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죠.”
“얘기하게.”
“이대로는 모자라요.”
“그렇게 느꼈나?”
“음... 네. 아니요. 반반이랄까.”
신은 지혁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선수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기척이었다.
“신님.”
“왜 그러는가?”
“힘드네요.”
“흐흐. 내가 필요한가?”
“...”
결정했다. 하지만 지혁은 한참 동안 말하지 않았다.
신은 기다렸다. 어떤 재능이라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혁이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면서, 신은 가만히 맥주만 들이켰다.
“그 반대...죠.”
“응? 뭐라고?”
“반대라고요. 잠시만 제 곁을 떠나 있어 주셔야겠어요.”
“...허어?”
신은 몇 십 년 동안이나 짓지 않았던 경악에 물든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내내 생각해 봤는데요. 쿠팩스나 구든의 얘기를 해 주셨을 때, 가장 핵심이었던 내용은 스스로가 재능을 받았던 이유에 충실하라는 거잖아요. 맞죠?”
“... 그렇지.”
“저는 지난 생에 18년 동안 정말 치열하게 했어요. 있는 방법 없는 방법 다 끌어다 해 봤고, 아무리 안 되는 일이라고 해도 물고 늘어질 수 있을 때까지 늘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땅바닥만 바라보고 얘기하던 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눈동자에는 의지가 강력하게 담겨 있었다.
“저번 생이 내 한계였다고 하셨죠. 이번 생에 아직 1년하고 반 정도 부딪쳐 봤어요. 아직 난 내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좌절도 더 많이 할 거고, 실패도 더 많이 할 거고. 메이저리그에서 쓸 수 있을 만한 타고난 재능이 없는 놈이니까 지금 느끼고 있는 한계를 쉽게 못 벗어날지도 몰라요. 하지만 노력했기 때문에 주어진 새 인생에서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재능에만 의존하다가는...”
지혁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했다.
“드와이트 구든보다도 못한 삶으로 끝날 수도 있어요. 적어도 그 사람은 자기가 선택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충실했으니까. 그래서 세계 최고 중 하나가 되고 역사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뇨! 없어지시면 안 되죠. 제 인생 박살나는데. 잠깐만 어디 휴가라도 좀 다녀오시면 안 될까요?”
“휴가라니. 흐하하, 흐하하핫!”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고,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신님을 찾아야 하는데. 신님이 자꾸 옆에 보이면 내가 너무 강한 유혹에 빠져버리니까.”
지혁이 느낀 한계는 분명했다. 지금의 그는 클레이튼 커쇼나 크리스 세일, 매디슨 범가너 급의 선수가 아니며, 앞으로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그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또 그 한계에 부딪혀서 좌절하고 낙담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그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해버리는 것만큼은 문지혁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패전처리로라도 뛰려고 악착같이 버텨냈던 마이너리그 생활. 메이저리그에 올라와서도 정말 지독하게 보냈던 인고의 시간들. 그런 것들을 지탱해줬던 힘은. 언젠가는 나도 메이저리그에서 조금 더 잘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따위가 아니었다. 지혁 스스로도 재능의 차이는 알고 있었고, 알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냥 노력하는 것 말고는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능의 차이를 어떻게든 좁히기 위해서 하루 18시간씩 야구장에서 살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러닝을 했고 밤이 깊어갈 때까지 쉐도우 피칭을 하고 비디오를 돌려 봤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때만큼 절실하게 노력하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이 맨몸으로 진흙탕에서 구르던 때처럼, 그만큼 처절하게?
지혁이 고민했던 건 이거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 아직 그 정도까지 해 보지 못했다.
단순히 햇수로만 따져도 싱커를 받은 지 겨우 1년 반. 커브를 배운 건 1년도 채 안 됐다. 싱커와 커브 그 자체도 더 잘 던질 수 있을 것이고, 패스트볼과의 시너지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더 해 보면.
“최소한 한 시즌만이라도, 아니지. 최소한 반 시즌만이라도. 정말 인생 마지막인 것처럼 쏟아부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신님이 옆에 계시면, 내가 자꾸 의지하게 돼요. 패스트볼 구속 3마일만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싱커가 2마일만 더 올라가면 진짜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없을텐데. 아니면 체인지업 하나만 기가 막히게 떨어뜨려도 완전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옆을 보면 신님이 있잖아요.”
“흐흐... 흐하하. 이런 일도 있을 수가 있군 그래. 나를 거부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 내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지금 있는 공으로 어떻게든 비벼봐야죠.”
“재능이 없어진다면?”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신님은 내가 겪고 있는 성장을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신님의 능력과 제 노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하시고.”
“으하하핫!”
신도 평생에 가장 재밌는 인간을 만난 기분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에,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벽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부딪혀 보겠다는 의지.
신의 존재를 알고 있던 그 어떤 사람도 신을 잠시 떠나보내겠다는 대담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신과 계약한 재능이 없어질까 봐, 혹시라도 신이 사라지며 재능을 받기 이전의 본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밤에 잠도 못 자고 신의 존재를 확인하던 게 대부분이었다.
드와이트 구든 같은 탐욕스러운 녀석은 자신의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고, 심지어 샌디 쿠팩스조차도 늘 쫓기며,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하지만 눈앞의 문지혁이라는 투수는 다르다. 신이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신을 너무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인지.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지혁이 공표한 것은 분명했다.
신에 의존하는 것만으로 야구를 하지는 않겠다는 것.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벽을 한 번 뛰어넘어 보겠다는 것. 이건 신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좋아. 좋네, 좋아.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자네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겠다고 내 약속하지. 자네 말처럼 휴가를 좀 다녀오는 게 낫겠어. 흐하하.”
“이번 시즌까지만 한 번 해 볼게요. 내 방식대로. 저번 생에 안 되는 벽에 하도 부딪혔더니 그 정도만 해도 대략 견적은 나오니까요.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나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해보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선택을 해 보려구요.”
신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 열심히 해 보게. 오늘 아주 기분이 좋군. 자네는 참 재미있는 인간이야. 자네를 선택했던 게 아주 만족스럽구만. 시즌이 끝나는 날 돌아오도록 하지.”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농담을 한 마디 건넸다.
“네. 그 때에도 제가 한계를 못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라면 와서 축복이나 좀 내려 주세요. 한 번만 수명 깎지 않고 재능을 주신다거나. 좀 그렇게.”
“안 되네. 흐흐.”
신은 웃으며 사라졌다. 그리고 지혁은 곧장 핸드폰을 들었다.
“영상담당팀이죠? 아, 네. 스캇. 저 문인데요. 이번 시즌 제 영상이 필요해요. 전부 다. 그리고 홈경기에는 타자 쪽 시점에서 잡은 영상 있죠? 그것도 전부 다 주세요. 네? 아, 미안해요. 그런데 이제 휴가 끝나잖아요. 하하. 부탁 좀 할게요.”
“어, 연두야? 요새 바빠? 일 없지? 그래. 일 없는 거 알아. 이번 시즌에 혹시 페르난도 멘데스가 타격한 거. 타자 쪽 시점에서 잡은 영상들 좀 구할 수 있을까? 응. 전부. 야씨!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응... 전부. 미안해. 내가 밥 근사한 걸로 살게.”
신까지 잠시 떠나보냈는데. 허투루 할 수는 없지. 배수진을 친 셈이니까. 지혁은 곧장 태블릿을 켜고 가장 최근 휴스턴 전 경기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두 달. 경기가 없는 날에는 잠을 자는 시간을 다섯 시간까지 줄였다. 마치 군대의 하루 일과표처럼 꽉 쥐어짠 하루 일정을, 선발 경기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화했다.
선발 경기를 치른 다음 날을 제외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부터 달리기를 했고, 곧장 요가를 끊어 어떻게든 몸을 더 유연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수건을 하나 들고 거울 앞에서 쉐도우 피칭을 반복하며 릴리즈포인트를 점검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게끔.
싱커와 패스트볼, 커브와 패스트볼, 싱커와 커브의 시너지를 잘 살리기 위해 하루에 지혁의 투구 영상을 세 시간씩 돌려 봤다. 힉키가 질겁하며 뜯어말렸지만, 이번 시즌은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불펜 투구 개수도 확 끌어올렸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공을 던지기도 했다.
나머지 시간은 구단과 패트릭과 연두가 마련해 준 세이버매트릭스에 관한 공부. 또 타자들의 스탠스, 타격 이론, 타석에서의 마음가짐 등을 발표한 논문과 영상 자료를 공부하는 데 쏟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무슨 일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너 미친 거 같아.”
랭카스터 감독도, 마이너리그에 내려갔다가 다시 불려올라온 형진도, 그리고 매번 공부할 자료들을 한아름 준비해주는 연두조차도. 다들 지혁이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팀 동료들의 개인적인 초대나 맥주 약속 같은 것들을 모두 거절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라커룸과 클럽하우스에서조차 태블릿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단순히 워크 에씩이 뛰어난 정도의 선수가 아니라, 그야말로 여기에 인생을 건 사람처럼. 지혁은 아주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런 지혁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다들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달 만에 구속이나 구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달 동안 아무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을 다 끊고 야구에만 몰두한 보람은 점점 더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좋아지기 시작한 건 커브. 브랜든 웹의 싱커는 이미 지혁에게 익숙한, 너무나 유명한 구종이었고, 지혁을 지도했던 투수코치들에게도 그랬다. 알렌 투수코치는 그 싱커를 며칠 고민하더니 지혁의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만큼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지 미유타의 커브는 최소한 이 곳 메이저리그에서는 아무도 접한 적 없던 커브였다. 이 커브를 발전시키는 건 오롯이 지혁의 몫이었다.
[ 오, 마이, 갓. 오늘 커브로만 삼진을 일곱 개 잡아내고 있습니다. 문. ]
[ 아름답네요. 좌타자인 크리스 데이비스의 몸쪽 높은 공처럼 날아가다가 바깥쪽 가장 낮은 곳까지 떨어집니다. 환상적인 커브입니다. ]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두 달 동안 확실하게 깨달았다. 후지 미유타라는 녀석은 전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만 의지해서 커브를 던진 게 분명했다.
공을 던질 때마다 조금씩 다른 공이 날아간다. 휘감아 내리는 검지와 중지의 힘, 튕겨 올리는 엄지의 힘의 균형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서 이 커브는 다른 궤적을 띄었다. 게다가 손목의 방향에 따라서 커브가 떨어지는 각도도 조금씩 변하고. 이 공은 결국 많이 던지면 던질수록 얻게 되는 손가락 끝의 감각과 느낌으로만 컨트롤해야 하는 공이다.
두 달 동안 정말 많이 던졌다. 손끝의 감각이 미세해질 대로 미세해졌고, 엄지를 튕겨올리는 시점에도 더 이상 실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커브를 쥐는 실밥도 자유자재로 틀 수 있게 되었다. 제구도, 낙폭도. 커브에 대해서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오늘 경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전형적으로 들어올리는 스윙의 거포 군단이었고, 지혁의 낮게 떨어지는 싱커를 들어올리기 위해 잔뜩 준비하고 나온 팀이다. 하지만 가슴께를 스치는 인하이 패스트볼과, 바깥쪽 낮은 코스로 떨어지는 아웃로우 커브는 싱커에 타이밍을 맞췄던 볼티모어 타선의 힘을 완전히 빼 놓았다.
[ 8이닝 동안 허용한 안타가 단 한 개! 볼넷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믿어지시나요? 지금까지 투구수가 84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무조건 9회에도 올라올 겁니다. 문. ]
[ 오늘 정말 압도적인 피칭이네요. 뭐라고 설명을 드리기도 어렵습니다. ]
[ 이제 9회말로 갑니다. 트로피카나 필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