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80화 (81/204)

< 80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

시애틀. 미국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워싱턴 주에서도 가장 북서쪽에 위치한 대도시. 스페이스 니들이라는 엄청난 랜드마크가 존재하는 곳이자, 전 세계 커피 프랜차이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별다방’의 1호점이 존재는 곳.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 지혁에게 시애틀이란.

눈물나게 처절한 마이너리그 생활 끝에 결국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수 있었던 곳. 그 이후 돌고 돌아 다시 은퇴하던 날, 유니폼을 입고 있던 곳이다. 지혁의 인생에 ‘메이저리그’라는 단어를 새겨 넣은 곳이고, 마무리한 곳인 셈이다.

“땡큐.”

지혁은 북적이는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일부러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스타벅스 1호점까지 걸어왔다. 이곳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라는 걸 들은 뒤 항상 이곳의 커피를 마셨다. 1호점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음. 똑같네.”

한 모금 커피를 빨아들인 지혁이 웃었다. 괜스레 감상에 빠지게 된다. 지혁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던 2021년에도, 은퇴하던 2028년에도, 그리고 지금 새로운 2015년에도 커피는 같은 맛이다.

커피뿐이 아니다. 시애틀의 전경은 변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와서인지, 오히려 지혁이 있을 때보다 세련되어 보이는 것들도 왕왕 보였다.

“그대로구나. 시애틀.”

달라진 것은 지혁 뿐이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유니폼을 입고 세이프코 필드에서 패전처리로 근근히 살아가던, 어쩌다 한 번씩 메이저리그에 얼굴을 비추며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던 지혁은 이제 없다. 싱커를, 그리고 커브를 던지는 지혁이 미국 동남쪽 끝에 위치한 탬파베이 레이스의 유니폼을 입고 다시 이곳을 찾았을 뿐이다.

*

“문.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래? 그럼 됐고. 평소랑 분위기가 조금 달라서.”

“내가?”

“응. 너 눈이 좀 살벌한걸.”

경기 시작 10분 전. 운동장 한 편에서 방방거리며 뛰어다니는 시애틀의 마스코트 무스를 바라보고 있던 지혁에게 키어마이어가 다가왔다. 팔과 어깨를 안쪽으로 쭉 잡아당기며 장난이나 치려고 다가왔던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지혁이 뿜어내는 묘한 승부욕 때문에 쉽게 장난을 걸 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평소랑 다를 거 없어. 그냥, 오늘은 꼭 이기고 싶어서.”

“이기고 싶은 건 언제나 똑같지, 뭐. 알겠어. 눈빛 좀 풀어. 내가 오늘 제대로 도와줄 테니까.”

“니가? 요새 방망이 너무 안 맞던데.”

“장난을 해도 꼭... 나쁜 놈. 수비에서는 확실하게 도와줄게.”

“흐흐. 그래.”

지혁은 키어마이어가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틱틱 치며 말했다. 경기에 들어가면 어둑어둑해질텐데 무슨 선글라스를.

“어쨌든. 편하게 던지라고, 친구.”

“오케이.”

선글라스를 벗고 유니폼 앞에 끼워버린 키어마이어가 배트를 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이프코 필드가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

[ 잡아당긴 타구! 우측으로! 우측으로 깊게! ]

호쾌한 타구음이 그 종착지를 짐작케 했다.

[ 넘어갑니다! 리드오프 홈런! 러버시리즈에서 선취득점을 가져가는 탬파베이 레이스! 케빈 키어마이어가 선두타자로 나서서 홈런을 기록합니다. 시즌 3호포. ]

케빈 키어마이어가 3루 베이스를 돌면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게 눈에 똑똑히 보였다. 지혁은 가장 앞에 나가서 더그아웃에 들어온 키어마이어의 뒤통수를 신나게 때리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좋았어!”

“후우히이! 나이스 배팅!”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탬파베이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킹 펠릭스’를 만나서 완투승을 헌납한 상태였다. 어제 경기에서 펠릭스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뽑아낸 점수는 딱 한 점. 뽑아낸 안타는 딱 두 개. 그 중 하나가 롱고리아의 솔로 홈런이었던 탓에 완봉을 간신히 면했다.

비참한 타격을 선보인 이후 치러야 하는 3차전. 경기의 첫 번째 아웃카운트도 나오기 전에 담장 너머로 공을 날려 보낸 것은 사기를 높이는 데 가장 주효한 결과다.

“문. 선물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이제 네 차례야.”

1회초를 마치고 수비를 하기 위해 외야로 달려가던 키어마이어가 갑자기 지혁을 향해 돌아보더니 씩 웃어보였다.

“왜 저래, 갑자기?”

갑자기 살갑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뭐, 괜찮다. 점수도 뽑아 줬고. 이제는 세이프코 필드에 돌아온 것을 만끽해야 할 시간이었다.

[ 문. 개막 시리즈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주 좋은 활약이에요. 9경기 등판해서 4승 1패. 시즌 열 번째 등판입니다. ]

[ 이제는 선발 로테이션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봐도 되겠죠. 작년에 맷 무어, 그리고 올해 알렉스 콥. 두 선수가 장기 부상으로 자리를 비웠으니까요. 이 페이스대로라면 시즌 말미에 맷 무어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선발 자리를 꽉 잡을 수 있겠습니다. ]

[ 시애틀에는 처음 방문합니다. 1회말. 오스틴 잭슨, 세스 스미스, 그리고 로빈슨 카노를 상대하겠습니다. ]

시애틀의, 세이프코 필드의 마운드여서일까. 마운드에 올라섰는데 익숙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발을 비스듬히 대고 선 투구판의 느낌도, 마운드의 흙도, 로진의 느낌까지도. 모든 것이 익숙했다.

마운드에 올랐을 때 기분 좋게 내려다보이는 광경. 타자와 포수, 구심 뒤의 백네트, 관중석에서 치킨 타코를 먹는 사람들까지. 시애틀의 하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가씨가 마치 지혁의 팬처럼 느껴진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바깥쪽에 꽉 찬 공. 커브가 놀랍도록 아름답게 떨어져내렸다. 백도어성 커브에 손도 내지 못하고 오스틴 잭슨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 시작이 훌륭합니다. 첫 타자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문. ]

시애틀의 첫 타자를 돌려세울 때의 묘한 흥분감이 지혁을 감싸안았다. 이제는 시애틀이 아닌 탬파베이의 네이비색 유니폼을 입고, 시애틀을 상대하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또 익숙했다.

[ 4구, 당겼습니다. 2루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갑니다. 포사이드가 잡아서 여유 있게 1루로. 두 번째 아웃입니다. ]

[ 오늘 공이 상당히 괜찮은데요? 잭슨을 삼진 처리했던 백도어 커브도 대단히 좋다고 느꼈는데, 방금 전의 싱커도 무브먼트와 제구가 완벽했습니다. ]

[ 좋은 컨디션으로 보이는 문. 로빈슨 카노를 상대합니다. 초구부터 휘두릅니다! 큰 스윙이었지만 완전히 빗맞고 말았네요. 키어마이어가 앞으로 내려오면서 여유 있게 공을 잡아냅니다. 쓰리 아웃. 2회초로 갑니다. ]

“좋아, 좋아.”

지혁은 마운드를 내려오며 슬쩍 미소지었다. 오늘은 아마,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만 같았다. 물론 지혁이 아니라 시애틀 선수들에게 말이다.

*

우우우-

야유가 가득 울려퍼진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들에게 긴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유격수로 나선 브래드 밀러가 너무 쉬운 타구를 가랑이 사이로 빠트려 버렸다. 시애틀의 선발 투수 J.A.햅은 이미 몇 차례나 화를 냈지만 또 다시 화를 내고 있었다.

시애틀의 야수들은 오늘 왜인지 몰라도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아웃카운트 10개 밖에 잡지 못했는데 그 동안 기록한 에러가 세 개. 게다가 타석에서는 아홉 명 모두 범타로 물러났다. 팬들이 화가 날 만도 하다. 아름다운 날씨를 자랑하는 수요일 밤, 경기 내용은 전혀 아름답지 못했으니까.

“이쪽 사람들은 정말 가차 없네.”

“그러게. 근데 성적을 보면 그럴 만 해.”

“기대감이 잔뜩 올라가 있었을 테니까. 서부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며.”

4회초가 길어지자 더그아웃 난간에 몸을 기댄 선수들이 두런두런 잡담을 나눴다. 한때 프라이스의 트레이드 대상이기도 했던 타이후안 워커와 제임스 팩스턴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있고, 2선발로 자리잡았던 이와쿠마 히사시는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오로지 킹 펠릭스만이 사이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역투하고 있다.

투수진의 단체 부진보다 더 심각한 것은 타자들의 단체 부진이었다. 볼티모어에서 데려온 홈런왕 출신의 넬슨 크루즈만이 제 성적을 거두고 있을 뿐. 로빈슨 카노, 카일 시거가 땅을 파고들어갈 정도로 추락했고 더스틴 애클리나 마이크 주니노 같은 유망주들은 전혀 성장세를 보이지 않았다.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팀이 승률 5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인 셈이다.

따아악!

휘이익. 지혁은 본능적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아스드루발 카브레라의 타구는 멀리멀리 뻗어나가 담장을 넘겨버렸다. 시애틀의 선발 J.A.햅이 일찍 강판되어 버렸다.

*

4회는 아주 길었다. 탬파베이가 타선 한 바퀴를 돌리고 세 타자가 더 들어서는 동안 7점을 몰아서 올렸다. 스코어는 8대0이 되었다. 모처럼 탬파베이가 화끈한 공격력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졸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는 듯했다. 덕분에 4회초 공격에 걸린 시간만 30분이 넘어갔다.

꽤 오랜 시간을 쉬다가 마운드에 올라온 탓일까? 높은 패스트볼을 선택했던 초구가 살짝 가운데로 몰렸다. 시애틀의 1번 오스틴 잭슨은 첫 타석의 루킹 삼진을 마음에 담아뒀던 듯 초구부터 방망이를 휘둘렀다.

[ 잘 맞은 타구가 뒤로 갑니다. 센터 쪽 뒤로... 넘어가나요? 깊은 쪽에서! 날아오릅니다! 케빈 키어마이어! ]

[ 와우. 이건 미쳤습니다. 크레이지한 수비네요. ]

[ 이 공을 잡아냅니다! 펜스에 부딪히면서 넘어가는 공을 건져냅니다. 세이프코 필드의 가장 깊은 곳을 넘어갈 타구를 훔쳐버렸습니다! ]

지혁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정말 제대로 한 건 해 주고 있다. 세이프코 필드의 넓은 외야를 혼자서 지배하고 있었다. 중견수 키어마이어가.

지혁은 얼른 모자를 벗어 이리저리 휘두르며 키어마이어에게 감사의 뜻을 날렸다. 키어마이어도 기분이 좋은 듯 자신의 가슴팍에 끼워 놨던 선글라스를 빼 머리 위로 빙빙 돌려댄다.

“저거 아직도 끼고 있네. 하여튼 쟤도 정상은 아니라니까.”

정상은 아닌 놈이긴 하지만, 수비에서만큼은 메이저리그 정상에 있는 놈이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작년에 데뷔한 2년차 선수라도 믿을 수 없는 수비력이다. 심지어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수비를 잘 한다는 유격수 안드렐톤 시몬스보다 수비 지표가 더 좋았다.

메이저리그 전체 수비수 순위에서 1위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케빈 키어마이어라는 수비 괴물이 외야에 떡하니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에, 탬파베이의 투수들은 자신 있게 하이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세스 스미스를 상대로 다시 높은 패스트볼을 뿌렸다. 90마일밖에 나오지 않은 공이었고, 이 공도 외야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키어마이어가 또 잡아냈다.

시애틀의 선수들은 아마 이게 꿈이었으면 싶을지도 모른다. 꿈이라면 악몽이겠지만. 이것저것 다 잡아내는 괴물에 시달리는 악몽. 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시애틀의 간판이자 3번인 슈퍼스타 로빈슨 카노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잠도 못 자게 해 줄 거라니까.”

*

“헤이, 문. 이 정도면 충분히 선물이 됐지?”

“응. 왜 그렇게 미친놈처럼 뛰어다녀? 살살해, 살살. 너 등은 괜찮아? 세게 부딪친 것 같던데.”

“멀쩡하지. 난 워낙 튼튼한 몸이라.”

키어마이어가 고릴라라도 된 양 가슴을 퉁퉁 쳤다.

“어쨌든 이 정도면 훌륭한 생일 선물이 됐길 바란다고. 친구.”

키어마이어가 활짝 웃었다. 순간 지혁은 당황했다.

생일은 이미 4일 전에 지나갔는데...?

오클랜드 전에서 투구를 했던 때가 지혁의 생일 전날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휴식일이어서 집에서 푹 쉬었다. 패트릭과 연두와만 조촐하게 케이크 하나를 자르며 조용히 보냈다.

음. 아마 누군가한테 잘못 들은 모양이다.

“문, 생일이야?”

누군가가 되물었다.

“아. 생일...이긴 했지. 며칠 전에.”

“뭐라고?!”

키어마이어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지가 인정하지 않으면 별 수 있겠냐마는.

어쨌든 5회초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키어마이어는 뭔가 단단히 손해를 봤다며 계속해서 지혁의 옆을 서성거렸다.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녀석이 귀여워서 그냥 두었다. 생일을 착각했으면 좀 어떤가. 미친 수비를 계속해서 해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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