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 끈끈한 관계. >
그라운드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 쪽으로 다가가는 랭카스터에게 집중했다. 그래도 어제 마운드로 달려나가던 랭카스터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 것 같은 기세였다면, 오늘의 그는 꽤 침착해 보였다. 트레이너들이 달려와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는 카브레라를 먼저 살핀 후, 랭카스터는 심판에게 뭔가를 간단하게 따졌다.
우우우-
이미 랭카스터가 나오는 순간부터 야유로 가득했던 캠든 야즈가 더욱 시끄러워졌다. 랭카스터는 이내 돌아서면서 카브레라를 교체시켰다. 그리고 불펜에 전화를 걸어 최고구속 100마일을 던지는 콜로메를 준비시켰다.
“감독님. 보복구를...”
“던져.”
힉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볼티모어와의 시리즈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실제로 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에 모인 모든 선수들이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7회말. 콜로메의 99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아담 존스의 허벅지를 때리면서 또 한 번의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3차전 선발투수로 예정되어 있는 지혁만이 클럽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TV 모니터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어휴. 개판이구만.”
지혁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
- 메이저리그 사무국, 대니 랭카스터에게 5경기 정지 징계 처분.
캠든 야즈에서 열린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의 시리즈는 야구가 보여줄 수 있는 어두운 면들을 모두 드러냈다. 팬들과 관계자들 모두 3차전이 우천으로 취소된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1차전과 2차전에서 양 팀 합쳐 몸에 맞는 공 6개와 3번의 벤치 클리어링으로 얼룩진 시리즈였고, 3차전에서는 그 분위기가 더 과열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으니까.
한편 1차전 일어났던 벤치 클리어링에서 심판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퇴장당했던 탬파베이의 대니 랭카스터 감독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으로부터 5경기 정지 징계를 받았다. 5경기 동안 더그아웃에 들어올 수 없는 이 징계는 내일 치러질 경기부터 적용된다. 이로써 탬파베이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원정 3연전,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원정 3연전 중 2경기를 랭카스터 감독 없이 치르게 되었다.
... (하략)
“그렇다는군. 그래서 난 보스턴 원정에는 같이 안 간다.”
랭카스터는 곧장 텍사스로 넘어가기로 했다. 지혁은 랭카스터의 표정을 종잡을 수 없었다.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고, 조금 찝찝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며 수많은 표정들을 봐 왔지만 랭카스터의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감독 역할은 캐쉬 코치가 잘 해 줄 거다. 그러니 너희들은 깔끔하게 세 판 다 이기고 텍사스로 넘어 오도록 해. 난 먼저 가서 휴가를 좀 즐기고 있을 테니까.”
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랭카스터의 말에는 여유가 묻어 나왔다. 선수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랭카스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표정들이 왜 그래? 헤이. 너희들. 우리가 왜 벤치 클리어링을 해 가면서까지 앞으로 수백 번도 더 만나야 되는 볼티모어 녀석들이랑 한 판 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랭카스터의 이마에 지렁이 같은 깊은 주름이 패였다. 인상을 썼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에라를 위해서잖아! 그리고 에이캡을 위해서고. 동료는 가족이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 가족이 경기장 위에서 상대 녀석들한테 위협을 당했어. 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거다. 게다가 에라는 이제 막 팀에 합류한 동료고, 에이캡은 한 달 동안 슬럼프에 시달렸어. 힘들어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난 언제든 나설 거다.”
랭카스터는 단호하게 말하고 에라스모 라미레즈와 아스드루발 카브레라를 한 번 돌아보았다.
“동료를 위해, 팀을 위해. 그게 내가 생각하는 야구의 가치다. 메이저리그에 있다고 해서 야구의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지. 너희들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내가 앞에 나설 거야. 이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내가 받을 거고.”
랭카스터는 후련한 듯 웃어 보이고는 텍사스행 비행기를 타러 떠나버렸다.
‘직접적으로 불씨를 피우는 스타일이네.’
지혁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런 스타일의 감독이 가끔 있다. 데이토나 컵스 시절 감독이었던 데이빗 더그가 그랬고, 지혁이 전생에 은퇴하던 날 마지막까지 챙겨주던 시애틀의 감독이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NBA 스타일의 감독이랄까.
야구는 몸을 격렬하게 쓰는 다른 스포츠들과는 조금 다르다. 야구에서 말하는 동료애나 희생, 헌신 같은 단어도 선수들에게 통용되는 느낌이 다르다. 몸을 부대끼며 전투적으로 싸우는 스포츠들에서 동료애는 전우애에 가깝다. 선수들 개개인이 느끼는 거리감도 끈적거릴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야구에서의 동료애는 학교 친구들과의 우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한 팀의 구성원도 워낙에 많고, 개개인과 전부 교감을 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그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에라스모 라미레즈만 해도 얼마 전 웨이버 클레임으로 팀에 합류했다. 그 동안 탬파베이라는 팀과 아무런 연고도 없던 선수였다. 아스드루발 카브레라? 마찬가지다. 팀이 완전히 바뀐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랭카스터는 이 구성원들이 조금 더 끈적하게 들러붙기를 바라고 있는 게 확실했다.
*
2015시즌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순위 (5/7일)
1. 뉴욕 양키스 (17승 10패)
2. 볼티모어 오리올스 (14승 12패)
3. 탬파베이 레이스 (14승 13패)
4. 보스턴 레드삭스 (13승 15패)
5. 토론토 블루제이스 (13승 15패)
지혁은 보스턴과의 첫 경기에서 7.1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내며 시즌 3승째를 거뒀다. 제이크 오도리찌도 승리를 추가했다. 보스턴과의 3연전에서 2승1패로 위닝시리즈를 거둔 탬파베이는 지구 3위로 뛰어올랐다. 랭카스터 감독이 의도했던 대로 팀원들이 조금 더 가까워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플레이에 보다 독기가 어리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으. 뜨겁다.”
이제 막 5월에 들어섰음에도 한여름처럼 뜨거운 해가 텍사스의 홈 경기장 글로브 라이프 파크를 내리쬐고 있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도 더운 공기가 섞여 후끈하기만 하다. 지혁은 형진과 함께 외야의 펜스 밑에 숨어 해를 피하고 있었다.
“야. 다시 연락 드려봐.”
“오신다고 했는데. 어디시지?”
“어이! 이형진이!”
“저기 오셨네. 선배님!”
형진은 모자를 벗고 1루쪽 더그아웃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지혁도 형진의 뒤를 따랐다.
“와, 임마 이거. 드디어 출세했네. 어?”
“출세는요. 백업으로 간신히 붙어 있는데요. 하하하.”
“이 새끼 이거 빡실 때 생각 몬하고. 내랑 술먹다가 메이저 한 번만 밟아보고 은퇴하고 싶다고 징징 짠 게 엊그제다아이가.”
“하하하하. 그건 그렇죠. 어디 가서 술 먹고 울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특히 예은 누나한테는 절대 안 돼요.”
최성수. 마이너리그에서 그야말로 처절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메이저리그에 올라서고, 텍사스와 7년 138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대형 계약을 맺어낸 선수. 지혁이나 형진처럼 마이너리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대선배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지혁이? 맞제?”
“네. 문지혁입니다.”
“그래. 니 요새 잘 나가드라. 새끼. 잘 나가면 연락 좀 먼저 해 주고 그래야지, 임마.”
최성수는 씁쓸한 농담을 담아 지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난 시즌 초대형 계약을 맺고 텍사스로 옮겼지만 .242에 홈런 13개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 시즌 출발은 최악이었다.
“니 이번 시리즈에 등판하나?”
“예. 3차전에 올라갈 것 같습니다.”
“내 만나면 살살 좀 해라. 알제? 하도 안 맞아서 죽겠다, 아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선배님. 어제 홈런도 치셨지 않습니까? 영상 봤습니다.”
“마. 내 타율 봤나. 진짜 이렇게 안 맞는 것도 오랜만이다. 살살해, 살살.”
지금까지 타율이 .159. 그나마 최근 들어 한 경기에 장타 하나씩은 나오고 있어서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한 타율이 저렇다. 최성수의 4월 스타트는 그냥 이보다 더 안 좋을 수 없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저는 컨디션이고 뭐고 경기에나 좀 나갔으면 좋겠어요.”
“임마 이거 또 배부른 소리 하네.”
하지만 최성수는 곧 마이너리그에서 갓 탈출했던 때의 이야기를 해 주며 형진을 다독였다. 야구에 대해서 조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가짐이나 태도, 감독과의 관계 등을 어떻게 설정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네?’
전생에 마이너리그에서 처절하게 구르고 돌아다닐 때 최성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전성기를 맞다 은퇴했었다. 그래서 몇 번 본 적이 없었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그 때는 그냥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에 하늘같은 선배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만난 최성수는 생각보다 살가운 사람이었다.
“이제 가 봐라. 나도 몸 좀 풀어야겠다.”
“네, 선배님. 또 연락드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고생하십시오.”
“니는 좀 뻣뻣하네. 앞으로는 편하게 해라. 괜찮으니까.”
“예.”
“그래. 모처럼 텍사스까지 왔는데 식사나 한 번 하고. 니 3차전 등판이라 했제? 그럼 그 경기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온나. 형진이도.”
“오! 오랜만에 사모님 음식!”
“미국 땅에서 고생하는데 조예은 기자도 부를까?”
“좋죠.”
“그래. 안 다치게 조심하고. 좋은 게임 해라.”
지혁과 형진은 꾸벅 인사를 했다. 지금 메이저리그 판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 선수였다. 후배들을 챙기는 최성수의 뒷모습이 은근히 거대해 보였다. 지혁은 문득 내년부터 시작될 한국인 선수들의 미국행 러시를 떠올렸다. 이미 피츠버그에는 구진호가 넘어와 있고, 내년에는 KBO를 주름잡던 많은 선수들이 넘어오기 시작한다.
‘조금 친해지는 게 나으려나?’
누군가는 고된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또 누군가는 성공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안착할 것이다. 이전까지의 생에서 한국인 선수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지혁에게는 조금 낯선 일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팀에 있어도 이렇게 끈끈하다고 느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
[ 텍사스 레인저스 5 vs 4 탬파베이 레이스. 텍사스 4연승, 선봉장은 결승 홈런의 최성수. ]
[ 텍사스 레인저스 2 vs 8 탬파베이 레이스. ‘아처의 역습’. 9이닝 2실점 완투승. ]
탬파베이와 텍사스는 한 경기씩 주고받았다. 그리고 3차전.
랭카스터 감독은 더그아웃에 복귀했고, 지혁은 선발투수로 나선다. 형진도 모처럼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카브레라의 휴식일이다.
“문.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
“음. 딱히? 왜?”
“싱커가 평소보다 조금 덜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래? 평소랑 다를 건 없었는데. 왜지?”
“조금 덜 떨어져. 각도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마지막에 힘이 좀 빠지는 느낌이 있어.”
불펜에서 간단히 컨디션을 점검하고 난 뒤, 공을 받아 준 리베라가 다가왔다.
“싱커를 던질 때는 최대한 낮게 던져. 카운트는 패스트볼이랑 커브로 잡는 게 낫겠어.”
“흠. 알겠어.”
지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
삼십분 뒤, 댈러스의 뜨겁디 뜨거운 저녁 햇살이 비치는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혁은 마운드에서 로진을 한 번 묻히고 타석에 들어서는 양귀 헬멧의 주인공을 향해 모자를 한 번 까닥거렸다. 최성수도 헬멧을 한 번 잡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텍사스 레인저스의 리드-오프! 우익수, 성-수- 초이!
타자 최성수, 그리고 투수 문지혁. 텍사스 원정 시리즈 3차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