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자신감과 평정심. >
[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 지혁 문. 이번 시즌 지금까지 6경기에 선발 등판해서 3승 1패입니다. 평균자책점은 2.69. 이닝당 주자허용률은 1.18입니다. ]
[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성적입니다. 탬파베이 레이스가 어린 투수를 잘 키우는 건 정말 알아줘야 하겠네요. 지금 로테이션도 상당히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처, 오도리찌, 스마일리, 문까지요. ]
[ 그렇습니다. 타석에 1번, 성수 초이. 한국 출신의 선수들끼리 만나게 됐습니다. 오늘 이 경기가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동시에 출장한 경기라고 하는군요. 와우. 탬파베이의 유격수 형진 리까지. 세 명이 한국인입니다. ]
지혁은 마운드에 오르기 전 내야를 한 번 돌아보았다. 문득 수비가 잘 도와줬으면 한다는 의식이 머리를 스쳤다.
‘안 돼.’
머리를 털어내 봤지만 안 좋은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좋은 투구로 이겨낼 생각이 먼저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다.
“볼!”
초구부터 볼이 들어간다. 최성수는 워낙 선구안이 좋은 타자였다. 그가 신시내티에서 전성기를 달릴 때에는 조이 보토와 더불어 악몽 같은 선구안을 자랑하기도 했다. 최성수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인식이 없지 않아 퍼져 있었다.
“볼!”
2구째. 바깥쪽 낮은 코스의 볼. 3구는 원바운드 되는 싱커. 시작하자마자 공 세 개가 모두 볼로 들어갔다.
‘푸우.’
4구째 던진 한가운데 힘없는 패스트볼. 구속도 88마일까지 떨어졌다. 무조건 가운데로 넣겠다는 생각으로 힘을 뺐다. 최성수가 방망이를 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휘둘렀으면 꼼짝없이 장타 코스였다.
5구째. 리베라는 커브 싸인을 냈다. 지혁의 손끝에서 커브가 떠나갈 때 최성수가 내딛는 앞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최성수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다. 한 템포 기다렸다가 벼락같은 스윙을 돌린다.
[ 우측으로 깊게 갑니다! 이 타구 깊은데요! 우측 폴대를... 빗겨갑니다. 파울. 살짝, 아주 살짝 빠졌네요. ]
‘이런. 썅.’
분명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한 템포 기다렸다가 허리와 손목 회전만으로 날린 타구였다. 하지만 까마득하게 날아가더니 폴대 안으로 들어올 뻔 했다. 만약 최성수가 타격감이 좋은 상태였다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는 홈런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이렇게 컨디션이 정말 안 좋은 날이 있다. 선수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를 가늠하지 못하는 날. 마운드에 올라서서 투구판을 밟을 때까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날. 오늘이 그 날인 모양이었다.
“볼! 베이스 온 볼스!”
선두타자 최성수가 떨어지는 싱커에 방망이를 내지 않았다. 이어진 타자 엘비스 앤드러스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을 힘들이지 않고 툭 건드려 1루수와 2루수 사이를 뚫어냈다. 정상수비였다면 잡을 수 있는 공이었지만 히트앤런 작전이 걸리며 텅 비어버린 공간으로 야속하게 공이 향했다.
[ 노아웃에 주자 1루와 3루. 3루에는 최성수, 1루에는 앤드러스가 나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기회를 잡은 텍사스. 타석엔 정말 뜨거운 타격감을 뽐내고 있는 프린스 필더가 들어섭니다. ]
1회. 원정 경기장. 생각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컨디션.
밋밋한 싱커, 어정쩡한 커브, 구속이 나오지 않는 패스트볼.
모든 조건과 환경을 고려했을 때, 오늘 지혁은 아마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이후, 아니 새로운 삶을 얻은 이후 최악의 투구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디로 던져도 맞을 것 같은데...’
거대한 덩치의 필더가 주는 위압감. 4월 한 달 동안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그 타격감. 양 코너에 들어차 있는 주자. 게다가 이번 시즌에는 커브의 담보로 잡혀 있는 선수 생명까지 걸려 있다는 조바심까지.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프린스 필더가 타석으로 걸어오는 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클레이튼 커쇼나 매디슨 범가너 같은 초특급 투수들은 말한다. 마운드 위에서 경기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 때 바로 자신의 공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만 들으면 참 쉬워 보이는 그 마인드가 바로 특급 투수들의 힘이다.
‘그게 되면 나도 초특급 투수지. 씨발.’
물론, 알면서도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볼!”
바깥쪽 걸쳐 들어간 초구가 또 볼로 선언됐다.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리듯이, 오늘 심판은 바깥쪽 존을 매우 좁게 형성하고 있다.
“타임!”
공을 받아주던 리베라가 타임을 걸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왜 그래?”
“공이 안 좋아. 어디로 던져도 맞을 것 같아.”
“흠. 그럼 맞아.”
“뭐라고?”
리베라의 대답이 건성이었다고 느낀 지혁은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
“맞춰 주라고. 넘어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계속 도망만 다닐 거야? 이기는 승부만 할 수는 없잖아. 그냥 지는 승부를 해. 일단 방망이에 공이 맞고 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거야.”
“괜히 올라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이기는 승부를 해야지.”
“너만 승부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뭔 개소리야?”
“일단 방망이에 공이 맞고 나면 우리 팀 아홉 명 모두의 승부야. 넌 그냥 평정심을 조금 가질 필요가 있어. 루키한테 바라는 건 네 공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야. 이제 막 메이저리그 올라온 놈이 자신감이 어딨어? 그냥 평소처럼 던져. 잘 되든 안 되든, 평정심을 가지라고. 결과는 야수들한테 맡기고.”
리베라는 지혁의 답도 듣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가 버렸다. 지혁은 로진백을 들어 손가락에 잔뜩 묻히면서 내야수들의 표정을 한 번씩 살폈다. 그리곤 저 멀리에서 집중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는 외야수들도 바라봤다.
“야. 뭐 그렇게 심각해?”
“어, 어?”
“그냥 치라고 줘, 임마. 이 근처로 오는 건 내가 다 잡아줄 테니까. 이 새끼 잔뜩 쫄아가지고... 정신차려!”
형진은 일부러 더 낄낄대면서 지혁에게 일침을 가했다. 순간 더램 불스에서의 기억이 떠올라서 지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형진은 유격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지혁을 향해 농담을 건넸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형진에게 공이 가고, 어김없이 처리해 줬다.
“피처. 마운드로!”
2루심이 지혁에게 주의를 줬다.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마운드에 올라가고 승부의 현장에 들어가고 나면, 투수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덕목들을 일일이 기억해낼 수는 없다. 마운드에서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다.
리베라와 형진은 그런 지혁을 한 번 일깨워 주었다. 평소처럼 던지면 된다.
‘그래. 너무 필요 이상으로 쫄았어. 맞으면 맞는 거지.’
지혁은 일부러 침을 퉤, 뱉었다. 지금까지 안 좋았던 투구를 뱉어내는 마음으로. 그냥 평소처럼 던져야 했다. 평소보다 안 좋은 공이더라도, 평소처럼.
“플레이!”
구심이 마운드를 향해 손짓했다. 지혁은 얼른 세트 포지션을 취했다. 리베라의 싸인대로, 그저 미트만 바라보면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위치에 싱커를 뿌렸다. 치면 치는거고, 맞으면 맞는 거다!
따아악!
오픈 스탠스의 필더가 바깥쪽 공을 힘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타구가 총알 같은 스피드로 지혁의 어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찔한 타구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지혁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관통한 타구는...
“아웃!”
등 뒤에서 2루심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짧은 시간 뒤 지혁의 왼쪽, 그러니까 1루 쪽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웃!”
동시에 글로브 라이프 파크의 홈 팬들이 긴 장탄식을 쏟아냈다. 지혁은 얼른 1루로 시선을 돌렸다. 주자였던 앤드러스가 1루 베이스에 손을 대고 엎어져서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라인드라이브 더블 아웃.
시프트 작전대로 2루 베이스 위에 서 있었던 유격수 형진이 직선타구를 잡아내자마자 그대로 1루에 빨랫줄 같은 송구를 했고, 앤드러스가 미처 복귀하지 못한 것이다.
“임마. 이 형님이 다 해준다고 했지!”
형진은 한층 더 환한 얼굴로 지혁에게 공을 건넸다. 글러브로 날아오는 공을 휙 낚아채며, 지혁은 그저 형진을 한 번 가리켜 주었다. 밥 한 번 사줘야겠다.
*
[ 5회말. 투 아웃에 주자는 꽉 들어찼습니다. 8번, 치리노스. 풀카운트 승부로 몰고 왔습니다. 투 아웃에 풀 베이스. 주자는 자동 스타트를 끊는 상황입니다. ]
와인드업 이후 스트라이크 존에 꽉 들어차는 공을 뿌렸다. 치리노스가 퍼올리듯 들어올린 공이 외야로 뻗어나간다. 지혁은 조마조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중견수 가이어가 낙구지점을 잡아낸 듯 크게 손짓하고 있었다.
후우. 공이 가이어의 글러브에 떨어지는 순간 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꾸역꾸역 버텨냈다. 5이닝 동안 투구수가 98개. 피안타는 7개였고 그 중 하나는 필더에게 맞은 투런 홈런이었다. 볼넷도 3개나 줬다. 그 중 두 개는 최성수한테 준 것이었다. 삼진은 하나도 잡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2실점으로 버텼다.
“지독하게 버텼네. 잘 했어.”
힉키는 농담을 반쯤 담은 진담으로 지혁을 위로했다.
“오늘 정말 힘드네요.”
“그런 걸 좋게 말하면 위기관리라고 하는 거야. 이제 쉬어.”
“네. 6회도 올라가라고 하실까 봐 긴장했어요. 자신 없었거든요.”
“어떤 멍청한 투수코치가 이런 피칭을 한 너를 또 올리겠냐?”
지혁은 자조적인 멘트를 뱉으면서도 웃었다. 피칭 내용은 정말 좋지 않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정말 최악의 컨디션이었는데도 기어이, 꾸역꾸역 승리투수 요건을 채웠다. 매 회 선두타자를 내보냈다. 만루 위기도 두 번이나 있었다. 2회 무사 만루 상황에서는 내야플라이와 병살타로. 4회 1사 만루에서는 파울플라이 하나와 제닝스의 멋진 호수비로 살아남았다.
‘마운드에 있을 때는 진짜 죽을 맛이었는데. 이런 날 또 결과가 따라오네. 이런 날도 있어야 던질 맛이 나지.’
정작 잘 던지고도 승리를 따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잘 던지지 못하고도 승리를 따내는 경우도 있다. 7대2로 벌어진 스코어가 뒤집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혁은 묵묵히 동료들을 응원했다.
*
“음식 식겠다. 빨리 들어요.”
“사모님, 잘 먹겠습니다!”
3차전 경기가 끝나고 난 뒤, 최성수의 집에서 모두 모였다.
“끈질기게 잘 버티데. 징글징글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이런 날도 있나 싶더라구요.”
“그래. 운도 좀 따라야제. 오늘 이겨서 벌써 4승이가?”
“예.”
식탁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을 내 온 최성수의 아내 덕분에 지혁 일행은 모처럼 한식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형진은 최성수와 그 아내에게 계속해서 살갑게 애교를 부렸고, 그 때마다 새로운 음식들이 접시 째 쏟아져 나왔다.
“지혁이 니는 계속해서 선발로 뛰었나?”
“예. 작년부터는 그랬습니다. 재작년까지는 5선발이랑 불펜 롱 맨 왔다갔다 했습니다.”
“맞나. 생각보다 잘하데? 신인인데 여유도 있어 뵈고. 게임하면 할수록 캐치해야 될 것들은 노련하게 캐치하고. 신인들은 눈앞에 딱 놓여져 있는 것들만 보는데. 이형진이처럼.”
“아, 선배님! 전 또 왜요.”
“니는 임마. 타석에 들어서서 뭘 노리고 있는지 다 보인다아이가. 내가 외야에서 수비하는데도 보이드라. 타석에서 여유가 하나도 없잖아. 근데 지혁이 임마는 마운드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안 보인다.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은 구른 놈들처럼 떡하고 서 있데.”
하하. 지혁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메이저리그에서 A급 타자라는 평가를 받는 대선배의 평가가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니는 잘 될 거 같다. 열심히 해라. 다저스에 희주 금마처럼 뺀질뺀질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마운드에서는 또 나름대로 잘 버티고. 피해갈 때는 잘 피해가고. 들어가야 될 때는 잘 들이받고.”
“감사합니다. 너무 과찬이십니다. 오늘 투구 내용도 안 좋았는데요.”
“오늘 투구에 불만족이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안타도 많이 맞았고, 볼넷도 많이 줬고...”
“니 타자들이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제?”
“예?”
최성수는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지혁을 쳐다봤다.
“타자들은 있다아이가. 투수가 잘 던져서 내가 못 치면 ‘아, 투수가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내가 졌는갑다’ 한다고. 그런데 투수가 못 던지는데도 게임에 못 이기면 절망한다고. ‘와, 투수가 저렇게 못 던지는데도 우리가 못 이기네.’ 이래 되는거라.”
음. 이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었다.
“이게 한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이런 경기를 하는 횟수가 많아지면 타자들이 그마이 너를 까다롭게 생각할거다. 이런 게임에서 이기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고. 지금 메이저리그에 보면 공도 안 빠르고 구위도 별로인데 끝까지 살아남는 놈들이 있잖아. 걔들이 마운드에서 주는 느낌이 딱 그런 거다.”
최성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기하듯이 얘기했다.
“아~씨. 왜 못 이기지? 공은 진짜 쉬운데. 칠만한데. 처음에는 딱 이런 느낌이거든. 근데 걔한테 몇 번 연속으로 지고 나면 얘가 잘 던지면 우린 진짜 끝난다. 이래 되가꼬 조바심이 난다고.”
“아아.”
“그게 투수들이 말하는 자신감이다. 자신감.”
뜬금없는 곳에서 자신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니도 봐. 오늘 같이 못 던졌는데도 이겼다아이가? 그럼 다음에 컨디션 좋을 때 다시 붙으면 질 거 같나?”
“아뇨.”
“그거라고. 그게 자신감이라고. 자신감은 잘 됐을 때만 얻게 되는 게 아니야. 이렇게 안 좋을 때도 결과적으로 자신감을 얻게 되는 거라. 그런 게 쌓이고 쌓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타자들을 생각에서 이기게 된다.”
갑자기 최성수가 태산같이 커 보였다. 방금 최성수가 해 준 얘기는, 지혁의 전생까지 합쳐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얘기였고, 또 비밀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