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88화 (89/204)

< 88 - 브레이크 타임. >

그래디 사이즈모어의 홈런이 터지는 순간, 경기장에 흐르던 고요한 침묵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퍼펙트를 당하고 있던 팀의 첫 안타가 홈런이었고, 첫 출루가 홈런이었고, 첫 득점이 홈런이었다. 그것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이즈모어가 터뜨린 한 방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심지어 롱고리아와 데헤수스는 삼진과 땅볼로 물러나고 들어왔으면서도 싱글벙글하며 사이즈모어를 찾아 머리를 내리칠 정도였다.

“문. 90개야. 이번 이닝 중에 교체될 수도 있어. 마지막까지 다 짜내서 던져.”

“네.”

“브래드랑 제이크가 불펜에 있어. 7번부터 하위로 가는 타선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알지?”

“물론이죠.”

경기 후반. 초반 93마일 언저리를 맴돌던 지혁의 패스트볼 구속은 90마일 전후로 떨어져 있었다. 싱커도 초반보다 덜 꺾이고. 경기 초반의 지혁과 비교했을 때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기세. 특히, 린도어와 멘데스만큼은 무조건 잡고 가겠다는 의지.

[ 빗맞은 타구, 유격수가 백핸드로 잡아냅니다. 길게 1루로 뿌립니다! In time! 아웃카운트를 잡아냅니다, 에이캡. 어셸라를 처리합니다. ]

[ 이번 회에도 선두타자를 내보냈으면 골치가 좀 아팠을 겁니다. 잘 넘어가네요. ]

[ 8회에도 여전히 마운드에 올라 있는 문. 랭카스터 감독은 브래드 박스버거가 아닌 문을 선택했는데요. 첫 타자를 잘 넘어갑니다. 이어진 타석엔 페르난도 멘데스. 지난 타석에 2루 베이스를 맞는 행운의 내야안타로 출루했습니다. ]

지금까지의 대결을 돌이켜보면, 균형은 미세하게 클리블랜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6.1이닝을 퍼펙트로 틀어막았던 앤더슨의 기세가 매서웠고, 탬파베이는 한 점이라도 내주는 순간 게임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탬파베이는 경기 내내 쫓겨왔고, 클리블랜드는 경기 내내 여유가 있었다.

한 점이라도 내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이 경기를 지배해 온 이 생각의 주체는, 지난 회를 기점으로 클리블랜드에서 탬파베이 쪽으로 넘어왔다. 이제부터 쫓기는 건 클리블랜드다. 멘데스도 마찬가지였다.

[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문, 오늘 경기 탈삼진 8개째입니다. ]

[ 떨어지는 커브의 낙폭을 좀 보세요. 허리춤에서 출발한 공이 플레이트를 스칠 지경까지 떨어졌습니다. 타자 입장에서 저 공은 쫓아갈 수가 없죠. ]

[ 8회에도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는 문의 투구입니다. 누가 이 선수를 루키라고 생각할까요! ]

캐스터의 감탄대로였다. 9번타자 마이클 본은 지난 타석에 이어 다시 한 번 기습번트를 시도했지만, 포수 리베라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쉽게 처리했다. 8회, 깔끔한 삼자범퇴. 지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냈다.

*

“공이 도미니카에서랑은 비교할 수도 없어졌던데?”

“그래?”

“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아졌어. 비디오만 볼 때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하하하. 너도 참 대단한 녀석이야.”

다음 날, 워밍업 시간에 만난 멘데스는 환하게 웃었다. 어제 영봉패를 당했던 선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환한 미소였다.

“재미있겠어.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네 공은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렵고, 또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칠만 하거든. 하하.”

“멘데스. 만약에 있잖아.”

“어. 뭐?”

“네가 내 공을 받는다고 생각해 봐. 넌 어떻게 리드할 것 같아?”

“헤이, 아미고! 스파이 짓을 원하는 거야? 하하하. 말해줄 수 없지.”

지혁은 멘데스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이게 무슨 스파이야. 그냥 너한테 조언을 좀 듣고 싶어서 그렇지. 그러지 말고 말 좀 해줘 봐. 넌 어떻게 받을 거야? 내 공?”

“진지하게?”

“응.”

“흠. 글쎄. 생각을 안 해 봐서.”

어제 자신의 팀을 상대로 8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 지혁을 바라보며, 멘데스는 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공으로는 아마 어제 경기가 최선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한 점도 안 줄 거라면 어제 경기처럼 던져야겠지. 네 공으로는. 최대한 치기 어렵게, 최대한 비슷한 공으로. 그렇게 던지는 게 안 맞을 수 있는 방법이야. 근데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냥 몇 대 맞고 말지, 라는 생각으로 던질 거라면 좀 더 과감하게 던질 것 같아. 하하! 투수들은 이런 스타일을 조금 싫어하지만.”

“음...”

“우리 팀 에이스, 코리. 걔는 내 스타일이랑 잘 맞아. 상대가 치든지 말든지 그냥 스트라이크 존 안에 쑤셔넣는 스타일이지. 구위가 워낙 좋으니까 맞아도 아웃될 확률이 훨씬 높고. 맞으면 맞는 거고, 뭐.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대신 존 안으로 엄청 공격적으로 집어넣으니까 볼넷은 거의 없고, 삼진률이 엄청 높지. 투구수도 확 줄고. 이닝도 많이 먹고.”

구속과 구위의 차이. 도망가지 않고 더 공격적으로 던지기 위해서는 이게 필수적이다. 안정적으로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차지한 지금 상황에서, 지혁보다 위에 있는 투수들과의 차이점도 딱 그것이었고. 멘데스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제 컨디션, 아주 좋았지?”

“어... 응.”

“하하. 첫 공 보고 바로 알았어. 뭐, 거짓말한 것도 승부니까. 좋아. 네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공을 던져서 빗맞출 수 있어. 공격적으로 가도 돼. 하지만 만약 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라면, 내가 리드하는 것처럼 존에 집어넣다가는 시원하게 얻어맞을 거야.”

정답이다. 멘데스에게서 뭔가 개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확인한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선발 한 자리는 충분하다구, 아미고. 그렇게 쫄아 있지 마. 완벽한 피쳐는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래. 고오맙다.”

“그럼 난 먼저 간다! 오늘 코리가 등판하는 날이니까, 한 번 신경 쓰고 봐. 어떤 식으로 던지는지 말이야. 하하. 고생해!”

*

“지혁 선수. 홈런 두 방이 모두 커브에서 나왔는데요.”

“네. 유독 커브가 가운데로 좀 많이 몰렸네요. 아쉬워요.”

“이제 올스타 브레이크에 들어가요. 어떤 계획이 있나요?”

“글쎄요. 쉴 수 있는 시간은 사흘 정도인데... 그냥 푹 쉬려고요. 조금 쉬면 구위도 다시 올라올 것 같아요.”

“조금 쉴... 예정이다. 음. 질문은 다 끝났어요. 인터뷰 고마워요.”

조예은이 힘내라는 말을 덧붙이고 돌아섰다.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두고 나선 마지막 경기에서 휴스턴에게 투런 홈런 두 방을 허용하며 쓰라린 패전을 안았다. 카를로스 코레아는 확실하게 제압했다는 게 위안이 되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문. 너는 나머지 두 경기는 출근하지 않고 쉬어.”

“아, 괜찮은데요.”

“괜찮은 게 아니야. 메이저리그에서 반 시즌을 풀타임으로 버텼어. 어차피 남은 두 경기에는 등판도 없고,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까지 연결이니까. 차라리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는 게 팀한테도 도움이야. 구위가 많이 떨어졌잖아.”

“...네.”

힉키의 말에는 위로와 걱정이 반씩 담겨 있었다. 오늘 경기로 전반기에만 113.2이닝을 던졌다. 다섯 번째 선발로 시작했던 지혁은 이제 세 번째 선발 위치로 올라와 있었다. 루키 투수가 전반기를 빼놓지 않고 소화하며 8승 4패, 평균자책점 2.94의 성적을 거뒀으니 밖에서 보기에는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시즌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지금의 지혁이 던질 수 있는 한계점에 점점 다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느린 편은 아니지만, 결코 빠르다고도 할 수 없는 패스트볼. 무브먼트와 위력 있는 싱커.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고 상황만 만들어지면 언제든 결정구로 들어갈 수 있는 커브.

“딱 3선발 급이네.”

지혁은 스스로의 피칭을 되돌아보며 생각했다.

“당신은 눈이 너무 높아요. 첫 시즌부터 클레이튼 커쇼나 매디슨 범가너처럼 던질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패트릭은 이제 조금 질렸는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아니, 뭐. 나도 성적에는 만족입니다. 더 좋아질 수는 없을까, 하는 거지.”

“내가 이런 말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뒤를 좀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재작년 이맘 때 당신 뭐 하고 있었죠?”

“...”

“싱글 A에서도 5선발이었어요.”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 사이에 재능을 얻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데이토나에서 간당간당하던 선수가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8승을 하고 있는 투수가 됐다니까. 이건 누가 봐도 인생 역전이고 로또 당첨인데.”

“알거든요.”

패트릭은 혀를 쯧 찼다.

“대체 왜 그렇게 급한지... 경험이 더 쌓이면 팀 사정에 따라 2선발까지도 충분하단 말입니다.”

지혁은 신이 이야기했던 드와이트 구든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샌디 쿠팩스는 아주 이상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대로 신의 조건에 충실했다. 그리고 구든도 마찬가지였고. 탐욕스러운 본능을 채우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선수 생명을 희생했다. 계속해서. 그렇게 갈수록 좋아졌던 것이다.

지금? 조금의 재능을 더?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조금만 더 받으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구속과 구위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은데.

유혹은 강렬하다. 점점 더 한계에 부딪힌다는 생각이 들수록, 재능이 탐이 나기 시작했다. 전생의 그를 새로운 투수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면, 메이저리그 3선발이라는 자리는 절이라도 넙죽 하고 받아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3선발 급 선수가 되고 보니 이 위로 올라가고 싶어졌다. 구속만 더 빨랐으면. 그래. 95마일, 96마일짜리 공을 던질 수 있으면. 싱커가 93마일 정도 나온다면. 지금까지의 성적과는 차원이 다르게 변할 것이다. 멘데스의 말처럼 그냥 치라는 식으로 존에 쑤셔박을 수 있을 것이다.

“푸우우.”

만약 신인왕을 놓친다면, 남은 선수 생명은 6년으로 줄어든다. 6년이라니. 말도 안 되게 적은 양처럼 느껴졌다. 그럼 지금처럼 던진다고 했을 때 신인왕을 받을 수 있을까? 그건 모른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재능을 위해 선수 생명을 더 희생해야 할까?

“진짜로. 조금 쉬어야 하긴 하겠네요.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있고.”

“그래요. 그리고 정리하긴 뭘 정리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으니까. 이대로만 가도 당신 앞길은 순탄합니다.”

“... 그러죠.”

지혁은 머리를 도리질쳤다. 패트릭은 걱정하듯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물론 쉴 생각은 없었다. 이번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

*

- 탬파베이에 없는 것 세 가지.

- FOX 스포츠, 에디터 샘 호킨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을 향해 시즌 전에 쏟아졌던 예상을 기억하는가? 필자는 탬파베이를 지구 우승이 가능한 팀이라고 언급했지만, 다른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의 예상은 조금 달랐다. 4위, 혹은 지구 꼴지까지 예상한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전반기가 끝난 지금, 결과를 돌아보자. 만약 전반기까지의 결과를 두고 도박을 했다면, 필자는 아마 테이블에 놓인 돈을 전부 쓸어담았을 것이다. 그렇다. 탬파베이 레이스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놀라운 결과다.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은 대니 랭카스터 감독을 필두로, 신인급 선수들이 많이 배치된 라인업을 들고 만들어 낸 결과니까.

하지만 시즌이 끝날 때에도 내가 이 도박의 승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조금 비관적으로 돌아섰다. 탬파베이에는 없는 ‘세 가지’ 때문이다.

탬파베이에는 없는 것 첫 번째. 바로 올스타다.

탬파베이는 지구 1위를 차지한 팀들 중에 올스타를 배출하지 못한 유일한 팀이다. 감독 추천으로 주어진 자리에 유일하게 크리스 아처만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유일한 올스타 후보인 에반 롱고리아는 이번 시즌 고질적인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좋게 생각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S급 스타가 존재하지 않아도, A~B+급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지구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이건 시즌 후반기로 갈수록 약점이 될 게 분명해 보인다. 결국 통계는 평균으로 회귀하게 되어 있고, 지금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선수들도 결국에는 전반기보다는 못한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으니까. 대표적인 주자가 루키 투수 문지혁과, 타선에서는 로건 포사이드, 케빈 키어마이어다.

지금까지 탬파베이의 위기 상황에서 팀을 구원해왔던 게 이 세 선수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후반기에 이들의 페이스가 떨어지면 팀의 페이스가 같이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탬파베이에는 없는 것 두 번째. ‘3할’이다. 탬파베이의 팀 타율은 .249로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24위다.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팀 내 타격 1위는 .276을 치고 있는 에반 롱고리아다. 홈런 1위는 11개를 때린 스티븐 수자 주니어이고. 이 성적을 보고서도 탬파베이가 지구 1위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탬파베이는 아주 기형적인 팀이다. 훌륭한 투수력과 수비력으로 공격력의 빈약함을 커버하는 팀. 하지만 결국 점수를 내야만 승리하는 것이 야구라고 생각해 볼 때, 후반기로 갈수록 빈약한 공격력이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하다.

... (하략)

*

“신님.”

“왜 그러는가?”

“힘드네요.”

“흐흐. 내가 필요한가?”

“...”

결정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