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 질 수 없는 승부(1). >
2015년 4월 18일, 트로피카나 필드.
원정팀 뉴욕 양키스 라인업.
1. 자코비 엘스버리 CF
2. 브렛 가드너 LF
3. 알렉스 로드리게스 DH
4. 마크 텍세이라 1B
5. 브라이언 맥캔 C
6. 크리스 영 RF
7. 체이스 헤들리 3B
8. 스테판 드류 2B
9. 디디 그레고리우스 SS
P. 다나카 마사히로 (1-1, 7.00) 홈팀 탬파베이 레이스 라인업.
1. 케빈 키어마이어 CF
2. 스티븐 수자 주니어 RF
3. 데이빗 드헤수스 DH
4. 에반 롱고리아 3B
5. 데스먼드 제닝스 LF
6. 앨런 다익스트라 1B
7. 로건 포사이드 2B
8. 르네 리베라 C
9. 이형진 SS
P. 문지혁 (0-0, 2.43)
*
2회초. 마크 텍세이라가 우타석에 들어섰다. 한때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1루수였던 텍세이라. 그도 노쇠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스윙을 크게 가져가며 점점 ‘공갈포’가 되어가고 있다. 굳이 텍세이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양키스의 라인업에 위치한 대부분의 노장 타자들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 헛스윙 삼진.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
[ 이번에는 싱커였네요. ]
[ 아웃카운트 4개를 잡아내는 동안 삼진이 3개입니다. 문. ]
타이밍 싸움. 그리고 볼 배합 싸움. 어떤 재능을 얻기 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버티게 해 줬던 방식.
지혁은 이렇게 붙는다면 어느 경기보다 더 자신 있었다. 싱커와 커브, 그리고 패스트볼을 자유자재로 섞어가며 양키스의 타자들을 농락했다.
[ 두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브라이언 맥캔이 한가운데 커브를 그냥 지켜봤습니다. ]
[ 놀랍네요. 투 스트라이크 노 볼에서 세 번째 공을 한가운데에 집어넣었습니다. 마치 스윙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한 투구였어요. ]
[ 기세를 제대로 타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6번, 크리스 영. ]
엘스버리, 가드너, 텍세이라, 맥캔을 삼진으로 잡아냈다. 크리스 영의 표정에서 알 듯 말 듯한 당황함이 엿보였다.
‘공을 보고 싶긴 한데, 공을 보자니 삼진이 두렵겠지?’
지혁은 리베라가 바깥쪽 경계선에 딱 맞춰 앉는 모양새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인터벌도 없이 던진 초구. 약간 밋밋한 패스트볼처럼 날아가던 공이 마지막 순간에 한 점을 향해 날카롭게 가라앉는다.
두 손가락으로 모두 실밥을 때리는 싱커가 아닌, 애초에 브랜든 웹이 던지던 공대로. 오랜만에 던져본 공이 크리스 영의 배트 밑둥에 빗맞아 튕겨나왔다.
[ 초구를 때려봅니다만 투수에게 그대로 되돌아갑니다. 천천히 걸어가며 여유 있게 1루로 토스하는 문. 완벽한 출발입니다. ]
1루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더그아웃으로 걸어 들어간다.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온 선수들이 우루루 모여 지혁과 하이파이브를 해 주었다. 여러모로 질 수 없는 경기, 시작이 아주 상쾌했다.
“나이스 피칭!”
중견수로 나섰던 키어마이어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글러브로 지혁의 머리를 툭 쳤다. 지혁은 픽 웃으면서도 마운드로 걸어 올라오는 다나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 경기는 초반 스타트를 최악으로 끊은 탬파베이에게, 감독으로써의 능력에 의심을 받고 있는 랭카스터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한국의 팬들이나 관계자들에게는 ‘한일전’이라는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혁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경기다. 오타니 쇼헤이가 미국으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다나카 마사히로가 아시아 최고 투수다. 공교롭게도 첫 경기에서도 대만의 첸 웨이인과 맞붙었었는데, 이번에는 다나카다. 아시아 최고의 투수를 넘어서는 것은 임팩트를 줄 수 있다. 만약 시즌 내내 그런 임팩트를 유지할 수 있다면, 신인왕도 손에 잡힐 것이다.
*
- 아오! 저게 잡히네ㅠㅠ 저걸 잡냐 엘스버리...
? 엘스버리 수비범위는 알아줘야 돼요. 누가봐도 빠지는 2루타였는데...
? 롱고신을 불러들여라 이놈들아ㅠㅠㅠ 물타선 진짜...
- 아니 대체 다익스트라가 왜 6번임? 로니는 뭐함?
? 로니 휴식일임. 지금 1루 백업 볼 수 있는 애가 다익스트라밖에 없음...왜 6번인지는 모르겠음. 돌카스터 선수기용은 노답으로 알아주는 편이라.
? 문지혁 나오는데 공격력 쓰레기로 만들어놨네. 문지혁 뭐 찍힌 거 아님? 저번 경기에도 일찍 내리더니 이번엔 타선을 개판으로 짜 놨네.
? 지금 탬파베이는 누가 들어가도 타선은 안 좋아요. 선수기용 문제가 아닌데요.
? 지랄ㅋㅋㅋ 6-7-8-9 타율 봐라. 2할 넘는 놈이 없는데 무슨.
2회말.
롱고리아가 다나카에게 안타를 때려냈고, 제닝스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다. 노아웃에 주자가 두 명. 하지만 탬파베이의 하위타선은 그 주자를 불러들이지 못했다.
철저하게 지혁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경기를 보는 한국의 시청자들은 벌써부터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가 진행될수록 성토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기 시작했다.
3회.
선두타자 체이스 헤들리에게 우익수 앞 안타를 허용한 지혁은 이어지는 타선을 중견수 플라이-삼진-3루 파울플라이로 깔끔하게 막아냈다. 다나카도 질 수 없다는 듯 이형진-키어마이어-수자로 이어지는 탬파베이의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4회도 마찬가지였다. 브렛 가드너가 유격수로 나선 형진의 다이빙을 살짝 지나쳐 가는 중전안타를 때렸지만,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2루 땅볼로 간단하게 병살 처리했다. 텍세이라는 첫 타석에 이어 또 다시 헛스윙 삼진 처리다.
[ 아시아의 두 선발투수가 멋진 투수전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4회가 끝난 시점에서 0대0. ]
[ 양 팀 타선이 너무 무기력하군요. ]
[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인 다나카가 4이닝 동안 안타 1개, 몸에 맞는 공 한 개만 허용했는데요. 삼진은 6개를 잡아내고 있고요. 탬파베이의 루키인 문도 만만치 않습니다. 안타를 단 두 개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진 6개입니다. 4회가 끝나기까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네요. ]
[ 이제 중반으로 접어들기 때문에 첫 득점을 누가 가져가느냐가 상당히 중요해질 겁니다. ]
[ 그렇습니다. 뉴욕 양키스의 5회초 공격입니다. 선두타자는 브라이언 맥캔. ]
지혁은 마운드에 올라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이 정도 경기 내용은 충분히 예상했다. 유격수 아스드루발 카브레라나 1루수 제임스 로니, 지명타자 존 제이소처럼 상대적으로 방망이가 강한 타자들이 휴식을 받았다.
대체하는 선수들이 다나카의 공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오늘의 목표는 무실점이었다. 한 점도 안 주는 피칭을 할 것이다. 해야만 하고.
따아악!
바깥쪽 꽉 찬 공이 분명히 제대로 들어갔다. 맥캔이 힘으로 억지로 당겨낸 타구가 외야로 떠 갔다. 지혁은 공이 맞는 순간 인상을 썼다. 안 좋은 느낌이 강하게 들이닥쳤다.
[ 우익수 수자 주니어 앞으로 달려옵니다...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잡지 못했습니다! 공이 아슬아슬하게 뒤로 빠져나갑니다. 키어마이어가 백업을 위해 달려갑니다. 맥캔은 2루를 돌아 3루로 뜁니다. 3루에 서서 들어갑니다, 브라이언 맥캔. ]
[ 으흠. ]
[ 뉴욕 양키스가 오랜 침묵을 깹니다. 5회초, 선두타자 맥캔의 서서 들어가는 3루타가 나옵니다. 자, 다시 보실까요? ]
[ 수자가 꽤 도전적인 수비를 했습니다. 음. 탬파베이에게는 안 좋은 결과가 됐군요. ]
[ 노 아웃이고, 주자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너무 무리한 수비를 한 걸까요? ]
[ 글쎄요. 이런 수비는 결과론적으로 판단하게 되기 마련이죠. 지금은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무리한 수비가 되겠네요. 하지만 수비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타구였다고 봅니다. ]
안 좋은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다. 애매한 타구였다. 안정적인 수비를 했다면 짧은 안타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전적으로 승부해볼 법도 했다. 잡아냈다면 기세를 살리는 호수비가 되었을 터다.
게다가 랭카스터가 부임한 이후 탬파베이 선수단의 키워드는 허슬이었다. 만약 실패를 두려워 해 몸을 아끼는 선택을 했었다면 랭카스터가 불같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허슬을 강조하는 팀 분위기에는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법이다.
“후우...”
그걸 다 알고 있는데도 오만가지 생각이 한번에 지혁을 감싸버렸다. 격렬한 분노와 짜증이 치솟았다. 표정으로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기를 쓰고 버텨야 했다. 5회초. 무사 3루. 팽팽하던 투수전에서 먼저 위기를 맞은 건 지혁 쪽이었다.
*
“힉키 코치. 마운드로.”
계단에 한 쪽 발을 걸쳐놓고 신호만 기다리던 힉키가 마운드로 곧바로 마운드로 뛰쳐 올라갔다. 내야수들이 전부 마운드로 몰려들었다. 작은 언덕에 혼자 분노를 삭이며 올라서 있던 지혁에게로.
“괜찮아. 준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던져.”
힉키 코치의 위로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혁은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전진수비 해 주세요.”
“만약 안타를 맞으면 주자가 모여. 대량 실점으로 가는 것 보다는 안전하게 하는 게 좋아. 고작 한 점이니까.”
“아뇨. 한 점도 안 줄 겁니다.”
힉키는 조금 당황했다. 평소의 지혁이 보여주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수도 없이 야구를 한, 닳고 닳은 베테랑 같던 분위기의 지혁이었다면 그냥 대수롭지 않다는 듯 편하게 던지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지혁은 조금 달랐다. 루키답다고 해야 하나? 제대로 불타오른 모습이었다. 단 한 명의 주자도 홈플레이트를 밟지 못하게 하겠다는 강한 기백이 뿜어지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건의해 보지. 하지만 싸인이 나오지 않는다면 힘들어.”
“르네. 6번 상대로는 몸쪽 커브. 7번은 떨어지는 슬라이더. 8번은 바깥쪽 싱커로 승부할 거야.”
“어?”
“내가 싸인을 고르게 해줘. 내가 처리해.”
포수인 르네 리베라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 마스크 속에서도 느껴졌다. 리베라는 힉키 코치 쪽을 돌아보았다. 힉키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실수였어. 편하게 생각해야 할 때야.”
“코치님. 하나도 흥분하지 않았어요. 지금 엄청 냉정해요. 올 시즌 중에 가장 냉정합니다. 제 선택을 믿어주세요.”
마운드 위에서의 시간이 조금 길어지자 구심이 앞으로 한 발 나오며 경고를 줬다.
“제가 처리할게요. 맡겨주세요. 감독님도 오케이 하실 겁니다. 절 믿는다고 하셨거든요. 이 말은 꼭 전해주세요.”
“문!”
롱고리아가 보다 못해 나섰다. 하지만 오히려 힉키가 그런 롱고리아를 말렸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형진. 싸인을 잘 봐. 시프트 싸인이 나올 거니까.”
“옛.”
힉키는 마운드로 모인 선수들의 허리를 한 번씩 두드려주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내야수들도 자리로 돌아갔다.
“야, 형진아.”
지혁은 자리로 돌아가려는 형진을 돌려세웠다.
“도와줘라. 너한테 갈 거야.”
“...”
아마 경기 내내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꿈에서만 그리던 메이저리그 선발 데뷔전이니까. 유격수 자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선발 출장했다는 타이틀은 피츠버그의 구진호에게 내주었지만, 형진도 엄청 긴장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긴장한 수비수들은 결정적인 순간 몸이 굳어 버리곤 한다.
“걱정하지 마. 수비에서만큼은 발목 안 잡아.”
지혁은 형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리곤 1루 쪽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랭카스터가 가슴께를 두 번 만진 뒤 코와 귀를 거쳐 배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오케이.”
전진수비 싸인이었다.
*
[ 양키스. 무사 3루의 기회를 잡았습니다. 타석엔 6번, 크리스 영. 첫 타석은 투수 앞 땅볼이었습니다. ]
[ 탬파베이는 전진 수비를 하네요. 한 점도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
[ 내야수들이 한 걸음 반 정도씩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선취점의 중요성을 잘 아는 것 같네요. 마운드에 문. 타석엔 영. 과연 승부가 어떻게 될까요. 초구,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높은 쪽에 들어가는 패스트볼. ]
[ 94마일이네요. ]
[ 그렇군요. 오늘 경기 최고구속입니다. 전력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있는 힘을 다 짜내서 패스트볼을 꽂아넣었다. 정확하게 같은 코스로 향한 두 번째 공에 방망이가 헛돌았다. 리베라의 미트를 찢을 것처럼 파고들어가는 강력한 패스트볼 두 개로 카운트를 몰아넣었다.
리베라는 지혁의 주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몸쪽 커브. 지금이 타이밍이다. 첫 타석 크리스 영에게는 커브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싱커로 땅볼을 유도해냈었다. 영은 지혁의 커브를 본 적이 없고, 스윙도 퍼져 나오는 스타일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며, 글러브 속에서 커브 그립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중지와 엄지에 잔뜩 한 번 힘을 줘 본다.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커브가 지혁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어떤 궤적을 그리며 미트에 들어갈지에만 집중했다.
‘한 점도 안 준다. 절대로!’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순간, 글러브 속에 감추고 있던 야구공의 실밥이 유독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몸을 내뻗으며 왼팔을 돌리는 순간 손가락에 착 달라붙어 있던 실밥을 있는 힘껏 긁어냈다. 지혁의 역동적인 투구 동작에 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모자가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손끝에서 떠나간 커브도 떨어져내렸다.
커브가 떨어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영의 방망이, 출발이 늦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아름다운 커브였다. 몸쪽 스트라이크 존 경계선에 정확히 내려앉은 커브에 스윙하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크리스 영의 모습도. 한 손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스트라이크 콜을 외치는 심판의 모습도. 모두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됐어!”
내야수들이 소리지르는 것도, 홈플레이트 뒤에 앉아 있던 관중들이 박수를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긴 집중의 끈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까. 다음 타자는 첫 타석에 안타를 쳐냈던 체이스 헤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