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 샌디 쿠팩스, 드와이트 구든, 그리고 문지혁. >
“내가 샌디 쿠팩스를 찾아갔던 건 그가 은퇴하자마자였어. 46살 때였지.”
신은 쿠팩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들어왔던 야구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야구에 미친 사람이었지. 원래의 생에서 39살까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뛰고, 42살까지 마이너리그에서, 46살까지 독립리그에서 야구를 했으니까. 그가 엄청난 패스트볼과 커브를 던졌던 건 교환할 수 있는 선수 생명이 길어서였다네.”
“저도 더 던질 수 있었는데.”
“자네가 은퇴하겠다고 결심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거기서 선수 생명은 끝난 게야.”
신은 픽 웃어보였다.
“어쨌든. 쿠팩스는 나와 계약을 했고, 그의 선수생명 중 10년을 투자해서 패스트볼을 키워냈네.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말이지. 그리고 커브에 3년을 넣었지. 나이 서른까지만 딱 야구를 하겠다고.”
신은 그 때를 떠올리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는 약물이라는 개념도 잡혀 있지 않은 시절이었어. 쿠팩스는 리그를 단숨에 초토화했지. 나도 전율했고, 그도 전율했다네. 다시 이런 투수를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전율은 오래 가지 않았어.”
지혁이 알고 있는 샌디 쿠팩스의 선수 생활은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그 어떤 투수보다 압도적인 임팩트를 뽐냈다. 사이영 상 수상을 세 번 했는데, 그 세 번 모두 만장일치로 뽑힌 전무후무한 투수다.
“자네와 같은 의문에 부딪혔거든. 이건 스스로의 능력인가? 아니면 나는 야구라는 게임에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인가? 그는 괴로워했어.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 야구라는 게임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네.”
“후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넬슨 크루즈에게 홈런을 맞고 난 뒤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말로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서른에 은퇴했네. 선수생명이 3년 남아 있었어. 하지만 그냥 은퇴해 버렸네. 팔꿈치 수술을 하는 데 자신의 생명을 쓰고도 1년 정도는 더 던질 수 있었는데도.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게야. 스스로가 야구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신은 지혁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기다렸다. 숨막히는 고요함 속에 몇십 분이 그냥 흘러갔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 드와이트 구든.”
“구든이요?”
“그래. 그 친구는 쿠팩스가 고민했던 건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어. 최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나서도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조금씩 선수 생명을 희생했지. 그리고 예정대로라면 은퇴했어야 할 시점이 다가오자 점점 정신이 망가져갔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재능은 찬란하게 빛이 났다네.”
쯧. 신은 입을 한 번 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예정된 선수 생명이 끝나는 날에도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지. 약속된 날이 지나가게 되면... 음. 공을 던지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재능들은 떨어져 나가게 되네. 자네의 경우 싱커와 커브를 습관적으로 던질 수야 있겠지만, 구속도, 구위도, 제구도 모두 망가질 거야. 순수한 자네가 던지는 공이 될 테니까. 구든도 그랬네. 재능이 떨어져나갔지. 구속은 떨어졌고, 제구도 허술해졌지.”
“그래서 마약에...”
“맞아. 야구 외적으로는 마약에 의지했고, 야구 내적으로는 약물에 의존했지. 한 번 얻어낸 재능의 맛을. 한 번 차지한 정상의 자리가 주는 쾌감을. 결코 잊지 못했던 게야.”
똑같이 신의 축복을 받았던 위대했던 두 투수. 샌디 쿠팩스와 드와이트 구든. 하지만 두 사람의 말로는 완전히 달랐다. 샌디 쿠팩스는 영원불멸히 위대한 투수로 기록에 남았고, 드와이트 구든은 지금도 마약중독으로 시달리고 있다. 한 사람은 영웅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탕아가 되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두 녀석의 결과는 예상된 것이기도 했어. 나에겐.”
“그건 무슨 말이죠?”
“내가 자네에게 왜 찾아왔는가? 기억나나?”
“제가... 야구판에서 가장 치열하게 노력한 사람이라고 하셨죠.”
“그래. 자네의 경우는 노력 때문이었지. 내가 전 세계에 야구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샌디 쿠팩스와 드와이트 구든을 선택했던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노력 때문이 아니었나 보군요?”
클클. 신이 실소를 흘렸다.
“샌디 쿠팩스는 가장 야구를 사랑했던 사람이었어. 심지어는 야구의 신인 나보다도 더! 그런 녀석에게 기회를 안 줄 수 없었지. 그러니 녀석이 자신의 마지막을 예정보다 이른 은퇴로 결정지은 걸 게야. 스스로가 사랑하는 야구를, 스스로가 망치고 있는 것 같았던 게지.”
“그렇다면 구든은...?”
“가장 지독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거든. 탐욕. 가장 탐욕스러운 녀석이었어. 자신이 세계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최고여야만 하는. 그런 녀석이었지. 덕분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커브를 던지기도 했고. 하지만 그 끝은 어떤가? 그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다가 끝내 그리 되어버린 게야.”
지혁은 신의 이야기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쿠팩스, 구든. 다른 이유로 신에게 선택받은 두 사람. 신에게서 받은 축복을 이용해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던 두 사람.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재능을 받은 이유에 충실했던 거로군요.”
“흐흐흐... 하하하!”
갑자기 신이 크게 웃어버리자 화들짝 놀란 지혁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답이네!”
신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답을 맞출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주 똑똑해. 좋아, 좋아. 방금 자네가 맞춘 게 정확한 답이야. 쿠팩스는 자신이 야구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내 선택을 받았고, 구든은 야구에 대한 탐욕이 넘쳐흘렀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내 선택을 받았네.”
신은 천천히 손을 들어 지혁을 가리켰다.
“그리고 자네는?”
“노력을... 열심히 해서...죠.”
“그래. 내가 해줄 말은 여기까지네.”
“무슨 말인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네. 앞으로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자네의 역할이니까. 잘 생각해 보게. 클클.”
신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덮어쓴 헤드셋 안에 신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는 일은 없었다. 지혁은 비행 내내 잠들지 못했다. 탬파의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던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잘 수 없었다.
*
뻐어어엉!
“굿 볼.”
공 자체에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힉키 코치가, 자신이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문. 아직도 화가 덜 풀렸나?”
“아닙니다. 화난 거 아니라니까요.”
“네 녀석 표정은 그게 전혀 아닌데. 크루즈한테 홈런을 맞은 이후부터 계속 그렇잖아. 누구 하나 잡아먹겠다는 표정이야.”
“그냥...”
“생각할 게 좀 있다는 말은 그만 둬. 언제까지 생각만 할 건가?”
“죄송합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투수코치가? 투수를?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힉키는 짜증을 냈다. 지혁은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불펜에서 내려왔다. 지혁은 시애틀과의 경기가 있은 후부터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힉키 코치가 걱정할 법도 하다. 본의 아니게 팀에 폐를 끼친 건 아닌지. 지혁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할 게 있다는 이유로 패트릭도, 연두도 만나지 않았다.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야만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것을 아는 듯 신도 한 번을 찾아오지 않았다.
조용한 클럽하우스 한 구석에서 지혁은 오늘 입고 나가야 할 유니폼을 매만졌다. 18번을 새겨 넣었다. 지난 생에 18년 동안 프로 생활을 했다는 것을 기념하면서. 그간의 노력을 잊지 않겠다는 이유로.
“내가 재능을 받은 이유.”
그래. 그건 노력이었다. 브랜든 웹의 싱커를, 후지 미유타의 커브를 받을 수 있었던 것 모두. 지혁이 전생에서 해냈던 치열한 노력의 대가였다. 지금 던지는 공들을 순수하게 지혁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지혁을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이 지혁에게 와서 쿠팩스와 구든의 이야기를 해준 이유는 명백했다.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 충실하라는 뜻이었다. 더 노력하라는. 그리고 그건 일종의 증명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지혁만큼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증명.
“나는 자격이 있어.”
치트키를 쓰고 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던져버리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뿐이니까. 지금 그가 가진 재능은 그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야구의 신이 부여한 선물일 뿐이다.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스스로 택한 약물 선수들과는 다른 것이다.
“두 번째 삶에 충실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야.”
지혁은 되뇌었다. 그리고 유니폼을 입었다. 등에 달린 18이라는 숫자가 지혁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18년의 노력에, 이번 생에서의 노력을 더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뒤의 최후가 쿠팩스처럼 될 것인지, 구든처럼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신이 아니라 지혁이니까.
*
- 웰컴 투 에인절스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시즌 32번째 경기! LA 에인절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의 시즌 2차전 경기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호쾌한 멘트가 에인절스 스타디움을 크게 울렸다. 어제 경기에서 탬파베이의 에이스로 거듭난 크리스 아처가 8이닝 무실점 15탈삼진의 완벽투를 뽐내며 승리를 가져왔던 터라, 에인절스의 홈 팬들의 기도 조금은 죽은 것 같았다.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선수들이 전광판에 소개되었다.
LA 에인절스 스타팅 라인업.
1. 에릭 아이바 SS
2. 마이크 트라웃 DH
3. 앨버트 푸홀스 1B
4. 콜 칼훈 RF
5. 데이빗 프리즈 3B
6. 맷 조이스 LF
7. 크리스 아이아네타 C
8. 커크 뉴웬하이스 CF
9. 죠니 지아보텔라 2B
P. C.J. 윌슨. (3-3, 3.55)
“문은 어디 있어? 왜 더그아웃에 없어?”
“아까 비디오 룸에 잠깐 다녀온다고... 클럽하우스에 있을 겁니다.”
“가서 찾아봐!”
힉키는 경기가 시작하기 5분 전까지도 더그아웃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지혁 때문에 잔뜩 짜증이 난 상태였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랭카스터도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잔뜩 드러낸 채였고.
탬파베이의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모두 지혁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애틀과의 원정 시리즈에서 8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으면서도.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 가장 많은 투구수를 기록한 경기였음에도. 시즌 5승을 거두며 몇몇 언론에서 신인왕 후보로 그를 거론하기 시작했음에도.
지혁은 뭐가 불만인지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모두가 눈치를 보며 지혁에게 접근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할 투수이기 때문에 예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대로 루키가 팀 분위기를 계속 흐리게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죄송합니다. 비디오 룸에서 잠깐 영상을 좀 돌려보느라 늦었습니다.”
“문! 대체 뭐 하는 거야?”
“미안, 제이크. 미안해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미처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감독님. 죄송해요, 코치님.”
콥이 없는 동안 임시로 투수조 조장을 맡고 있는 마무리투수 제이크 맥기가 마침내 한 발 나섰다. 하지만 지혁은 평소처럼 슬쩍 웃으며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지혁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냈다. 스스로가 가진 능력이 약물 같은 부정한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게임에 악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입시키는 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린 것뿐이다.
“몸은?”
랭카스터가 아주아주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완벽합니다.”
지혁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랭카스터는 그저 짧은 한숨만 쉬었다.
“알았어.”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은 신경쓰지 않고 그저 더그아웃에 앉아 마운드에 올라갈 시간만 기다렸다. 1회초, 탬파베이의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나고. 탬파베이의 야수들이 모자와 글러브를 챙겨 야구장으로 달려나갔다. 지혁도 모자를 눌러 썼다.
- 원정팀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투수. 지혁 문. No, 18.
지혁이 마운드로 올라가는 중에 에인절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 멘트가 들렸다. No, 18이라. 18번의 등번호가 지혁에게 이유 모를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자격이 있어서야.”
마운드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 다시 있고, 자격이 있어서 싱커와 커브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그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