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79화 (80/204)

< 79 - 자신감과 평정심(2). >

“흐음.”

원정 7연전을 마치고 난 뒤, 휴식일. 아무도 없는 고요한 트로피카나 필드.

그라운드의 가운데. 볼록 솟아 있는 작은 언덕에 올랐다. 언덕의 가운데 딱딱한 투구 판에 지혁의 왼발을 대 본다. 오른발이 자연스럽게 편한 곳에 놓인다. 글러브를 끼지 않은 손이지만 이곳에 올라오면 오른팔이 본능적으로 구부러진다. 늘 가슴팍 앞에 글러브를 대던 곳으로.

지혁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비어있는 홈플레이트에 가상으로 포수를, 심판을, 그리고 타석에 타자를 그려 넣었다. 이미지 속의 지혁은 밋밋한 싱커를 던졌다. 한복판에서 살짝 높게 형성된 공. 하지만 이미지 속 타자는 그 공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헛스윙으로 돌아선다.

“자신감. 자신감이라...”

최성수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남겼다. 한 번도 타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만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 항상 최고의 공을 던질 수 있을지. 실투를 던지지 않을 수 있을지. 타자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타석에서 한 번 볼까.”

낯선 타석에서, 마치 최성수처럼 자세를 잡아 본다. 이곳에서 지혁을 상대한 타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마운드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봐, 문! 조명 내릴 시간이야. 적당히 하고 내려오라구.”

구장 경비를 담당하는 뚱뚱한 얼이 저 멀리서 한바탕 소리를 칠 때까지 지혁은 타석 근처를 서성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애쓰며, 다시 클럽하우스로 발길을 돌렸다.

*

2015년 5월 15일. 타겟 필드.

미네소타 트윈스 vs 탬파베이 레이스.

텍사스 원정 시리즈에서 3승1패를 거두고, 양키스와의 홈 시리즈를 스윕했다. 탬파베이의 흐름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상대는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의 도깨비. 미네소타 트윈스. 분명히 전력이 약한데도 지금까지 19승 16패로 탬파베이와 동률을 기록하고 있는 팀. 탬파베이만큼이나 흐름을 타고 있다.

시리즈 첫 경기에 선발 등판한 지혁은 1회부터 고전했다. 리드오프 브라이언 도지어는 끈질기게 지혁을 물고 늘어지더니 기어이 내야안타로 살아나갔다. 하지만 토리 헌터를 곧장 병살 처리했다.

만약 이 병살이 없었으면 대량 실점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마우어와 플루프에게 연속으로 빗맞은 안타를 맞았으니까. 하지만 5번 커트 스즈키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간신히 이닝을 막아냈다.

“오늘도 썩 좋지는 않나 보군?”

“네, 감독님. 릴리스가 잘 안 잡히네요. 마운드가 조금 높아요.”

“괜찮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 수비를 믿어 보라고.”

“음... 네.”

1회를 마치고 들어오는 지혁에게 랭카스터가 낮게 물었다. 다행인 것은 텍사스전과는 달리 컨디션에 딱히 이상이 있는 건 아니라는 점. 타겟 필드의 환경이 조금 낯설었던 탓이다.

마운드의 높이가 조금 높고, 흙이 조금 무르다는 느낌이 지혁의 밸런스를 묘하게 방해했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 투수들에게 이런 미묘한 변화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준다.

‘이상하네. 휴즈 때문인가?’

미네소타의 에이스 노릇을 하고 있는 필 휴즈는 조금 무른 흙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늘 미네소타의 선발이 바로 필 휴즈고, 그렇기 때문에 마운드에 물을 평소보다 조금 많이 뿌린 모양이었다.

미네소타 마이너리그 경기장들에서 꽤 오래 뛰었지만, 정작 타겟 필드의 마운드에 올라본 적은 딱 한 번. 그것도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갔었다. 마운드의 높이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지난 경기가 지혁의 컨디션에 이상이 있었다면, 이번 경기는 경기장 환경에 이상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해야 할까.

‘괜찮아. 자신감을 갖자고. 최성수 선배 말대로.’

지혁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독려했다.

*

3회말, 2아웃을 잡아 놓고 브라이언 도지어에게 솔로 홈런을 한 방 얻어맞았다. 커브를 보여주기 전 높은 패스트볼 승부를 들어간 것이 통타당했다. 지혁은 애꿎은 마운드의 흙을 툭 찼다. 세게 차지도 않았는데 투구판 근처의 흙이 뭉텅이로 떨어져나간다.

‘칫. 이번 공도 조금 뒤에서 놨어.’

홈런을 맞을 때의 본능적인 짜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지혁은 침착하게 그 짜증을 억눌렀다. 텍사스 전에서 당황했던 게 오히려 약이 된 기분이다.

오늘 경기.

그 이전까지의 투구들처럼 공이 아주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텍사스 전에서만큼 공이 엉망이지도 않았다. 분명히 투구 내용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1회보다는 2회의 공이 더 좋았고, 2회보다는 3회의 공이 더 좋았다. 릴리스포인트도 서서히 잡아나갔고.

그 과정에서 홈런을 맞은 것이다. 애런 힉스에게는 2루타를 허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타자들을 처리해냈다.

게다가 뒤에는 든든한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수비수들이 존재했다. 아마 수비의 신이 붙은 것 같은 키어마이어는 환상적인 수비로 빠지는 타구를 잡아 줬고, 롱고리아와 포사이드는 어려운 타구를 5-4-3 병살타로 연결해줬다.

“오케이. 다음에 딱딱한 흙에서 다시 붙으면 너네들 다 뒤졌어.”

6회말 한 타자를 잡아낸 뒤. 랭카스터 감독에게 들고 있던 공을 넘기면서 마운드를 내려오는 길에 지혁이 중얼거렸다. 내용이 안 좋아도. 투구에 불만이 있더라도. 심지어 얻어맞더라도 자신감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

2015년 5월 21일. 트로피카나 필드.

탬파베이 레이스 vs 오클랜드 애슬래틱스.

7회, 노 아웃, 주자는 2루와 3루.

‘내야로.’

지혁은 무조건 싱커를 던져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경기는 4대2로 리드하고 있었지만, 동점 주자까지 내보낸 이상 쉽게 승부를 볼 수는 없다. 볼넷과 실책으로 내보낸 주자들이라는 게 지혁의 심기를 거슬렸다.

따악!

싱커가 괜찮게 박혔다. 하지만 타석의 브렛 로우리는 마지막까지 공에 집중하며 밀어냈다.

“문!”

1루수 로니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강습 타구를 막아냈다. 로니가 글러브에 맞고 떨어진 공을 재빨리 주워 베이스 커버에 들어가는 지혁에게로 언더 토스를 보냈다.

“뭐야?!”

하지만 토스의 방향이 엉뚱했다. 지혁의 글러브가 있는 오른손 쪽이 아닌 맨손이 드러난 왼쪽으로 한참 쏠린 코스였다. 그마저도 지혁의 손에서 너무 멀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공.

지혁은 속도를 이기지 못했고, 공은 뒤로 빠져 1루쪽 더그아웃까지 데굴데굴 굴렀다. 백업을 들어오던 2루수 포사이드가 황급히 달려갔지만 그가 공을 주워들었을 때 이미 3루 주자는 물론 2루 주자까지 홈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세이프.”

포사이드의 송구가 리베라에게로 향하긴 했지만 육안으로도 2루 주자의 발이 훨씬 빨랐다.

“미안. 방금은 내 실수야.”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요.”

베테랑인 로니였지만 방금 수비는 정말 아쉬웠다. 어려운 타구를 잘 막아 놓고도 어이없는 송구 미스로 두 점을 모두 준 것이다. 지혁이 애꿎은 글러브를 팡팡 치며 마음을 삭히는 와중에 전광판에는 실책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에러가 3개...’

수비가 좋은 탬파베이지만 가끔은 이런 날도 있다. 오히려 마운드에 올라가는데 헛웃음이 나온다. 1회에도 아스드루발 카브레라의 실책으로 두 점을 줬고, 지금도 실책으로 다시 두 점. 그동안 수비의 도움을 엄청나게 받았으니 이렇게 까먹는 날도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점. 동점. 그리고 2루에 주자.”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등 뒤에 서 있는 로우리만큼은 절대로 홈에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지혁은 남아있는 힘을 전부 끌어내 전력으로 던졌다. 오클랜드의 8번 샘 펄드가 기습적으로 앞으로 달려나오며 번트 자세를 취했다.

탁!

“에반!”

롱고리아가 재빨리 대쉬해 들어왔다. 그리곤 맨손으로 굴러오는 공을 잡아 1루에 뿌렸다. 2루 주자가 3루로 가는 건 막을 수 없었지만 펄드는 1루에서 잡아낼 수 있었다.

“땡큐. 나이스 수비에요.”

“오늘은 나이스라는 말을 듣기가 민망하네. 저 점수는 어떻게든 지켜보자고.”

롱고리아도 야수들의 연이은 실책이 마음에 걸리는 듯 좋은 수비를 하고도 멋쩍어한다. 지혁은 일부러 활짝 웃어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어필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일 정도로 강한 세뇌를 걸 필요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악을 쓰며 패스트볼을 꽂아넣었다. 몸쪽 가슴께. 에릭 소가드의 가슴팍 앞으로 찔러 넣은 크로스카운터가 존을 통과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후우. 1사 3루에서 삼진으로 한 타자를 막아냈다. 지혁은 집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역전만큼은 죽어도, 절대로 주지 않겠다. 않아야만 하고.

탁!

“내 꺼! 내가 할게!”

다행히도, 에릭 번스의 타구는 완전히 빗맞으며 내야에 높이 떴다. 포수인 리베라가 마스크를 벗어제끼며 크게 외쳤고 떨어지는 공을 안전하게 잡아냈다.

“고생했어.”

7회를 마무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지혁에게 랭카스터 감독을 포함해 야수들이 하나같이 달려들어 손을 내밀었다. 수비의 도움을 받지 못한 투수를 걱정하는 마음들이 묻어났다.

“여어~ 땡큐 땡큐!”

지혁은 일부러 농담 섞인 말로 응답했다. 슬쩍 미소를 짓기도 했다. 패전처리로 오래 뛰어서일까. 아니면 기약 없는 마이너리그 생활을 오래 버텨내서일까. 안 좋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만큼은 익숙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 더 나아가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다고 믿어버리는 것. 팀이 경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라면 누구나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랭카스터는 더그아웃 한 쪽 구석에서 수건을 머리에 얹어두고 숨을 몰아쉬는 지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평정심이 괜찮은 놈이야.’

라고.

*

대 텍사스 레인저스. 5이닝 2실점. 투구수 98개. 승리.

대 미네소타 트윈스. 5.1이닝 1실점. 투구수 102개. 노 디시전.

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7.1이닝 5실점 2자책점. 투구수 104개. 노 디시전.

5월이 지나가는 동안, 지혁은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 과정에서도 세 경기를 버텨냈다. 패전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신인왕을 따질 때는 승리나 패배, 평균자책점 같은 고전적인 지표가 꽤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하니까. 미네소타 전에서 불펜이 승리를 날려먹었지만, 오클랜드 전에서 타자들이 패전을 면하게 해 줬다.

4승 1패, 평균자책점 2.64.

“이 정도면 벌어둘 만큼 벌어 두긴 했어. 그래도 노 디시전 중에 몇 승만 더 건졌으면 좋았을텐데...”

지혁은 시애틀의 원정 호텔 방 침대에 누워 태블릿을 뒤적거렸다. 이번 시즌 신인왕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내셔널리그의 신인왕을 받는 선수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크리스 브라이언트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는 대체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경쟁자만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지혁이 추려낸 후보 이외의 선수들은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는 선수들뿐이었으니까.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유격수, 카를로스 코레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격수, 프란시스코 린도어.

훗날 LA 다저스의 코리 시거, 콜로라도 로키스의 브랜든 로저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댄스비 스완슨과 함께 ‘5대 유격수’로 자리잡는 선수들. 그 5대 유격수 중에서도 제일 앞서나가는 선수들이다.

코레아와 린도어 모두 아직은 트리플 A에서 뛰고 있다. 많은 구단들이 유망주를 끌어올리는 시점인 6월에 메이저리그에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지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 명 더 있었다.

전생과는 다르게 내셔널리그가 아닌 아메리칸리그로 넘어온 ‘퀵 팝’. 페르난도 멘데스. 지금까지 타격 성적은 .242에 홈런 3개에 머물고 있지만, 이 부족한 공격력을 수비로 전부 메울 만큼의 임팩트를 뽐내고 있다. 도루 저지가 무려 12개였다. 두 달도 채 안 치렀는데.

게다가 멘데스의 공격력은 한 시즌도 채 안 되어서 각성할 것이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이 선수들을 다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적과, 경기 내용에서의 임팩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했다. 임팩트로는 멘데스가 벌써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고, 성적이라면 앞으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올 코레아나 린도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혁은 이 선수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 아니, 이 선수들을 제쳐야만 한다.

그래야 신인왕을 차지할 수 있다. 보통 신인왕이 아니다. 선수 생명이 4년이나 걸린 신인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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