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 위기 탈출 넘버 원. >
6회초, 0대0 상황. 원 아웃, 주자는 1루와 3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맞은 최고의 위기. 아직까지 탬파베이 레이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발 투수 코디 앤더슨에게 퍼펙트 피칭을 당하고 있었고, 한 점을 내기도 요원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까 한 점도 안 주는 피칭을 할 거야.”
“좋아. 싱커를 써서 내야로 굴리자 이거지?”
“어. 그런데 다섯 개는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무슨 말이야? 다섯 개라니?”
“커브랑 패스트볼로 최대한 시선을 뺏어 두고 싶어.”
마운드로 올라온 리베라는 지혁의 제안에 눈을 찌푸렸다.
“풀 카운트까지 가자고?”
“최대한 어렵게 던져 볼게. 분명히 한두 개 정도에는 방망이를 낼 거야. 파울로 만들어야지.”
“그게 되겠어? 풀 카운트까지 가면 마지막 공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
“아냐. 린도어는 무조건 방망이를 낼 거야. 그리고 풀 카운트로 몰린다고 해도, 마지막 공에는 방망이를 낼 수밖에 없어.”
“왜?”
“루키잖아. 쟤는 지금 보여줘야만 한다고.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걸.”
리베라는 대기 타석에서 연습 스윙을 돌리고 있는 린도어를 슬쩍 돌아보았다.
“어퍼 스윙으로 들어 올릴거야. 어떻게든 외야로 보내려고.”
“그러니까 다섯 개 정도를 높은 쪽으로 쓰자고.”
“하. 알겠다. 오늘은 네 컨디션이 좋으니까. 그렇게 해 보지, 뭐. 한 점 주면 어쩔 수 없고.”
르네 리베라는 .165를 치면서도 꾸준히 주전 포수로 나오는 친구다. 타격이 정말 못 봐줄 수준인데도 그를 쓸 수밖에 없는 건, 투수 리드나 볼 배합 싸움, 프레이밍, 수비력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녀석이기 때문이고. 3루에 주자가 있지만 땅에 박히는 공을 던져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포수라는 뜻이다.
[ 초구! 원바운드 되는 커브. 리베라가 몸으로 공을 막아 놓습니다. 주자들 움직이지 못합니다. ]
[ 정말 좋은 수비네요. 방금 수비로 한 점을 살렸습니다. 옆으로 튀어나가기라도 했다면 3루 주자는 무조건 홈에 들어왔을 겁니다. ]
[ 탬파베이에겐 정말 다행이네요. 카운트는 원 볼입니다. ]
[ 문과 리베라 배터리도 참 대담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3루에 주자가 있는데도 원바운드 되는 공을 던지네요. 허허. ]
사실 방금 건 실투였다. 너무 엄지에 힘이 들어가서 탑 스핀이 많이 걸린 볼. 하지만 리베라가 든든하게 막아 줬다. 물론 마스크 너머에서는 지혁을 째려보고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원바운드가 될 정도로 공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꼴이 되었다.
이건 투수에게는 커다란 도움이다. 똑같은 커브를 하나 더 던져도, 존에 박힐 때까지 하나 지켜보게 되니까. 지금처럼.
[ 2구. 커브가 한복판으로. 린도어가 한 번 지켜봅니다. ]
[ 정확하게 한복판으로 들어갔는데요. 방금 공은 실투에 가까웠는데, 놓쳤네요. ]
아니. 실투는 1구가 실투였다. 지금 공은 떨어지는 공에는 절대 배트를 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던진 공이고. 커브 두 개를 보여줬으니 이제 높은 쪽 패스트볼을 던져줄 차례다. 커브처럼 떨어질 줄 알고 움찔하겠지.
지혁은 바깥쪽 존 높은 곳을 노려보고 있는 힘껏 패스트볼을 뿌렸다. 손에서 방금 묻힌 로진이 멋지게 휘날리고, 그 사이로 패스트볼이 뻗어나가 호쾌하게 미트에 박힌다.
“스트-라이크! 투!”
만약 타석의 타자가 린도어가 아니라 브랜틀리였다면, 이 공은 못 던졌을 것이다. 아마 공 보고 공 치기 식으로 접근해서 가볍게 툭 밀어냈다면 내야는 손쉽게 넘겼을 터다. 린도어가 훗날 아무리 대단한 선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메이저리그를 밟은 지 한 달 밖에 안 된 신인이다. 타석에서 그 정도 여유를 갖고 있을 리는 없다는 계산 아래에서 던진 공이다.
[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원 볼로 몰아넣었습니다. 문. 선취점을 주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4구째, 몸 쪽으로 붙는 커브. 볼입니다. 조금 많이 붙었네요. ]
[ 하하. 린도어가 아쉬워하는 모습이 재미있네요. 지금은 맞고라도 나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본능적으로 공을 피했는데요. 허리를 틀어서 몸을 대고 싶었던 것 같아요. ]
애매하게 건드려서 땅볼이 나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혁은 쓴 입맛을 다시며 바깥쪽으로 한 개 정도 빠지는 패스트볼로 한 번 더 유인했다. 린도어가 큰 스윙을 돌렸지만 빗맞은 공이 뒷그물에 맞는다.
“공 다섯 개 봤지? 패스트볼이랑 커브가 눈에 익었지?”
지혁은 타이밍이 왔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1루 쪽 견제를 한 번 했다. 오히려 깜짝 놀란 건 1루주자 마이클 본이었다. 지금까지 주자 견제를 전혀 안 하고 있던 루키 투수가 갑자기 견제를 하자 조금 놀란 듯 황급히 베이스로 돌아갔다.
“더블플레이 만들어야 되는데. 리드가 너무 크면 안 되지.”
지혁은 세트 포지션 자세에서 한참을 1루주자만 바라보다 발을 한 번 풀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동작들이 이어지는 동안, 린도어는 계속해서 이번 타석의 투구 내용을 복기했을 것이다.
패스트볼의 궤적과 커브의 궤적. 3구째 스트라이크를 먹었던 것처럼, 첫 타석에서 높은 공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던 것처럼. 또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싱커는 린도어의 선택지에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홈플레이트에 닿기 직전에 급격하게 꺾이며 내려앉는 공은 린도어의 스윙 궤적에서 정확하게 반 개 벗어났다. 그리고 배트 안쪽의 밑둥을 맞은 공은.
[ 6구, 때립니다만 투수 정면! 투수 정면! 문이 낚아채서 2루로, 카브레라가 여유 있게 1루로! 더블 플레이! 여기서 투수 앞 땅볼이 나옵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합니다. ]
“오-케이!”
지혁의 손에서 떠난 공이 다시 지혁에게 돌아오고, 깨끗하게 2루 베이스 위를 거쳐서 1루수 크라우스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 지혁은 어퍼컷을 날렸고 더그아웃과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가장 큰 위기를 넘긴 순간이었다.
*
더그아웃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몸이 찌릿거렸다. 이런 경험은 정말 중독적이다. 투수와 포수가 생각했던 대로, 유도했던 대로, 그렸던 대로. 초구를 던지기 전부터 세워 놨던 계획대로 결과가 나왔을 때의 쾌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투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상대가 신인왕 경쟁을 하게 될 프란시스코 린도어였다는 것도 그 완벽한 쾌감에 양념이 되었다. 첫 만남에서 두 타석에 삼진, 한 타석에 병살타. 이렇게 만들어 낸 건 앞으로의 대결에서도 큰 의미다.
“후우.”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찬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머리가 띵하게 울렸지만, 그런 것 따위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아드레날린을 억제해버린 건 타자들의 물방망이였다. 세 타자로 아웃카운트 세 개가 또 늘어난 것이다. 공도 일곱 개밖에 보지 못했다. 클리블랜드의 유니폼을 입은 코디 앤더슨은, 6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냈다.
“문. 편하게 생각해. 음... 그냥 한 경기일 뿐이니까.”
7회초를 위해 마운드로 올라가기 직전, 힉키가 한 마디를 건넸다. 아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탬파베이의 유니폼을 입고 세 번이나 퍼펙트게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한 사람이니까.
“음. 네. 이 정도는 뭐.”
짐짓 센 척을 하며 모자를 고쳐 쓰고 마운드로 달려 올라갔다. 승리는 고사하고 퍼펙트게임을 당하게 생겼는데, 한 점이라도 내줄 수는 없다고 되뇌이면서.
*
[ 2루수 쪽 깊은 타구, 어! ]
[ 허허... ]
[ 더듬습니다. 더듬었습니다. 2루는 이미 늦었고! 1루로도 던지지 못합니다. 로건 포사이드. 글러브 안에서 한 번 저글을 했습니다. 노 아웃에 다시 주자는 두 명! ]
‘푸하.’
지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쭈그려 앉을 뻔 했다. 재빨리 포사이드에게 한 손을 들어 괜찮은 척 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브랜틀리에게 8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준 것부터가 화근이었다. 대타 라이언 레이번이 밀어 때린 타구를 포사이드가 더듬으면서 주자가 늘었다.
‘이 노무 새끼들이... 인내를 시험하게 하네. 또.’
지혁은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시원하게 연타를 맞아서 게임을 망치면, 혼자서 끙끙 앓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들이 지혁을 수렁으로 밀어넣을 때 기어이 무너지고 만다면, 단체로 끙끙 앓아야 한다. 야수들은 야수들 나름대로, 지혁은 지혁 나름대로.
[ 7회초. 다시 앞서나갈 찬스를 맞았습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번 타석은 카를로스 산타나입니다. 프랑코나 감독, 번트를 댈까요? ]
[ 산타나가 거포 스타일이긴 하지만 지금 타율이 .211입니다.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지네요. ]
패전처리로 뛸 때는 점수를 몇 점을 더 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아내면 좋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어차피 진 경기니까.
새로운 인생에서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 뛰면서, 야구가 주는 압박감에는 그래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살얼음 승부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그 때마다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다시 실감한다.
경기장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휙휙 바뀌고, 마운드에서는 그 기류를 완전하게 읽어낼 수 있다. 지금 지혁의 등 뒤에 서 있는 탬파베이의 야수들은 조급하다. 7회에 올 때까지 아무도 출루하지 못했고, 실책까지 연달아 나오며 투수를 괴롭히고 있다.
“문.”
“왜요?”
“루키인 너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이럴 때 투수가 야수를 이끌어줘야 해.”
“네?”
“그게 되는 놈들이 에이스야. 옛날 프라이스나, 지금 아처처럼.”
한 번 내야로 모였던 야수들이 흩어지는 와중에, 롱고리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말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얼굴 곳곳에 어려 있어서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롱고리아는 자기 위치로 돌아가며 야수들을 한 번씩 크게 부르며 집중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에이스...?”
지혁은 의아하게 되뇌었다. 에이스라고? 내가?
“미친. 왜 울컥하고 난리야. 미친놈아.”
언제 에이스 소리를 들어봤더라. 아마 회귀 전에... 고등학교 때였던가. 몽고메리나 더램에서도 성적이 좋기는 했지만 에이스라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지혁의 생각 속 에이스라는 단어는 진짜 팀을 이끄는 리더에게나 주어지는 호칭이었다. 단순한 1선발, 그 이상의 녀석들.
“문! 집중해! 다른 생각 하지 마!”
힉키 코치가 귀신 같이 알아채고는 더그아웃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지혁은 글러브를 한 번 들어 알았다는 싸인을 보내 줬다.
‘그래. 에이스인지 나발인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산타나부터.’
지혁은 마운드 위에 다시 올라 섰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내려눌렀다. 저기 서 있는 산타나에게만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리베라의 싸인에만.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리베라의 싸인을 입으로 읊었다.
“싱커. 오케이. 몸 쪽 낮게. 오케이.”
오케이. 싱커. 싱커. 싱...커!
“으쌰!”
[ 댑니다! 번트! 투수가 잡습니다! ]
“써드! 문! 써드!”
산타나가 몸을 낮춰서 방망이를 툭 내밀었다. 번트에 익숙하지 않은 녀석인 게 확실했다. 본능적으로 마운드에서 튀어 내려온 지혁의 앞에서 원바운드 된 공이 깔끔하게 글러브 안으로 빨려들어왔다. 그리고 리베라가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미친놈처럼 외쳐댄 방향대로 몸을 틀었다.
“빨리 던져!”
롱고리아가 베이스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지혁은 투구를 하듯이 전속력으로 공을 던졌다. 그리고 롱고리아의 글러브에 지혁의 공이 빨려들어가자마자, 마치 핀볼을 하는 것처럼 공이 튀어나와 1루 쪽으로 뻗어나갔다. 롱고리아도 있는 힘을 다해 공을 던진 모양이었다. 레이저 건처럼 쏘아져나간 공이 크라우스의 미트에 박힌 순간.
양 코너에서 심판 두 명이 동시에 아웃 콜을 외쳤다.
[ 더블 아웃! 클리블랜드의 번트 작전은 대 실패입니다! 여기서 더블플레이가 나옵니다! ]
[ 문의 수비를 좀 보세요.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롱고리아의 어깨도 대단했지만요. 번트가 투수 앞으로 조금 세게 흘러갔네요. 하지만 문의 이 수비는 정말 훌륭합니다. 백핸드 캐치를 하자마자 곧장 3루 쪽으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던졌습니다. ]
[ 2루에 있던 브랜틀리 선수도 그렇게 발이 느린 선수는 아닌데. 넉넉하게 아웃이네요. 이야~ 노 아웃에 1, 2루 상황이 순식간에 투 아웃에 2루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
[ 작전 실패네요. 하하. 프랑코나 감독의 표정을 좀 보세요. ]
하아. 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진 데이빗 모스는 떨어지는 커브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롱고리아는 떠올렸다. 어떤 위기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상황을 넘겨줄 수 있는 녀석을. 아주 예전의 스캇 카즈미어. 얼마 전의 제임스 쉴즈. 그리고 데이비드 프라이스. 올해의 크리스 아처. 이런 녀석들을.
*
따아아악!
7회말. 6.1이닝을 퍼펙트로 틀어막은 앤더슨을 상대로.
클리블랜드의 슈퍼 유망주이자 중견수 출신이자, 지금은 마이너 계약으로 한 해에도 여러 팀을 거치는 ‘지명할당맨’. 한국의 팬들에 의하면 ‘퇴물’이었고, 실제로 탬파베이 레이스에서도 데스먼드 제닝스의 15일 DL을 땜빵하기 위해 긴급하게 영입해서 쓰고 있던.
그래디 사이즈모어가 앤더슨의 패스트볼을 호쾌하게 당겼다. 그리고 공은 뻗고, 뻗고, 뻗어나가서. 클리블랜드의 중견수 마이클 본이 펜스에 매달리며 점프한 위를 넘어 담장 바깥으로 쏘옥, 떨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