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 천적. >
“세컨!”
에인절스의 선두타자 에릭 아이바의 스윙은 힘이 없었다. 두 무릎이 무너지며 간신히 배트 끝에 맞춘 공은 포사이드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펑고 타구를 처리하듯 제자리에서 간단히 처리하며 원 아웃을 잡아냈다.
‘됐다. 평소랑 완전히 똑같아.’
지혁은 마운드에서 완벽히 평정을 찾았다. 에인절스 타선의 비디오를 끝까지 돌려보고 나온 보람이 있었다. 어제 아처의 빠른 공과 슬라이더 조합에 맥을 못 췄던 에인절스 타선이다.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무브먼트가 심한 싱커 위주로 초반을 풀어나가면 된다.
‘자. 이제 트라웃.’
LA 에인절스는 2014년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권 도전을 해야 했던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의 팜은 황폐화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무너져 있었고, 라인업에 들어 있는 타자들은 무기력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올 해의 에인절스에게서는 강하다거나, 무섭다거나, 끈끈하다거나 하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승률 5할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마이크 트라웃 덕분이었다. 온갖 괴물들이 난리를 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괴물. 마이크 트라웃. 타격이면 타격, 수비면 수비, 파워면 파워, 송구면 송구. 그리고 상징성이면 상징성.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를 딱 한 명 꼽으라면 반드시 트라웃이 뽑힐 것이다.
트라웃이 정말로 괴물인 이유는 따로 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다. 무려, 지혁보다! 이제 25살이 된 지혁보다 한 살 어린 선수였다. 2015년인 지금 시점에서 신인왕, MVP, 실버슬러거를 모두 차지한 선수가, 지혁보다 어리다. 앞으로 15년은 트라웃의 시대다. 트라웃이 곧 메이저리그고, 메이저리그는 트라웃의 지배를 받는 무대인 것이다.
[ 타석에는 2번. 마이크 트라웃. 두 달 동안 상당히 많이 부진했습니다. 어제 경기에서 아처에게 삼진 3개를 빼앗기며 타율이 .298로 내려갔구요. ]
[ 상당히 부진해서 타율이 .298. 홈런이 13개입니다. 하하하. ]
[ 트라웃을 상대해야 합니다, 문. ]
그런 트라웃이 타석에 들어섰다. 트라웃을 마주하자마자 느껴지는 감정은 딱 하나였다.
‘스트라이크 존이 안 보여.’
포수 리베라가 이렇게 작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무협소설에서나 등장하던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트라웃이 자세를 취하자,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 발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조금의 자비도 없이 난도질을 당할 것 같은 느낌. 싸인 교환이 길어졌다. 리베라의 손가락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잊어버린 듯이 번번히 고개를 저었다.
“타임.”
트라웃이 오른손을 뒤로 빼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에서 빠져나갔다.
“와우. 저거 생각보다 훨씬 더 괴물이네.”
패전처리로 경기에 뛰면서 트라웃을 상대해 본 적 없던 것이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의 트라웃은 어떤 공이라도 다 쳐낼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 때문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전의가 끓어오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운드 위에서 중요한 것 하나. 어떤 상대를 만나든 간에 절대로 쫄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설령 타석에 배리 본즈가 있어도, 베이브 루스가 있어도. 아니지. 헐크나 슈퍼맨이 방망이를 들고 있어도 쫄아선 안 된다.
‘한 번 해 보자.’
지혁은 여러 번 어깨를 털어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트라웃이 아무리 괴물이더라도 4할을 치지는 못한다. 열 번 승부하면 여섯 번은 지혁이 이긴다. 애초에 투수와 타자의 대결은 투수가 이길 확률이 훨씬 높은 게임이니까. 상대가 트라웃이라고 해서 쫄 건 없지.
지혁은 와인드업 자세에서 유독 격하게 팔을 들어올렸다. 트라웃이라는 상대는 존재만으로도 전의를 들끓게 하는 선수였다.
“스트-라이크! 원!”
한복판, 패스트볼, 90마일.
밋밋한 패스트볼이 존 가운데로 밀려들어갔다. 당연한 결과였다. 트라웃의 버릇은 아주 유명했다. 초구에는 방망이를 내지 않는다. 절대로.
아마 메이저리그에 있는 모든 투수들이 트라웃의 버릇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트라이크 하나를 잡고 시작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엄청난 기록을 올리는 게 트라웃이라서 더 무서운 것이기도 하고.
“스트라이크! 투!”
지혁은 주저 없이 2구째도 집어넣었다. 몸쪽 높은 코스로 붙은 패스트볼에도 트라웃은 요동이 없다. 두 개 모두 칠 의지 자체가 없어보였다. 배팅 장갑을 한 번 갈아끼우는 트라웃의 모습을 지혁은 애써 무시했다. 상황만 놓고 본다. 투수에게 이보다 더 유리할 수 없는 상황이다.
3구. 바깥쪽으로 넉넉하게 빠져나가는 싱커. 트라웃이 살짝 방망이를 움직이기는 했지만 볼.
4구. 스트라이크 존 높은 곳에서 하나 정도 더 높은 곳에 꽂히는 패스트볼. 절반 정도 나온 배트가 다시 돌아간다. 볼.
5구. 승부구 타이밍. 지혁은 바깥쪽 존으로 들어가다가 빠져나가는 싱커를 던졌다. 싱커가 박히는 위치도 존 경계에 아슬아슬할 정도. 트라웃이 부드러운 스윙으로 공을 바깥으로 걷어냈다. 파울.
6구. 4구에서 보여줬던 위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커브. 타이밍이 안 맞았지만 트라웃은 한 손을 놓으면서 배트 밑둥에 맞춰냈다. 뒤로 빠져나가는 파울.
확실히 트라웃은 손꼽히는 타자다. 볼 두 개를 꿈쩍도 않고 골라냈고, 그 볼 두 개로 마련해 둔 기본을 바탕으로 던진 승부구 두 개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걷어냈다. 공 한 개 한 개를 던질 때마다 알게 모르게 압박감이 쌓이고 있다.
[ 7구째 승부. 몸쪽으로 붙입니다. 아슬아슬한 공인데요. 볼이 선언됩니다. ]
[ 음. 손을 들어주지 않았네요. 지금 공은 애매했네요. 잘 골라냈습니다. ]
“와. 이걸 안 치네.”
방금 공은 치라고 던진 공이었는데, 트라웃은 여전히 자신의 존을 명확하게 지켜냈다. 바깥쪽 공들을 연속해서 보다가 몸쪽으로 달려들면 대처가 제대로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그래도 어제 아처의 빠른 공과 슬라이더 조합에 삼진을 많이 당했던 트라웃이기에 공격적으로 달려들 줄 알았다.
“이건 뭐. 태산이여?”
유인구에는 꿈쩍도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공이 아니면 툭툭 걷어내는 스킬도 완벽하고. 트라웃은, 자신이 원하는 공이 아니면 제대로 스윙하지 않는다.
“이건 안 치고 배기겠냐?”
투구를 더 끌고 가는 것도 압박이다. 지혁은 존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싱커를 박아 넣었다. 실밥 끝에 손가락도 제대로 걸렸고, 때리는 힘도 적당했다. 분명히 제대로 꺾여 들어가면서 땅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 만들어내야만 하는 공이다.
따아악!
[ 2루수 키를 넘어갑니다. 우중간을 따라 흐르네요. 펜스까지 가기 전에 키어마이어가 막아세웁니다, 곧장 2루로! ]
떨어지는 싱커를 마지막에 들어올렸다. 지혁은 똑똑히 봤다. 스윙을 내는 와중에 궤도를 바꾼 것이다. 배트 중앙이 아니라 끝에 가깝게 맞았지만, 맞는 순간에 들어올리며 힘으로 밀어내는 타격. 로건 포사이드가 껑충 뛰어봤지만 그 키를 넘어 우중간으로 나가버렸다.
[ 2루에서... 세이프! 트라웃이 2루까지 들어갑니다. 1회부터 2루타를 허용하고 시작하는 문. ]
[ 아주 훌륭한 타격입니다. 손색이 없네요, 정말. 싱커를 제대로 받아쳤습니다. ]
[ 어제 4타수 무안타에 삼진만 세 개를 당했던 트라웃. 오늘은 첫 타석부터 2루타를 신고합니다. 타율은 다시 3할대로 올라가겠네요. ]
[ 키어마이어도 좋은 수비를 했는데 말이죠. 이 타구로 2루까지 가는 스피드도 정말 대단합니다. 처음부터 2루를 가겠다는 주루 플레이였어요. ]
[ 덩치도 엄청난데 저 스피드가 대체 말이 되는 겁니까? 하하. ]
말이 되긴. 말도 안 되지. 이렇게 때려내면 어쩔 수 없다.
*
트라웃은 말도 안 되는 타자다. 하지만 나머지는 전부 말이 되는 타자다. 그게 에인절스의 가장 큰 문제였다.
1회 트라웃에게 맞은 2루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대를 호령했던 앨버트 푸홀스를 3루 땅볼로 잡아내고 나자 그 이후로는 안타를 맞고 싶어도 맞을 수 없는 스윙을 하는 타자들이 나왔다.
4회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두타자로 나선 트라웃은 1회와 정확히 같은 자세로 타석에 임했고, 지혁도 똑같이 승부에 나섰다. 투 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아내고, 그 이후에 유인할 수 있는 대로 유인하다가 승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엔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가르는 안타를 맞았다.
“괴물 같은 새끼.”
그 이후에는 도루도 허용했다. 리베라의 송구가 좋지 않았던 건 맞지만 트라웃은 물 만난 고기마냥 펄떡펄떡 뛰어다녔다. 물론 후속 타자들이 전부 범타로 물러났지만.
“헤이, 문. 저 놈은 괴물이니까 그냥 잊어버려. 점수 안 줬으면 됐어.”
투수의 마음은 투수가 가장 잘 안다고, 동료 투수들이 다가와서 지혁에게 위로를 건넸다.
“다음엔 무조건 잡을 거야.”
“그래. 그러면 되지.”
아처는 옆에서 싱글벙글이다. 자기는 어제 삼진 3개를 잡았다고 까불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의 폭탄머리에 꿀밤이나 한 대 먹여주고 싶다. 지혁이 볼 땐 어제 트라웃이 유독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 괴물이 헛스윙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니까.
‘아처가 어제 승부한 공들을 보면...’
높은 패스트볼. 삼진을 잡아낸 패스트볼 세 개는 모두 높은 쪽을 찌른 공이었다. 하지만 지혁의 공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
97마일 이상이 찍힌 공들이었다는 것. 지혁의 92~93마일짜리 패스트볼로? 그건 안 된다. 트라웃은 이미 지혁의 패스트볼에 완벽하게 반응하고 있으니까. 홈런을 때리기 가장 좋은 공이 바로 패스트볼이다. 어설픈 승부는 홈런으로 연결될 것이다.
“와. 쟤는 진짜 답이 안 나오네.”
지혁은 반대편 더그아웃에서 난간에 걸쳐 있는 트라웃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
[ 스윙, 삼진 아웃. 에릭 아이바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문. 오늘 경기 7개째 탈삼진.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에인절스 타자들이 꼼짝을 하지 못하네요. ]
[ 팀이 때려낸 안타가 두 개가 다이니까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
[ 그리고 그 두 개의 안타를 때려낸 주인공. 마이크 트라웃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6회말 2아웃 상황. 2타수 2안타, 첫 타석에는 2루타, 두 번째 타석엔 안타와 도루입니다. ]
“이번에는 진짜 전력으로 덤벼 보자고.”
리베라가 더그아웃에서 내뱉었던 말대로. 지혁은 있는 힘껏 구속을 끌어올렸다.
“스트-라이크!”
역시나 초구는 그냥 쳐다본다. 한복판 패스트볼. 방망이로 홈플레이트를 툭툭 두드리는 트라웃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
어차피 투 아웃에 주자는 없다. 한 방 맞아도 한 점. 두 점의 리드를 안고 있으니 승부를 해볼 법 하다. 승부한다.
“스트라이크! 투!”
몸쪽에서 꿈틀거리는 싱커. 아슬아슬한 지역에 들어간 공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리베라의 절묘한 프레이밍도 한 몫 했다. 하지만 괴물은 여전히 묵묵했다. 일말의 요동이 없는 상대를 만난 기분이 이런 거구나.
‘바로 승부하자. 자꾸 유인하는 건 의미가 없어.’
리베라가 빠져 앉으려고 하자 지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기 템포에 맞춰서 자기가 원하는 공에 스윙하는 녀석이다. 자꾸 빼 버리고 유인하는 건 의미가 없다. 리베라가 다시 슬쩍 안쪽으로 들어와 앉았다. 몸쪽, 싱커 승부다.
“으쌰!”
지혁의 손끝에서 3구가 떠났다. 존 안에 넣는다는 생각으로 던진 공이 무릎 높이로 낮게 깔려 날아갔다. 이 정도면 이길 법도 하다. 상대가 아무리 트라웃이라고 해도!
따악!
손잡이 안쪽에 맞았다. 오늘 경기에서 트라웃이 때린 가장 빗맞은 타구였다.
“Shit!”
3루수 롱고리아가 뒤로 두세 걸음 물러나며 아크로바틱한 동작으로 점프했지만 글러브를 살짝 맞고 튀어나갔다. 잘 던진 공이었는데도 안타로 연결되고 말았다. 좌익수 앞으로 느릿느릿하게 공이 굴러가는 동안 1루를 돌아버린 트라웃은 2루까지 들어갔다.
“하. 그래. 넌 마음껏 쳐라.”
허탈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어떻게 던져도 다 쳐낼 것만 같은 사람이 2루에서 무릎의 흙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
- 문지혁, LA 에인절스 전 7.2이닝 무실점 완벽투. 그러나 트라웃엔 판정패.
- ‘트라웃에게만’ 3피안타. ‘에인절스에게도’ 3피안타. 전투에선 졌지만 전쟁에선 이겼다.
탬파베이의 문지혁(25)이 6월 2일 에인절스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에서 열린 LA 에인절스와의 시즌 11번째 등판에서 6승째를 수확했다. 7.2이닝 동안 피안타 3개, 볼넷 1개만 허용하는 쾌투. 이 날의 무실점으로 평균자책점은 기존의 2.64에서 2.33까지 낮추었다.
한국의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트라웃과 여덟 난쟁이’로 불리는 LA 에인절스의 타선을 맞이한 문지혁은 위력적인 싱커와 커브를 앞세워 9개의 탈삼진을 빼앗아냈다. 하지만 ‘여덟 난쟁이’를 상대로는 아무도 출루시키지 않는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것과는 달리, 마이크 트라웃을 상대로 2루타 두 개와 안타 하나, 볼넷 하나를 허용했다. LA 에인절스라는 팀을 상대로는 완벽하게 압도하는 투구를 보여줬지만,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리그 MVP 타자를 상대로는 완패하고 만 것이다.
... (중략)
2015년 6월 2일. 에인절스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
LA 에인절스 0 vs 2 탬파베이 레이스 승리투수 : 문지혁 (6-1, 2.33) 패전투수 : C.J.윌슨 (3-4, 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