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 경쟁자의 출현. >
6월 2일, 에인절스와의 경기는 득과 실이 명백하게 갈린 경기였다.
실이라고 할 건 명백했다.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천적’을 만났다는 것. 트라웃과 하루 동안 세 번을 마주쳤다. 그리고 모두 안타를 허용했다. 그 중 2루타가 두 개였고, 모두 다른 위치로 공이 흘러갔다. 밀어쳤다가 당겨쳤다가 한 셈이다.
누구나 천적은 있다. 최성수 선배만 해도 사이영 상 수상자인 맥스 슈어저의 공을 초등학생 공 치듯 뻥뻥 넘겨버리곤 하니까. 물론 고작 한 경기, 안타 세 개와 볼넷 한 개를 준 걸로 천적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운드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 수많은 강타자들을 만났지만, 트라웃은 다르다. 심지어 앨버트 푸홀스라는 대타자가 쉽게 느껴질 지경이었으니까. 트라웃은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지혁의 공을 가장 잘 치는 타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히려 트라웃 같은 괴물이 천적인 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전혀 임팩트도 없고 경기에 기여도 하지 못하는 타자가 지혁의 천적이었다면, 게임을 풀어나가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트라웃에게 맞는 건 그냥 어쩔 수 없는 셈 치면 된다. 어차피 트라웃은 천적이 아니더라도 칠 확률이 매우 높은 타자니까.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얻은 ‘실’이 트라웃을 만난 것이라면, ‘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유. 탬파베이가 29승 25패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선두로 올라섰다. 물론 이건 다른 팀들의 부진과 맞물렸다.
지난해 압도적인 지구 1위를 차지했던 볼티모어는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은 상황까지 몰렸고, 조쉬 도날드슨을 데려오며 대대적인 ‘윈 나우(win now)’ 러쉬에 나선 토론토 블루제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양키스가 초반에 치고 나왔지만 서서히 힘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지혁의 이름이 신인왕 후보에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날이 갈수록 반응이 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클래식 지표가 너무 좋으니까. 지혁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6승 1패. 2.33. 이건 루키 기록이 아니죠.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아주 좋아.”
패트릭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앞에는 연두가 정리해 준 지혁에 관련한 기사가 수북이 놓여 있었다.
“기대 이상이네요. 이 정도로 성적이 잘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요.”
“지금 경쟁자라고 하면 페르난도 멘데스 정도만 언급되고 있는데. 이 정도면 대만족입니다, 문. 눈이 너무 높군요?”
“신인왕은 꼭 타야 되거든요.”
“왜죠?”
“뭐, 그런 일이 있어요. 더 묻지는 마시고. 하지만 신인왕은 무조건 타야 해요. 무조건.”
“흐음...”
패트릭은 이상하다는 듯이 지혁을 쳐다봤지만, 늘 그렇듯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이미 충분히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올라오죠? 카를로스 코레아. 프란시스코 린도어.”
“음, 아마? 6월이니까. 아, 린도어는 올라왔어요. 어제. 퀵 팝이 얘기하더군요.”
“벌써요?”
“네. 클리블랜드는 안 그래도 유격수가 구멍이었으니까. 치즌홀이 DL에 올라가자마자 바로 콜업했더군요.”
“젠장. 너무 빠른데?”
린도어인지 코레아인지 모르겠지만, 신인왕을 경쟁해야 할 후보들이 이제 메이저리그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린도어가 될 모양이었다.
“지금 올라온다고 치면 한 100경기는 뛰겠죠?”
“대략 그 정도쯤일 겁니다.”
“규정 타석도 충분하겠네요.”
“당신도 규정 이닝은 채울 겁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패트릭은 혼자 중얼거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쫓기는 것 같은지 모르겠네. 지금까지는 멀쩡하더니.”
“걔네는 야수니까요. 에브리데이 플레이어가 상을 타기에는 유리하니까.”
“대신 그만큼 말아 먹을 가능성도 높은 거 아닙니까.”
“걔는 터져요. 코레아도 마찬가지고.”
“뭘 믿고 그렇게 장담합니까?”
“... 감.”
쳇. 패트릭은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하도 많이 맞춰서 이젠 안 믿어줄 수도 없고.”
“린도어랑 코레아 분석을 확실하게 좀 해줄 수 있을까요? 구단 쪽에도 부탁할 거긴 하지만. 걔네를 상대로 던질 때는 무조건 잡아내야 해요.”
“참 일을 사서 한다니까. 준비하죠.”
이런 일을 하라고 에이전시가 있는 거니까. 신인 드래프트 때문에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패트릭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작업은 꼭 필요했다.
카를로스 코레아. 프란시스코 린도어. 페르난도 멘데스.
이 녀석들은 반드시 잡아내야만 한다.
*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 에반. 손목은 괜찮아요?”
“아니. 오늘도 경기는 못 나갈 것 같은데.”
롱고리아는 사흘 전 입은 손목 부상 때문에 두 경기에 결장했다. 15일 DL에 오를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어서, 오늘 경기에도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휴스턴 경기네? 이건 왜 보고 있어?”
“아, 그냥요. 어제 경기에서 코레아가 데뷔했다고 해서.”
“코레아가 누군데? 아, 그 신인?”
“네.”
“뭐야. 벌써부터 의식하는 거야?”
“하핫. 안할 수는 없죠. 사람인데.”
롱고리아는 픽 웃으며 지혁의 옆에 앉았다. 화면 속에 앳된 얼굴로 머리 사이즈보다 한참 큰 헬멧을 눌러쓴 코레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서 있었다.
메이저리그 데뷔 타석이라는 짤막한 소개 자막이 떠오른다. 2012년 전체 1픽이었던 초대형 유망주. 올해 마이너리그 타격 성적이 .367에 홈런 11개, 타점이 44개.
“긴장되지. 처음 타석에 들어설 때.”
“에반도 신인왕이었죠? 첫 타석 결과가 어땠었어요?”
“2루타.”
“당신은 긴장도 안 했나 봐요.”
“아니야. 덜덜 떨면서 눈 감고 돌렸는데 맞았어.”
따악!
“어?”
메이저 데뷔 첫 타석에서 스트라이크 두 개를 쉽게 내주며 루키다움을 어필하고 있던 코레아가 방망이를 시원하게 돌렸다. 훨훨 떠가던 공이 펜스를 직격하며 떨어지고, 코레아는 2루 베이스에 걸어 들어갔다. 그가 데뷔 타석에서 상대한 투수는 무려 크리스 세일이었다.
“얘도... 눈 감고 돌렸을까요?”
“글쎄. 스윙 보니까 떡잎은 확실한 녀석이네. 세일 폼은 한 번에 적응하기가 힘든데.”
“하.”
쉽지 않은 경쟁이 될 것이다. 코레아나 린도어, 그리고 멘데스의 미래를 알고 있는 지혁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더욱 큰 셈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그냥 벌어둔 게 있으니 괜찮다며 웃을 수 있었을까? 미래의 5대 유격수 중 두 명. 그리고 홈플레이트의 왕. 이 녀석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되었다.
*
[ 에릭 아이바가 내야안타로 2루에, 트라웃이 몸에 맞는 공으로 1루에 나가 있습니다. 타석엔 앨버트 푸홀스. 문. 1회부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데. 부담이 조금 컸던 탓일까? 꼭 일주일만에 다시 만난 에인절스와의 리턴 매치. 1회부터 두 명을 내보냈다.
“문!”
리베라의 싸인이 나옴과 동시에 유격수 카브레라가 2루 베이스 위로 달려들었다. 마운드 위에서 공을 쥐고 있던 지혁은 재빠르게 몸을 빙글 돌려 2루에 견제구를 던졌다. 2루주자 아이바의 리드가 조금 길었던 탓에 송구가 제대로 들어갔으면 분명히 자동 태그가 되며 아웃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며 던진 견제구가 생각보다 앞쪽에 떨어지며 원바운드가 되었다. 카브레라가 백핸드로 글러브를 가져다 댔지만... 공은 글러브 아래를 스치며 빠져나갔다. 외야로.
“아, 미친.”
지혁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2루주자 아이바가 3루에 들어갔고, 1루주자 트라웃도 노련하게 베이스로 복귀하지 않고 있다가 재빨리 2루까지 들어왔다. 노아웃에 2루와 3루.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긴장했어? 너무 힘이 들어갔어. 힘 좀 빼야 해. 공도 계속 땅에 박히고 있으니까. 오케이?”
“어. 미안.”
“미안하긴 무슨. 아직 1회밖에 안 됐어. 줄 건 주고 가자. 편하게 맞춰 줘.”
리베라가 잠깐 마운드에 올라와서 지혁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지혁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한 번 헝클었다. 평소와 같은 리듬으로 갔어야 하는데. 아주 약간 힘이 들어갔다. 코레아의 데뷔 타석 2루타 영상을 봐서 그랬을까? 아니면 트라웃이라는 천적에게 다시 한 번 출루를 허용한 것 때문에?
“뭐가 됐든 이건 안 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글러브를 벗어 두 손으로 하얀 야구공을 쥐어짜듯 문질렀다. 실밥의 까슬까슬한 느낌이 손바닥을 긁어댄다.
“후우. 경기에만 집중해라, 지혁아...”
푸홀스를 상대로 던진 싱커가 제법 괜찮게 박힌다. 1회에 던진 12개 공 중에서 가장 제대로 들어간 공이었다. 왜 사람은 위기를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가. 쳇.
2구 째도 같은 공. 마찬가지로 바깥쪽 낮은 쪽으로 떨어져내리는 싱커였다. 휘두르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진 유인구였는데 푸홀스가 방망이를 냈다. 배트 끝에 맞은 타구를 억지로 들어올린 푸홀스가 방망이를 내던지며 1루로 천천히 달렸다.
“멀리 못 가!”
키어마이어가 크게 외치는 것이 지혁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공은 어려운 위치에 떨어지고 있었다. 우익수 수자 주니어가 앞으로 내려오고 2루수 포사이드가 뒤로 물러나는 중간 위치에.
[ 얕은 플라이인데요. 앞으로 달려오는 수자... 애매한 위치! 슬라이딩으로 잡아냅니다. 3루주자 홈으로 대쉬합니다. 수자의 긴 송구! 홈에서! 늦었습니다. 희생플라이로 선취득점에 성공하는 에인절스. ]
[ 운도 없네요. 분명히 얕은 플라이였는데 이 공이 슬라이딩을 하지 않으면 못 잡는 지역에 떨어지네요. ]
[ 수자 주니어가 슬라이딩 캐치를 하는 동안 영리하게 홈을 파고든 아이바의 주루플레이도 칭찬해야겠네요. ]
[ 그렇습니다. 포사이드가 공을 잡았으면 역동작이었고, 수자 주니어가 잡으려면 무조건 슬라이딩을 해야 한다고 봤던 것 같아요. 얕은 플라이였는데도 노련하게 태그업을 준비했습니다. ]
[ 1회에 앞서 나가는 에인절스. 점수는 1대0입니다. 원 아웃 주자는 2루. 타석에는 콜 칼훈. ]
한 점. 송구 실책과 불운이 만들어 낸 이 한 점. LA 에인절스를 상대로 한 홈경기에서 지혁이 내준 점수는 그게 전부였다.
*
“고생했어.”
“더...”
“아니야. 너무 많이 던졌어.”
랭카스터 감독이 직접 마운드에 올라와서 공을 요구했다. 7회 첫 타자로 나선 맷 조이스를 상대로 풀카운트 접전 끝에 볼넷을 준 상황. 투구수가 108개. 불펜에서는 다른 투수들이 진작부터 몸을 풀고 있었다.
2회와 3회를 병살타를 포함한 삼자범퇴로 틀어막았다. 트라웃과의 승부에서 처음으로 아웃카운트를 챙기기도 했다. 4회부터 5회까지 여섯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과정에서 5연속 삼진을 잡아냈고. 6회에 위기를 맞았지만 2사 만루 상황에서 프리즈를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추가 실점을 막았다.
그런데도 패전의 위기였다. 1대0의 스코어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다.
“아주 좋은 투구였어, 문.”
어쩔 수 없이 공을 넘기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지혁의 등 뒤로 랭카스터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지표를 추가했어야만 했다. 신인왕 레이스. 더 앞서나가기 위해서 승리가 필요했는데.
지혁은 더그아웃에 앉지 않고 곧장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정말 아쉬운 경기였다.
*
2015년 6월 9일. 메이저리그 경기 결과.
탬파베이 레이스(31승 28패) 0 vs 2 LA 에인절스(28승 30패) 승리투수 : 맷 슈메이커(4-4, 4.86) 패전투수 : 문지혁 (6-2,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