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81화 (82/204)

< 81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2). >

5회초 마지막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키어마이어는 귀신 같이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키어마이어는 여전히 뭔가 억울한 표정이었다. 기특한 짓 한 번 하려다가 혼자 실망한 모습이라니.

조금 멍청하지만 수비를 잘 하고 착한 녀석이다. 들어오는 키어마이어의 엉덩이를 툭 쳐주면서 마운드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문.”

“네, 감독님.”

“지금 투구수가 58개. 최대한 투구수를 줄이는 데 신경 써. 끝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돌아가야 하니까. 투수를 아끼고 싶군.”

“아아. 알겠습니다.”

랭카스터는 지난 두 경기에서 불펜 투수를 너무 많이 쓴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여기가 웬만한 곳이었다면야 평소처럼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시애틀. 오늘 경기가 끝나면 플로리다까지 비행기를 타고 4000km를 날아가야 한다. 그리고 내일 바로 경기가 있으니, 투수를 최대한 아끼는 게 좋다.

“지금이 58개... 타이밍이 대략 100개 내외라고 보면. 한 이닝에 10개씩으로 해결하면 8회까지는 될 수도 있겠네.”

지혁은 중얼거리며 투구판을 밟았다. 투구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공격적인 피칭을 해야 한다. 삼진은 없어도 좋다. 대신 볼넷도 없어야만 한다. 스코어가 이미 8점 차이로 벌어져 있으니 맞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존 안으로 때려 넣으면 된다.

물론 이런 투구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동반하는 투구다. 투구수를 아껴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스트라이크 두 개를 존 안에 공격적으로 꽂아 넣었다. 그 이후 3구째, 살짝 도망가는 싱커가 존을 아슬아슬하게 걸칠 즈음. 지혁의 시야에서 순간적으로 공이 사라졌다.

‘잡히지 않나? 멀리 못 갈 것 같은데.’

지혁은 뒤를 돌아본다기보다는 하늘을 쳐다본다는 개념으로 공을 쫓았다. 우주선의 도시 시애틀의 밤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진 미사일 같은 공이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다.

“뭐야?”

그리고 얼마 뒤 폭죽이 쏘아 올려졌다. 좌익수 제닝스가 펜스에 대롱대롱 매달려 봤지만,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공이 떨어졌다.

“뭐 이딴 공이 다 넘어가고 난리야?”

화가 조금 났다. 아니, 갈수록 화가 많이 났다. 물론 넬슨 크루즈는 지난해 홈런왕이었던 타자고 아무리 잘 던진 공이더라도 순수한 힘만으로도 넘길 수 있는 타자다. 하지만 이런 공이 나오는 건 이상했다.

지혁이 타격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방금 이 홈런 타구는 그야말로 빗맞다시피 한 공이었다. 그렇게 낮지도 않은 공을 억지로 퍼올린 공. 처음에는 수직으로 떠오른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꾸역꾸역 뻗어나가더니 기어이 담장을 넘어갔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타구. 우락부락한 크루즈가 다시 지혁의 시야에 들어오더니 유유히 홈플레이트를 밟고 지나간다.

저 힘의 근원에는 약물이 녹아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약물로 이미 징계를 받았던 선수니까. 메이저리그가 아무리 괴물들의 천국이라지만 이 홈런은 약물의 힘이 아니었다면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씨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욕지기가 튀어올랐다. 허탈하기도 했지만 또 짜증나기도 했다. 다음 타자인 카일 시거를 상대로 한 초구 패스트볼이 95마일이 찍혔다. 지혁의 인생에서 기록한 최고구속이었다. 분노가 힘을 더 끌어낸 모양이었다.

‘후우. 기분 더럽네.’

5회말. 넬슨 크루즈에게 어이없는 홈런을 한 방 허용하고 난 뒤. 카일 시거, 로건 모리슨, 브래드 밀러를 모두 삼진 처리했다. 95마일짜리 공이 두 개가 더 나왔고 투구수는 17개였다. 예상보다 투구수가 늘어난 건 속에서부터 화가 일렁인 탓에 제구가 조금 엇나갔기 때문이었다.

“요~ 문. 나이스.”

“95마일이야. 컨디션 미쳤는데?”

속도 모르는 야수들 몇 명이 지혁에게 다가왔다가 움찔했다. 지혁은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잠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기 위해 더그아웃을 빠져나왔다. 세이프코 필드의 원정 라커룸 복도는 매우 비좁은 편이었다. 한 쪽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시애틀 밤하늘에 뜬 별처럼 높이 치솟았던 공이 펜스를 넘어갔다. 앞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높이 솟았던 공이.

“하... 짜증.”

이게 약빨인 건가?

지혁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물론 크루즈가 지금도 약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전력이 있던 선수에게 수시로 도핑테스트가 들어가고 있으니, 지금은 아닐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분은 정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러웠다. 갈수록 열이 더 뻗쳐 왔다.

지혁은 화장실에서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평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조금씩 머릿속에서 이상한 의문이 솟구치려 했다.

지혁은 일부러 팀의 투구 싸인을 한 번 되돌려 읊었다. 주루 코치의 싸인도 전부 떠올렸다. 마치 애국가를 부르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다른 것에 집중했다.

“후우우.”

촤르륵.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다시 한 번 얼굴에 뿌렸다.

일단 지금은. 일단 지금은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잡다한 것들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넬슨 크루즈의 약물의 힘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이상한 홈런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눈앞의 경기를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

6회말.

시애틀의 선두타자 더스틴 애클리의 타구가 애매하게 빗맞으며 1루수의 키를 살짝 넘겼다. 그리고 이어진 타자 주니노는 유격수 아스드루발 카브레라의 옆을 살짝 빠져나가는 좌전 안타를 때렸다.

“집중. 집중이야.”

마운드 위에서 집중하지 못하면 그 순간 무너져버린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이 경기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지혁은 정말 필사적으로 버텼다. 수비의 실책이 우루루 튀어나왔던 오클랜드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힘든 것 같았다.

[ 6회 들어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문. 타석에는 오스틴 잭슨. 오늘 2타수 무안타.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

[ 시애틀의 타자들이 공격적으로 휘두르고 있죠. 지난 회 크루즈도 그렇고, 이번 회 애클리와 주니노 모두 2구 안쪽에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탬파베이의 배터리는 생각을 잘 해야 할 겁니다. ]

[ 초구를 던집니다. 초구부터 때립니다! ]

주자가 나가면 지혁은 당연히 싱커를 선택한다. 내야로 굴려서 병살타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오스틴 잭슨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싱커라는 공이 좋은 점은, 싱커라는 것을 알고 치더라도 땅볼이 나올 확률이 높은 공이기 때문이다. 잭슨이 바깥쪽으로 멀어지는 공을 당긴 순간 공은 내야로 구를 수밖에 없었다.

[ 롱고리아가 건져냅니다, 공은 2루로, 1루로! 더블 플레이! 5-4-3의 더블 플레이. 노 아웃 1,2루의 찬스가 한번에 2아웃 3루로 변해버립니다. ]

[ 초구부터 노린 건 좋았는데요. 이번 공도 바깥쪽으로 가긴 했지만 애매한 높이였거든요. 하지만 싱커의 위력으로 그라운드볼을 유도해냈네요. 참 루키답지 않은 선수입니다. 훌륭한 선택이었어요. ]

[ 시애틀은 이 경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이번 이닝에 점수가 반드시 필요했을 텐데요. 아직 이닝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웃카운트 두 개를 헌납해 버렸습니다. ]

다행이었다. 싱커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개 정도 높게 들어갔는데 배트가 제 궤도로 따라오지 못했다.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아놨으니, 등 뒤에 있는 주자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설령 들어온다고 해도 한 점이니까. 점수차는 여전히 많이 난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패스트볼 두 개 뒤에 커브. 전형적인 패턴이고, 빠르게 승부에 들어갔다. 세스 스미스는 몸쪽 커브를 지켜만 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시애틀 타자들에게는 악몽 같은 밤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

“인터뷰는 여기까지. 이제 이동해야 합니다.”

클러비들은 이미 진작에 선수들이 짐을 다 옮겨놓았다. 샤워를 끝내고 인터뷰까지 마치고 나자 노곤함이 밀려들었다.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8이닝까지 버텨주다니. 덕분에 투수 운용에 힘이 실릴 거야. 비행기 안에서 곧장 자라고.”

“네.”

비행기 안까지 갈 것도 없이, 세이프코 필드를 벗어나는 원정 버스 안에서부터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잠들었다. 음악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끼운 채 지혁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녹초가 다 된 몸은 자고 싶어하는데 머리가 너무 팽팽하게 돌아가서 잘 수가 없었다.

‘약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약물의 힘이 남아있기는 하겠지만...’

크루즈의 홈런. 그 타구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눈을 감았지만 지혁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가 났던 건 그 타구가 약물의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야. 부정한 힘이라서. 치트 플레이라서. 약물은 치트키라서!’

넬슨 크루즈에게 맞아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약물을 투여했던 전력이 있는’ 넬슨 크루즈에게 맞아서 화가 난 것이다.

막말로 지금 야구판에 있는 선수들 중에 약물을 한 선수가 넬슨 크루즈만 있는 것도 아니다. 리그를 강타하고 최정상의 자리를 점령했던 많은 선수들이 약물을 투여 받았다. 양키스의 에이로드도 그렇고, 보스턴의 오티즈도 그렇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배리 본즈나 로저 클레멘스가 그렇고.

마이너리그에는 여전히 약물이 횡행하고 있다. 지혁도 몇 명 알고 있다. 당장 같은 팀의 콜로메만 해도 지난 시즌 마이너리그에서 도핑테스트에 걸렸다.

약물의 힘을 빌리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스포츠에서는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규정으로 정해 놨고, 약물 투여는 규정을 위반한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부정한 힘에 진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 그런 것이니까.

‘하아...’

문제는.

부정한 힘이라는 것에서 스스로는 자유로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지혁은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나서 더욱더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

선발투수는 비행기에서 특별히 1인석에 앉는다. 지혁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좌석의 커튼을 닫아버리고 칸막이도 쳤다. 희미한 주황 조명만 아주 살짝 켜 놓고, 오늘의 투구를 돌려보았다. 5회말에 멈춘 영상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넬슨 크루즈의 약물이 치트키라면.

신에게서 재능을 받은 건 치트키가 아닌 것인가?

남들 모르게 약물을 투여받고 근육량과 집중력을 끌어올린 채 경기에 나서는 것과.

브랜든 웹이 던지던 싱커와 후지 미유타가 던지던 커브를 던지고 있는 것은.

차이가 있는가?

“자넨 생각이 너무 많아.”

헤드셋 안으로 퍼지는 신의 목소리 때문에 지혁은 두리번거렸다. 마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말을 해도 좋네. 들리지 않게 해 놓았으니.”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

“... 네.”

“자네도 이 벽에 부딪힐 줄 알았어.”

신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들은 재미있지.”

시애틀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비행기 안. 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혁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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