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 왕을 만나다(2). >
지난 워싱턴 경기와 볼티모어 경기에서 확실하게 느꼈던 점. 상대도 지혁을 분석했다는 것. 가장 휘두르기 좋은 공이 초구라는 것을 이제는 타자들도 다 알고 있다. 그만큼 공격적으로 초구 카운트를 잡아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가는 공을 던져 왔으니까.
그래서 1회초, 첫 타자, 94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존 안에 박힌 건 꽤 좋은 출발이었다. 평소보다 구속도 매우 잘 나오는 편이었고, 제구도 날카로웠다. 2구는 바깥쪽 높은 쪽에서 떨어지는 커브. 킵니스가 어설픈 스윙을 돌렸다. 존 안에 들어오던 것처럼 보이다가 빠져나가는 공에 스윙을 해 주면서 카운트도 몰아넣었다.
‘킵니스는 1번이지만 가져다 대는 스윙은 잘 안 해.’ 리베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존을 통과하다가 떨어지는 커브 싸인을 냈다. 이 정도라면 원바운드 공도 괜찮다.
[ 3구! 헛스윙입니다. 낫아웃 상황, 리베라가 1루로 던져서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삼구 삼진. ]
존 한가운데로 날아들다가 점점 더 떨어지는 공에 킵니스가 방망이를 참아내지 못했다. 그 동안의 공격적인 피칭이 도움을 준 것이다.
[ 2번 타자. 프란시스코 린도어. 마운드의 문과 함께 또 한 명의 슈퍼 루키입니다. 재미있는 대결이 되겠네요. ]
[ 6월 1일 콜업 이후 타격 성적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타율이 .222. 하지만 5툴을 뽐내고 있습니다. 수비는 골드글러브를 받을 수 있다는 평가도 있고, 파워와 주루, 어깨도 아주 뛰어나고요. ]
[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이 선수를 주전 유격수로 계속 쓸 것이라고 표방했었습니다. 경험을 쌓아주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죠. 자. 두 루키의 대결. 시작합니다. 초구, 파울. 린도어 초구부터 과감하게 돌렸습니다. ]
우타석에 들어선 린도어가 초구 몸쪽 싱커를 강하게 잡아당겨 봤다. 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너무 빠른 타이밍에 공이 맞았다.
‘첫 타석에 니가 타이밍을 잡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트라웃이나 하퍼가 아닌 이상. 이제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린도어가 지혁의 공에 한 번에 타이밍을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디셉션도 조금 있고 끝에서 움직이는 공을 한번에 맞출 수 있는 타자는 많지 않다.
지혁은 초구에 린도어가 낸 스윙을 보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린도어든, 멘데스든, 아니면 휴스턴의 코레아든. 앞으로 성적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면 할수록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선수들이니까.
앞으로 리그를 폭격할 수 있는 선수들이 이제부터 쫓아온다는 조바심을 해결하려면 첫 대결이 중요하다. 첫 대결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마치 지혁이 트라웃을 상대할 때 느꼈던 듯한 감정을, 린도어에게도 느껴지게 하는 게 중요했다.
[ 2구. 바깥쪽 싱커. 스트라이크 선언됩니다. 와우. ]
[ 이 공은 안 친 게 다행이네요. 방망이를 냈으면 꼼짝없이 내야로 굴렀을 겁니다. 완벽하게 들어갔네요. ]
스트라이크 두 개.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면 안 된다. 휘두르면 아웃이 될 거라는 공포를 심어준다. 지혁의 목표는 정확히 그것이었다. 그래서 리베라가 이리저리 빼 보려던 싸인을 죄다 거절했다.
‘높은 패스트볼. 스윙을 유도할 수 있게.’
리베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릎을 살짝 들었다. 기마 자세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린도어의 가슴팍보다 살짝 높은 곳에 미트를 댔다.
“으랴쌰!”
존 위로 반 개 정도 걸친 곳에 미트가 있다. 오늘처럼 좋은 컨디션의 패스트볼은 회전이 더 많이 걸리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덜 떨어지기 마련이고.
부우웅!
“스윙! 배터 아웃!”
눈높이에 가까운 공이 마지막에 슬쩍 떠올랐는데. 스윙을 내지 않으면 쟤가 린도어가 아니라 트라웃이다. 방금 전 바깥쪽 가장 먼 꼭지점에 제대로 박힌 싱커를 본 다음에 눈높이의 패스트볼을 쳐서 담장을 넘길 수 있으면 쟤가 린도어가 아니라 하퍼고.
[ 두 타자 연속 삼구 삼진입니다. 오늘 문의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 보이네요. 마지막 패스트볼이 94마일입니다. ]
[ 경기 시작 전에 문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1.2마일이라고 말씀드렸죠. 오늘 두 개의 패스트볼 모두 94마일입니다. 좋습니다. 클리블랜드 타자들이 못 따라오고 있어요. ]
3루 쪽 더그아웃을 흘깃 돌아보니, 멘데스가 머리에는 포수 헬멧을 쓴 채 이것저것 떠들고 있는 게 보였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엄살을 부려 놨으니 아마 조금이라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길 바라야지.
[ 3번 타자 마이클 브랜틀리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스타 외야수답게 올 해도 올스타 투표에서 순위권에 올라 있습니다. 타율은 현재까지 .323. 홈런은 6개를 때렸습니다. ]
작년 올스타와 실버슬러거 수상자이자, MVP 투표 3위를 수상했던 브랜틀리. 작년을 기점으로 대폭발한 이 선수는 클리블랜드의 롱고리아 같은 선수다. 브랜틀리가 있고 없고는 그 존재감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탬파베이의 롱고리아와 비슷한 것이다.
따악!
[ 음, 초구 파울. 존에서 낮게 떨어지는 싱커를 크게 한 번 잡아당겨 봤습니다. ]
[ 브랜틀리의 어퍼 스윙이 문의 싱커와 궤적이 좀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싱커볼러에게 브랜틀리는 유독 강하거든요? 낮게 떨어지는 공도 잘 퍼올리는 선수입니다. ]
‘얘한테 낮은 공 던지려면 무조건 원바운드 시켜야 해.’
낮은 공을 극단적으로 퍼올릴 수 있는 스윙을 가진 선수다. 떨어지는 공을 잘 치는 최성수 선배보다도 더 위협적일 정도로. 낮은 공은 유인이고, 높은 공은 승부. 지혁이 경기 들어오기 전 리베라와 맞춰 놓은 합대로 경기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걸 재확인했다.
리베라가 2구째 싱커 싸인을 낸 뒤 미트를 아래로 돌려 홈플레이트를 슥슥 긁었다. 저 아래쪽까지 보내라는 신호. 지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
아까보다 반 개 정도 더 낮은 공에도 어김없이 스윙이 나온다. 배트 밑둥에 맞은 공이 홈플레이트를 크게 때리고 뒤로 빠져나갔다. 선구안이 나쁘지 않은 클리블랜드 타선이 이렇게까지 낮은 공에 적극적으로 스윙을 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초점이 낮은 쪽 싱커에 맞춰져 있다는 것.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몸쪽 눈높이에서 존 안으로 떨어지는 커브.
[ 문의 3구입니다. 떨어지는 공, 스트라이크 콜! 지켜보기만 합니다, 브랜틀리! 세 명의 타자를 상대로 모두 삼구 삼진! 오. 마이. 갓. ]
[ 환상적인 출발이네요. 하하. ]
처음 공을 손에서 놓는 순간 몸을 틀어 높은 공을 피하려고 했던 선택은 최악이었다. 린도어에게 삼진을 잡아냈던 높은 패스트볼이라고 봤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몸쪽 경계선에 떨어진 커브를 리베라가 있는 힘껏 안으로 잡아당겨 받았다. 미트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상태로 최대한 존 안에서 포구한 보람이 있었다. 주심은 잠깐 멈칫하다가 마치 로빈 훗 같은 자세로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9구 3삼진. 세 명을 모두 공 세 개로 삼진 처리. 투수에게 이보다 더 상쾌한 출발은 있을 수 없다.
*
[ 경기 시작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만에 5회말이 끝났습니다. 두 팀 통틀어서 루상에 진출한 선수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카를로스 산타나 딱 한 명 뿐입니다. 탬파베이의 1루수 로비 크라우스의 포구 실책으로 출루했었죠. ]
[ 이런 경기가 또 있었나요? 신인 투수 두 명이 5회까지 한 명은 노히트, 한 명은 퍼펙트 피칭 중입니다. ]
처음은 그냥 투수전일 줄 알았다. 하지만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 외줄타기 싸움이 되어버렸다. 두 팀 모두 타자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이 쪽에서 외줄에 올라탄 사람은 지혁이었고, 저 쪽에서 올라탄 사람은 루키 투수 코디 앤더슨이었다.
[ 6회초로 갑니다. 타석엔 8번 타자. 페르난도 멘데스. 지금까지 타율 .262, 홈런 5개입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국제 FA로 계약한 이후 지금까지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클리블랜드의 마스크를 쓰고 있죠. ]
[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가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는 원동력 중 하나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투수들의 안정감도, 타선의 생산성도. 기존의 얀 곰스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좋아졌어요. ]
[ 사실 클리블랜드라는 스몰마켓 팀으로 향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는데요. 전 경기 출장하고 싶다는 이유로 포수가 약한 클리블랜드를 직접 골랐다고 합니다. 자. 문과의 대결. 첫 타석에는 2루수 땅볼이었습니다. ]
전생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멘데스가 타석에 들어올 때마다 전생에서의 위압이 느껴지는 듯하다. 홈플레이트를 지배하는 왕. 내년쯤 되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동시에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공격력을 가진 포수가 되어 버릴 괴물.
그리고... 지혁의 신인왕 경쟁자.
‘6회... 세 놈 다음이 2, 3, 4번. 여기서 출루 주는 건 생각도 하면 안 돼.’
멘데스는 스윙의 궤적을 바꾸고 있는 중일 것이다. 도미니카에서 배웠던 우악스러운 스윙을 세련되고 간결하게 바꾸고, 그 스윙이 몸에 익기 시작하면 그의 타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지금은 첫 시즌이고 스윙을 바꿔나가는 과정에 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타자인 것이다.
타석에 들어선 멘데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바라보고 있다. 무릎을 거의 굽히지 않고 서 있다시피 하는 특유의 타격 자세,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방망이. 어떤 루틴도 없이 그냥 타석에 들어와 서 있기만 하는 것 같은 저 녀석을 얕보면, 그 순간 얻어맞는다. 수많은 투수들이 멘데스에게 그렇게 덤볐다가 한 번에 훅 갔지.
그런 습관을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리베라는 계속 높은 쪽 패스트볼을 요구했지만 단 한 개도 그쪽으로 던지지 않았다.
[ 바깥쪽 싱커. 음~ 이번엔 볼이네요. 원 볼. ]
[ 몇 타자만에 초구 볼이 들어간 거죠? 8타자 인가요? ]
[ 저번 타석의 멘데스가 초구 볼을 골랐었군요. 나머지 타자들은 전부 초구 스트라이크를 넣었습니다. ]
[ 멘데스를 조금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군요. 오늘처럼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는 투수인데도 멘데스를 상대로는 어렵게 끌고 갑니다. ]
전생에서 멘데스가 가졌던 그나마 유일한 약점은 바로 선구안이었다. 포수들이 그런 증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홈플레이트에 쭈구려 앉아서 투수들의 공을 받을 때 재는 스트라이크 존과, 타석에 들어서서 내려다보며 재는 스트라이크 존 사이에서 괴리를 갖는 경우.
멘데스도 인간인지, 다행히 그 약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원!”
싱커를 던졌던 그 위치와 거의 똑같은 지점에 들어간 패스트볼. 사실 이번 공도 볼이었지만 멘데스는 살벌한 풀 스윙을 돌렸다.
‘와. 맞으면 골로 갔겠네.’
한 끗 차이였을까. 멘데스도 아쉬워하며 자기의 배트 끝을 바라보며 두 볼을 부풀렸다가 긴 숨을 내쉰다. 지혁은 글러브 속 오른손을 꾸물럭거렸다. 긴장의 끈을 더욱 당겨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걸 방금 스윙으로 알 수 있었다.
“으쌰!”
검지와 중지에 힘을 더 주고 공을 긁어내렸다. 존 가운데에서 더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 높은 위치에서 출발하는 멘데스의 방망이를 피할 수 있으면 좋고, 맞는다고 해도 멀리는 안 갈 테다.
“숏!”
거의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멘데스의 배트 끝에 맞은 타구가 마운드 앞쪽을 강하게 때리고 크게 튀어올랐다. 지혁이 가볍게 점프해 봤지만 키를 훌쩍 넘어갈 정도로 크게 튄 타구. 지혁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질렀다. 정확하게 2루 베이스로 향하는 공에 유격수와 2루수가 모두 달려들었다.
“아?”
카브레라가 공을 건져내려고 몸을 숙인 사이, 타구가 야속하게 2루 베이스를 때리고 옆으로 튀어나갔다.
아우우우-
노히트가 깨져버린 것에 트로피카나 필드를 채운 관중들이 아쉬움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내야 안타. 그것도 운이 더럽게 없는. 2루 베이스에 맞고 멈춰버린 공이 땅바닥을 구르는 사이 멘데스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1루에 살아 들어간 것이다.
“헤이, 친구! 내가 운이 좋네.”
1루로 나간 멘데스가 손을 한 번 들어보이며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출루도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최소한 첫 시즌에서만큼은 찍어 눌러 둬야 앞으로가 편할 터인데. 지혁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불운. 야구선수에게는 정말 파트너로 삼고 싶지 않은 녀석이다.
하지만 이 징글징글한 녀석이 지혁에게 꽉 달라붙으려는 모양이었다. 9번 마이클 본의 번트 타구가 3루 쪽 라인 위를 타고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그 위에 멈춰 섰다.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롱고리아와 지혁이 모두 하얀 공을 애타게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하얀 선을 타고 구르던 공이 정확하게 그 위에 멈춰서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Holy shit.”
롱고리아도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던 2루에 주자가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깊숙한 플라이. 원 아웃에 주자 1,3루. 타석엔 다시 린도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