.”

“원래 영웅은, 어려울 때 나타나는 법입니다.”

으, 오글거려.

지혁은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40살에 가까운 나이를 살아오면서 깨달은 게 있다. 가끔은 이렇게 오글거리는, 철없어 보일 정도로 직접적인 멘트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된다는 사실.

“흐흐흐.”

랭카스터가 쓴웃음 같이 느껴지는 소리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영웅이라면, 나도 널 믿어보도록 하지.”

지혁은 밖으로 나가는 랭카스터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자괴감을 읽어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경기로 믿게 하면 될 일이다. 시즌 초반에 감독의 신뢰를 얻어내는 건 한 시즌 내내 지혁을 지지해 줄 중요할 일이기도 하다. 이번 경기는 중요했다. 매우 여러 가지 이유로.

*

- 경기 시작함? 이제 일어났는데ㅠㅠ ? ㅇㅇ. 문지혁 1회 출발 아주 깔끔했음. 삼진-삼진-2땅.

? 엘스버리 삼진잡은 커브 개쩔어요. 오늘 컨디션 엄청 좋은 듯!

- 뭐야 이거. 라인업 이제 확인했는데 유격수 이형진임? 선발이라고?

? ㅇㅇㅇ 메이저 데뷔 첫 선발출장이라고 함. 방송사만 개이득 봤음ㅋㅋㅋ - 다나카도 공 개쩌네... 스플리터 미쳤다 미쳤어. 역시 일본은 투수 잘 키움. 사이영 각이다 이거.

? 일뽕 새끼 출현했네 또. 개쩔긴 뭐가 개쩜? 탬파베이 물타선 상대로 던지는 거 보고 설레발 보소.

? 다르빗슈 사이영 안줬다고 어그로 끌던 놈임. 걍 차단하세요.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는 메이저리그 시즌 12차전이 시작되었고, 한국의 야구 커뮤니티는 새벽 같이 일어난 사람들의 키보드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투수는 미니멈 연봉을 받는 루키 문지혁이었고, 뉴욕 양키스의 선발투수는 2천 2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에이스 다나카 마사히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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