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75화 (76/204)

< 75 - 팀을 뭉치게 하는 건. >

지혁의 완봉승. 그것도 다나카가 등판했던 양키스를 상대로 한 완봉승은 특히 한국에서 큰 반응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결승 득점을 올린 선수가 또 다른 한국인 형진이었으니, 한국에서는 이 소식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었을 수밖에.

아무리 토요일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에 치러진 경기였는데도 온라인 중계 최고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이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고, 인기도 없는 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야, 반응 장난 아니야!”

정작 지혁과 패트릭은 심드렁했지만 연두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 커뮤니티 좀 그만해. 거기 이상한 사람들 너무 많더라.”

“야, 그래도 여긴 정상이거든? 다른 데는 인신공격에 패드립에 장난 아니거든!”

“패드립?”

“있어, 그런게. 몰라도 돼.”

패트릭은 대화 중간중간에 한국어가 끼어 나오자 조금 인상을 썼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인턴인데, 팬들 반응을 못 보게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팬들 반응을 살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니까.”

“맞아. 요게 내 일이라고.”

“그래도 절대 글은 쓰지 마. 혹시라도 에이전시에서 여론 조작한다고 하면... 어휴. 뭐야, 잠깐. 연두? 너 설마?”

“아, 아니에요! 절대 안 썼어요!”

“당황하는 게 이상한데?”

“그, 그 뭐냐. 댓글! 댓글만 한두...개...”

“Shit. 틀어 봐. 빨리. 뭐라고 썼어?”

패트릭은 연두를 닦달했다. 연두는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도 회사 대표님이 독촉하는 걸 이겨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귀까지 새빨개진 연두가 자신이 쓴 댓글 몇 개를 띄워냈다.

“문. 뭐래요? 해석 좀 해 봐요.”

“아...”

- 갓카스터 아가리 벌려! 초코파이 들어간다! 우리탬 쏘리질러어어어~

이걸 뭐라고 해석해 줘야 될까.

지혁은 한심한 눈빛으로 연두를 돌아보았다.

“아가리가 뭐냐, 아가리가.”

“야씨... 여자인 거 들키면 얼빠 취급 당한단 말이야. 남자인 척 해야 살아남는다구...”

“그래도 아가리가 뭐야. 상스럽게. 이거 뭐라고 해석해 줘?”

패트릭이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쏘아본다. 연두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별 거 아니라고 해 주면 안 돼? 제발. 나 너무 쪽팔려...”

있는 힘껏 꼬리를 말고 고개를 박고 있는 다람쥐처럼 움츠러들어 가는 연두와 정말 큰일이 난 줄 알고 있는 패트릭을 번갈아 바라보며 지혁은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별 거 아니에요. 아무 내용도 없네요.”

“확실해요?”

“네. 문제될 건 하나도 없어요.”

지혁은 연두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렸다.

“으휴.”

*

연두의 이런 소소한 취미 활동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곧 탬파베이 프런트 오피스의 직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와우. 이게 다 뭐야?”

크리스 아처와 케빈 키어마이어가 입을 딱 벌렸다. 클러비들이 손으로 박스를 옮기는 것도 모자라서 카트를 가져다가 몇 번을 왕복하며 나르고 있었다.

“다들 이리 와봐! Holy shit! 이게 다 뭐야!”

“이거 테러 아니야?”

“미친, 그딴 농담 하지 마!”

“보낸 곳이 사우스 코리아에요. 이거 전부 다.”

“뭐?”

선수들의 시선이 캐치볼을 마치고 막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지혁과 형진 쪽으로 꽂혔다.

“문! 이리 와봐.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이걸 봐. 미쳤다니까? 이거 전부 한국에서 온 거래!”

익숙했다. ‘우체국택배’라고 쓰여 있는 종이 박스가. 지혁은 수북이 쌓여 있는 박스들 중 하나를 잡아 뜯었다. 과자들이 차곡차곡 포장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응. 스낵이네. 오랜만이다, 한국 과자.”

“왓 더...”

선수들은 일종의 문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가끔 팬들에게 선물을 받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미국 안에서도 가장 팬이 적은 구단인 탬파베이 선수들에게 이 정도 양의 선물 공세는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뭐, 전생에서는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던 지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형진도 어느 새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의 라커룸 앞에 쌓여 있는 박스를 열심히 뜯고 있다.

두 사람 주위로 탬파베이의 모든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클러비들도 하나 같이 몰려와 이 진풍경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오레오! 오레오다! 오 마이 갓, 오레오야!”

“문, 나 이거 먹어도 돼? 이거 나 주면 안 되냐?”

“이거 봐. 보스턴을 물리치고 뉴욕을 깨부수라는데? 와하하.”

한국에서 파는 과자들, 팬들 몇몇이 만든 조그만 액자나 카드 같은 것들을 돌려 보는 탬파베이 선수들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

특히 롱고리아는 거의 눈물을 쏟을 것처럼 보였다. 탬파베이의 모든 구성원들 중에서 인지도도 가장 높고, 선물 같은 것들도 가장 많이 받고, 팬들의 사랑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한국의 어떤 팬이 롱고리아와 그의 딸 엘르의 사진을 예쁘게 편집해서 만든 액자를 보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려서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헤이, 너희들! 뭐 하고 있는 거야?”

라커룸으로 출근한 랭카스터는 이 혼돈에 빠진 라커룸 광경을 바라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보스! 이건 보스한테 온 건데요?”

엄청난 박스 더미에서 아처가 랭카스터에게 온 박스도 하나 찾아냈다.

“뭐?”

“한국에서 왔어요. 완전 미쳤다니까요.”

박스를 거칠게 뜯어낸 랭카스터의 표정이 순간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WHAT?”

지혁은 과자를 먹다 말고 랭카스터의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그리곤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해 버렸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이 사진이 탬파베이 레이스의 라커룸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 버렸다.

엄청난 근육을 흔들며 포효하고 있는 랭카스터의 검은 피부에 분홍색 볼터치를 해 귀엽게 꾸며 놓은 사진이었다. 아기자기한 스티커 장식들과 그 밑에 붙은 ‘Fighting, danny!’라는 문구를 봤을 때 이건 분명히 응원이었다.

“감독님, 이건 조롱이나 그런 게 아니라요. 한국에서는 귀엽다는 의미로 이걸 이렇게... 그러니까, 음. Cute... 으하하, 으하하핫!”

랭카스터의 이런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랭카스터를 몰래 동영상으로 촬영한 크리스 아처가 팬 SNS에 이 동영상을 올리면서, 이 비디오 클립은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퍼져나갔다.

*

팬들의 선물 덕분일까? 지혁이 보기엔 엄청난 선물들이 배달된 이후로 선수들이 더 이를 악물고 경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탬파베이 레이스는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 시작은 지혁의 완봉승이었고.

3승 8패라는,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최악의 성적으로 시작했던 탬파베이는 완벽하게 분위기 반등에 성공했다. 드류 스마일리가 선발 로테이션에 복귀해서 한 자리를 든든히 지켰고, 초반 타격감이 떨어졌던 많은 선수들이 서서히 제 사이클을 찾아갔다. 그 결과 4월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11승 11패로 5할 승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좋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공격력의 상승을 기대하고 데려온 아스드루발 카브레라나 존 제이소 같은 선수들은 오히려 이전의 조브리스트나 조이스보다도 못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문제였다. 백업 선수들도 타격이 좋지 못했다.

또 하나가 있다. 올해도 부상 악령이 탬파베이를 떠나가지 않은 것이다. 에이스이자 투수조 리더를 맡아줘야 할 알렉스 콥이 팔꿈치 인대 부상을 당하며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탬파베이의 로테이션은 아처-스마일리-오도리찌-문지혁의 네 명에 5선발 후보들로 채워졌다. 누구나 테스트를 받을 것이다.

“헤이, 에라! 집중해!”

5월 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 구장인 캠든 야즈에서의 경기. 5선발 자리를 가장 먼저 테스트 받고 있는 에라스모 라미레즈의 선발 등판 경기였다.

웨이버 클레임으로 팀에 데려 온 라미레즈는 안 그래도 제구가 불안한 선수였다. 그는 탬파베이라는 팀에서의 첫 경기라는 점과 선발 테스트라는 점에 부담을 잔뜩 느낀 모양이었다. 1회부터 공이 들쑥날쑥했다.

1번 데아자를 97마일의 빠른 공으로 삼진 잡아낸 것은 아주 좋았다. 트라웃이 와도 제대로 건드릴 수 없는 지점에 정확하게 박혔다. 하지만 이어진 파레데스와 아담 존스에게는 두 타자 연속 스트레이트 볼넷을 줬다. 델몬 영을 삼대로는 삼구 삼진. 그리고 크리스 데이비스에게는 다시 스트레이트 볼넷.

더그아웃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진이 쭉 빠지는 투구 내용이었다. 1회를 막아내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 투구는 경기 내내 이어졌다. 그리고.

“으아악!”

3회말.

라미레즈의 패스트볼이 델몬 영의 어깨를 정통으로 맞혔다. 어깨에 맞는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더그아웃까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손에서 빠진 공이 분명해 보였지만 볼티모어의 선수들이 불편한 기색을 표출했다. 라미레즈는 긴장한 탓인지 얼굴이 더 굳어졌고.

4회초.

탬파베이는 동점을 만들었다. 그 동안 타율이 1할 대까지 추락해 있던 아스드루발 카브레라가 주자 두 명을 불러들이는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한 것이다. 사실 아슬아슬한 타구였는데, 2루를 돌면서 헬멧까지 벗어던지고 전력으로 달리더니 절묘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기어이 살아 들어갔다.

“후오오오!”

카브레라는 자연스럽게 3루 쪽 원정 더그아웃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치며 세레머니를 했다. 공중에 어퍼컷을 날리기도 했다. 지혁을 비롯한 선수들도 더그아웃을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하며 부진에서 탈출한 카브레라와 함께 기뻐해 줬다.

지혁은 소리를 치고 박수를 쳐 주면서도 다른 쪽을 바라봤다. 3루수 뒤로 백업 포지션을 잡고 있던 볼티모어의 선발투수 크리스 틸먼.

“쟤, 화났는데?”

지혁은 틸먼의 얼굴에 떠오른 강한 적개심을 읽었다. 읽을 수밖에 없었다. 워낙에 표정에서 티가 나고 있으니까. 게다가 투수 입장에서는 분명히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기는 했다. 신경을 안 쓰면 된다고는 하지만, 신경이 안 쓰이는 일은 아니니까. 메이저리그에 내려오는, 유독 투수의 신경을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묘한 기류는 이미 진작부터 흘러다니고 있었다. 아마 내색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모든 선수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볼티모어의 선수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주자가 3루에 있어서인지 타석에 들어선 롱고리아에게 위협적인 공이 날아들지는 않았다. 2대2 상황이 유지되던 5회말. 다시 일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FUCK! HEY!”

투구수 90개를 넘어선 라미레즈가 던진 공이 크리스 데이비스의 몸쪽으로 아주 많이 붙었다. 데이비스가 깜짝 놀라면서 허리를 뒤로 쭉 빼며 방망이를 놓쳐버렸다. 리베라도 공을 따라가지 못했고, 뒤로 빠진 공은 한참을 뒤로 굴러갔다.

“이런.”

솔직히 고의로 보이지는 않았다. 투구수도 많은 라미레즈가, 동점 상황에서 굳이 변화구를 던져서 몸에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 입장에서 발끈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이미 동료들 중 한 명이 어깻죽지에 공을 강타 당했고, 동점 3루타를 허용했으며, 세레머니도 신나게 해댔다. 그것도 자기들 홈에서.

데이비스가 마운드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라미레즈도 데이비스를 향해서 저벅저벅 걸어 내려갔다.

“다 나가! 당장!”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미 볼티모어 쪽 더그아웃에서는 선수들이 난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양 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우루루 쏟아져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벤치 클리어링의 발발이었다. 캠든 야즈에 아주 긴 야유가 울려퍼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비스가 라미레즈의 모자에 대고 손가락을 찌르려던 것을 볼티모어의 누군가가 황급히 말렸고, 라미레즈도 글러브를 벗고 맨손을 꺼내려다가 탬파베이의 누군가에게 저지당했다. 심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첫 번째 벤치 클리어링을 빨리 무마시켰다.

하지만 다행이 아니었다. 라미레즈가 결국 크리스 데이비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라미레즈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짧은 소리를 질렀고, 데이비스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다 말고 헬멧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마운드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또야?!”

지혁은 고작 몇 분 사이에 다시 더그아웃 밖으로 달려나가게 되었다. 2차 벤치 클리어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혁은 미처 몰랐는데. 지혁보다 앞에 앞장서서 달려나가고 있는 사람은,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저건 들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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