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74화 (75/204)

< 74 - 질 수 없는 승부(2). >

체이스 헤들리는 살짝 건들거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첫 타석에서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을 간단하게 밀어 쳐 우전 안타를 만들어냈었다.

지혁은 저번 타석에서의 결과를 생각하며 전광판을 돌아보았다. 홈런 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샌디에이고의 펫코 파크를 홈으로 쓰며 30홈런과 115타점을 기록하며 양키스로 이적해 온 타자. 하지만 정작 양키스에 돌아온 이후로는 컨택의 정교함을 잃으며 어쩌다 한 방이 터지는 공갈포가 되어버린 선수다.

전광판에 떠오른 이번 시즌 기록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 타율 .214, 출루율 .282, 장타율 .312. 선구안이 특출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타율도 낮다.

‘먼저 맞은 안타 하나면 오늘 충분히 맞은 셈이야. 그래도...’

헤들리 같은 타자들에게는 배트에 공을 맞춰주지 않는 게 좋다. 외야로 뻗어나가면 그 즉시 한 점이 들어오니까. 지혁은 혹시 맞더라도 빗맞은 내야 땅볼을 유도할 수 있는 싱커로 승부에 나섰다.

[ 초구! 바깥쪽에서 빠져나가는 싱커. 원 볼입니다. ]

[ 헤들리 선수의 인내심이 빛났네요. 지금 공은 치고 싶게끔 들어왔어요. ]

[ 3루타를 허용하며 득점권에 주자를 두고 있는 문. 과연 이 한 명을 들여보내지 않고 멈춰세울 수 있을지. 일단 아웃카운트 하나는 잡았습니다. 헤들리의 타석, 제 2구. 몸쪽으로 과감하게 들어갔습니다. ]

[ 완벽한 공이네요. 지금 저 공은 건드리면 무조건 내야 땅볼입니다. 몸쪽으로 싱커를 붙이다뇨. 배짱이 대단합니다. ]

[ 피칭 존에는 볼로 기록되었네요. 하지만 주심이 잡아줬군요. ]

[ 르네 리베라의 프레이밍도 예술적이었습니다. 저희가 중계 화면으로 봐도 스트라이크 같았어요. 하하하. ]

반 개 정도 빠진 공을 들어올려 준 리베라 덕분에 카운트가 원 스트라이크 원 볼이 되었다. 만약 투 볼로 몰렸더라면 그냥 내보내고 병살을 유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포수의 이런 프레이밍이 나오고 나면 타자가 구상하는 존이 넓어지는 장점도 있다.

“흐으읍!”

전력으로 던진 패스트볼이 헤들리의 가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낮은 공 두 개를 본 이후 눈높이로 공이 들이닥치자 헤들리도 조금 엉성한 스윙을 냈다. 방망이를 아주 살짝 스친 공이 그대로 리베라의 미트에 빨려들었다.

“나이스!”

“몰아넣었다! 침착하게!”

더그아웃에서도, 지혁의 등 뒤에서도. 기세를 올리고 있는 지혁을 향해 격려가 쏟아졌다. 지혁은 스스로 의식할 틈도 없을 정도로 헤들리와의 승부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지혁의 등 뒤를 보고 있는 야수들은 조금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특히 데뷔 이후 탬파베이의 트로피카나 필드를 떠난 적이 없던 롱고리아는 더욱 그랬다. 향기가 나고 있었으니까.

3루에서는 왼손 투수의 등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 등 너머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투구에 들어간 이후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등번호 18번을 달고 있는 아시아에서 온 루키는, 스캇 카즈미어나 맷 무어... 그리고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승부처에서 짓고 있던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볼 수는 없지만 알 수 있다.

한참을 허리를 굽혀 포수를 바라보던 지혁이 몸을 일으켰다. 롱고리아의 시야에서 지혁의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 지혁이 투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홈 플레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지만,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에이스의 기백이 롱고리아에게도 전해져 왔다.

[ 4구! 헛스윙! 헛스윙 삼진으로 헤들리를 돌려세웁니다, 문! ]

[ 슬라이더인가요? 대담합니다. 싱커나 커브가 아니라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선택했네요. 리베라의 수비도 좋았습니다. 원바운드가 되는 공을 빠트리지 않고 정확히 잡아냈습니다. ]

[ 무릎이 무너지면서 스윙을 돌려 봤던 헤들리. 배트로 땅을 치면서 돌아섭니다! 이제 투 아웃. 스스로 여유를 찾아냈습니다. ]

지혁은 모자를 벗고 흐르는 땀을 한 번 닦아냈다. 생각한 대로 왔다. 커브를 보여 주지 않았던 영에게 커브를 던져서 루킹 삼진을 잡았고, 정교함이 떨어지고 스윙이 큰 헤들리를 상대로 슬라이더로 유인해서 헛스윙 삼진을 잡았다.

그리고 이제 수비들이 정상 위치로 돌아간다. 마지막 한 고비만 남은 것이다. 8번 스테판 드류를 상대로 그렸던 지혁의 마지막 그림.

[ 6구, 밀어 때립니다. 애매한 타구... 대쉬해 들어옵니다, 이형진! 건져내서 1루로! 1루에서! 1루에서! ]

[ 아웃이네요. ]

[ In time! 위기를 벗어납니다, 탬파베이 레이스! 유격수 이형진의 멋진 수비! ]

바깥쪽 싱커. 좌타자 드류가 엉덩이를 빼면서 방망이 끝으로 툭 건드린 타구가 애매하게 유격수 앞으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형진의 수비는 날렵하면서도 경쾌했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든 형진은 백핸드로 공을 건져올리자마자 엄청난 스피드로 글러브에서 공을 빼냈고, 낮은 자세에서 1루로 강한 송구를 뿌렸다.

유격수 수비와 어깨만큼은 몇 년 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재능이라고 평가받던 형진의 수비에는 실수가 없었다. 레이저처럼 쏘아져 나간 송구가 다익스트라의 미트에 정확히 꽂히는 순간, 지혁은 하늘에 대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대니 랭카스터도 더그아웃에서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6회말. 여전히 스코어는 0대0. 양키스의 마운드에는 여전히 다나카 마사히로가 버티고 있다. 5회초 위기를 넘긴 지혁은 6회초 공격은 딱 6개를 던져 세 타자를 잡아냈다. 엄청나게 빠른 템포로 한 이닝을 지워버린 탓에 다나카는 많이 쉬지도 못하고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 9번 타자, 유격수, No, 66. 형-진- 리!

방망이를 땅에 짚고 쭈그렸다 앉았다를 반복하던 형진이 깊게 심호흡을 하며 타석에 들어섰다. 좋은 수비를 한 이후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서고 있다. 분위기를 살려 가겠다는 듯 빠르게 스윙을 돌려본다.

타격은 형진의 발목을 잡고 있던 오랜 숙제이자 고질병이었다. 그나마 변화구에 대한 대처는 어느 정도 되는 편이었지만, 빠른 공에 맞서질 못했다. 스윙에 힘이 모자랐고, 방망이에 힘을 실어 공을 멀리 보내는 능력도 떨어졌다. 그러다보니 강한 타구가 만들어지질 않았고 타율은 정체되었다.

오늘 경기 다나카의 패스트볼 구속은 93~94마일에서 형성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속이 3~4마일 정도 줄었는데, 지난 시즌 후반기에 느꼈던 팔꿈치 통증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토미 존 서저리를 받지 않고 재활을 택한 다나카는, 구속을 낮추는 대신 공의 무브먼트를 살리는 선택을 했다.

‘대신 내구성이 떨어졌지.’

확실히 경기 중반을 다 지나가는 동안 다나카는 유독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팔꿈치로도 5이닝을 깔끔하게 틀어막은 것이 다나카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금부터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해 줘!”

지혁은 더그아웃에 앉아있지 않고 난간으로 나왔다. 한 점. 한 점이면 된다.

[ 타석엔 이형진. 이번 시즌 11타수 1안타입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기대받던 유망주였는데, 역시 타격에는 문제가 조금 있어 보입니다. ]

[ 그렇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유도 바로 타격이었거든요. ]

[ 초구. 스플리터. 헛스윙입니다. 초구부터 자신 있게 돌려 봤는데, 방망이와 차이가 조금 많이 나네요. ]

[ 쉽지 않아 보입니다. ]

형진은 짜증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1루 쪽에서는 좌타자인 형진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산만한 준비 동작은 형진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새끼...”

타격 쪽으로는 젬병인 지혁이 안쓰러운 눈으로 형진을 바라봤다. 2구는 바깥쪽에 한 개 정도 빠진 볼이었지만, 3구째에 또 헛스윙이 나왔다. 또 떨어지는 스플리터였다.

“빠른 공을 노리고 있는 게 너무 눈에 보여.”

롱고리아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자신의 약점인 패스트볼을 던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듯한 스윙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니 다나카와 맥캔 배터리는 스플리터로 농락하고 있는 것이고.

“힘들겠어.”

다나카가 4구를 던지기 직전에 롱고리아가 내뱉었다. 하지만.

탁!

형진의 스윙에 공이 빗맞았다. 빗맞은 공이 그라운드로 구르는 순간, 모두가 일어섰다.

“뛰어! 뛰어 봐!”

마치 번트처럼 땅에 붙어 구르는 공이 1루 라인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갔다. 다나카가 황급히 내려왔지만 형진은 그 앞을 쏜살같이 지나쳤다. 당황한 다나카가 맨손으로 공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더듬거렸다.

촤르르륵!

형진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1루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해 들어갔다. 다나카는 공을 제대로 잡아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예에에쓰! 형진! 그거야!”

헬멧이 벗겨진 형진이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큰 액션으로 박수를 치며 1루쪽 더그아웃을 가리켰다. 더그아웃의 모든 선수들도 휘파람을 불며 형진의 허슬에 세레머니를 보냈다. 2회 이후 드디어 루상에 주자가 나간 것이다.

그리고 형진은 멈추지 않았다.

[ 타석엔 1번 키어마이어. 다나카가 오랜만에 주자를 내보냈습니다. 초구를 던집니다. ]

[ 뛰는데요? ]

[ 2루로 갑니다! 맥캔의 2루 송구! 세이프! 이형진, 초구에 바로 2루를 훔쳤습니다. 와우. 정말 빠르네요. ]

[ 주루에 재능이 있는 선수죠. 하지만 초구부터 뛸 줄은 몰랐는데요. ]

다나카가 쉬지 않고 땀을 훔쳤다. 랭카스터 감독은 키어마이어에게 번트 싸인을 냈고, 착실하게 1루 쪽으로 굴린 키어마이어는 기어이 형진을 3루로 보냈다.

[ 5회초 무사 3루 상황에서 득점하지 못한 양키스. 이번 회에는 1사 3루의 위기입니다. 다나카는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요? 타석엔 스티븐 수자 주니어입니다. ]

지혁은 경기에 집중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오늘 경기에서 지혁에게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던 선수. 스티븐 수자 주니어. 타석에 들어선 수자가 지혁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배팅 장갑을 고쳐 끼우더니 살벌한 기세로 다나카를 노려본다.

“외야로만 보내면 돼!”

누군가가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졌다.

[ 센터 쪽 깊게! 깊게 갑니다! 수자 주니어! 엘스버리의 키를 넘겨버립니다! ]

형진은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며 홈플레이트를 밟아 들어왔다. 대기 타석에 있던 드헤수스와 롱고리아가 형진을 껴안았다. 미친 사람처럼 포효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형진이 랭카스터 감독과 팔을 이리저리 부딪히는 세레머니를 하며 선수들의 축하 세례를 받는다.

지혁도 형진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야. 무조건 지켜라. 점수 주기만 해 봐!”

형진은 오랜만에 정말 환하게 웃었다. 지혁도 같이 웃었다.

*

[ 음- 볼입니다. 아슬아슬했는데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2아웃에 주자 만루가 됩니다. 문. 방금 이 공으로 투구수 100개를 딱 채웠습니다. 타석에 에이로드가 들어오는데요. 랭카스터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옵니다. ]

8회초. 7번 헤들리와 8번 드류를 잘 잡아낸 이후 9번 디디 그레고리우스에게 안타를 맞은 게 뼈아팠다. 1번 엘스버리가 기습번트를 대고 살아나간 건 어쩔 수 없었다. 코스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가드너에게 풀카운트 승부를 가다가 볼넷을 내준 건 최악의 결과였다.

2아웃에 만루. 그리고 어제 홈런 두 개를 때려낸 알렉스 로드리게스 타석.

더그아웃에서 거구의 랭카스터가 직접 몸을 이끌고 마운드로 걸어오고 있다. 지혁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

“...”

“흐흐흐.”

랭카스터가 내야를 한 바퀴 돌아보며 웃었다.

“내가 일부러 직접 나왔어. 저 새끼들 쫄아보라고.”

“...네?”

“네가 영웅이면, 널 믿어보겠다고 했지.”

랭카스터는 지혁의 어깨를 툭 내려쳤다. 들소의 앞발이 다정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렇다. 이보다 더 다정한 손길은 있을 수 없었다.

“끝까지 영웅 노릇을 해. 해결해.”

지혁은 글러브 속에 쥔 공을 더욱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감상이 갑자기 그를 덮쳤다. 쓸모없는 취급을 받던 노장 패전처리 투수가, 지금은 감독의 믿음을 받는 팀의 영웅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운드를 내려가는 랭카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오글거리는 멘트를 뱉어 놨으니까... 물러날 수는 없지.”

지혁은 타석에 들어선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한복판에 싱커를 던졌다. 칠 테면 쳐 봐라, 이 새끼야!

[ 초구! 그러나 높이 뜹니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이형진이 잡아냅니다. 8회초 만루의 위기를 넘깁니다, 문. 스코어는 아직도 1대0입니다! ]

*

2015년 4월 18일. 경기 결과.

탬파베이 레이스 1 vs 0 뉴욕 양키스 승리투수 : 문지혁 (1-0, 1.34. 9이닝 5피안타 2볼넷 0실점 11탈삼진).

패전투수 : 다나카 마사히로 (1-2, 4.41, 7이닝 3피안타 1실점 10탈삼진).

- 문지혁, 데뷔 첫 완봉승. 이형진 결승 득점.

- ‘코리안 듀오’ 문지혁과 이형진, 日 자존심 다나카 눌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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