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91화 (92/204)

< 91 - 멋진 악당. >

[ 웰컴 투 미닛메이드 파크!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야구의 시즌이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요! ]

[ 하하. 마크. 하지만 결과는 도무지 보이지가 않는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군요. ]

[ 이런! 제 멘트를 빼앗아 가시다뇨. 곤란합니다. 하지만 여기 노마의 말이 정확합니다.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한 장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곳 휴스턴의 미닛메이드 파크에서 그 한 장의 주인공을 가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매치업이 있습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탬파베이 레이스! ]

오늘 경기는 전국 중계였다. 선데이 나잇 베이스볼(Sunday night baseball)이 아니었음에도, ESPN은 대대적인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다. 그들은 아마 2011년의 기억을 되살렸는지도 모른다. MLB.com이 ‘Best. Night. Ever.(역사상 최고의 밤)’이라고 언급했던 2011년의 주인공도, 공교롭게도 탬파베이 레이스였다.

그 때 탬파베이 레이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연장 11회에 터진 에반 롱고리아의 끝내기 홈런으로 뉴욕 양키스를 꺾고, 그날 밤 보스턴 레드삭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기적 같은 역전패를 당하면서 와일드카드 판을 뒤집었었다.

올해의 와일드카드 레이스가 그 때와 비슷하게 흘러갈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아직 열 경기가 남아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이 경기.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딱 두 경기 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두 팀의 맞대결은 이번 시즌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기인 것은 확실하다.

[ 탬파베이 레이스의 1회초 공격이 시작되겠습니다. 휴스턴의 선발, 댈러스 카이클. 올해 아메리칸리그 사이영 상 후보로 강력하게 손꼽히고 있습니다. ]

[ 환상적인 투수죠. 낮게 깔리는 패스트볼 계열의 공으로 그라운드볼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도 강력한 싱커로 탈삼진을 잡아내기도 하고요. ]

[ 노마? 타자의 입장에서 카이클의 공은 어떨까요? ]

[ 오, 이런. 상상도 하기 싫군요. 홈플레이트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가만히 있는 공이 단 한 개도 없는 선수에요. 패스트볼은 떠오르는 느낌을 주고, 커터, 투심, 거기다 체인지업도 환상적이죠. 싱커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겁니다. ]

오늘의 객원 해설자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과장된 엄살을 섞었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만큼은 가르시아파라의 말에 손을 들어줘야 한다.

2015시즌 카이클의 투구는 타자들에게 악몽이었다. 거의 가슴팍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기른 턱수염을 휘날리며 공을 던지는 카이클은 결코 빠르지 않은 구속으로도 타자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투수였다.

[ 스윙! 건드리지 못합니다. 삼진으로 물러나는 수자 주니어. 순식간에 투 아웃을 잡아냅니다. ]

[ 오늘의 카이클도 대단하네요. 제구가 완벽합니다. ]

[ 타석엔 에반 롱고리아. 탬파베이가 2011년의 기적을 다시 만들기 위해선 롱고리아의 각성이 필수적입니다. 그 날 밤에도 혼자 홈런 두 개를 터뜨렸습니다. 그 중 하나는 워크오프였구요. ]

공격력이 빈약한 탬파베이에서 가장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타자는 누가 뭐래도 롱고리아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카이클의 제구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바깥쪽 가장 먼 곳에서 살짝 꺾여 들여오는 백도어성 커터. 행크 콩거가 환상적인 프레이밍을 덧댄 그 공은 베이브 루스가 와도 제대로 칠 수 없는 공이었다.

[ 루킹 삼진! 삼진 두 개를 곁들인 카이클. 1회를 완벽하게 시작합니다! ]

롱고리아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혁은 롱고리아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마운드에서 담담하게 내려가는 카이클의 뒷모습. 그리고 힘차게 뛰어 들어가며 공격을 준비하는 휴스턴의 야수들. 조금이라도 건질 게 있을까 싶어 그들의 모습에만 시선을 박아 두고 있었다.

“문. 가자.”

오늘 지혁의 파트너인 카살리가 지혁의 어깨를 툭 쳤다. 이 녀석도 지혁만큼이나 휴스턴 야수들의 자료를 돌려 봤다. 랭카스터의 선택이 리베라가 아니라 카살리인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지혁에게는 상관없었다. 포수를 크게 가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그래. 해 보자고.”

모자를 고쳐 쓰고 경기장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더그아웃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가 지혁을 맞이했다. 흙을 밟다가 잔디 위로 올라서고, 다시 마운드의 흙을 밟는 매 순간마다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듯 다른 느낌이 지혁을 사로잡았다.

마운드의 공기는 후끈거리기도 했다가, 또 더없이 차갑기도 했다. 엄청난 조명 빛이 마운드를 따갑게 내리쬐다가도,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떠오른 달빛이 그를 시원하게 감싸안기도 했다.

“나쁘지 않네.”

수요일 밤인데도 경기장을 만원으로 채운 관중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카이클의 수염을 따라 턱에 잔뜩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주황색 피켓을 들고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탬파베이의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기도 했고.

“문!”

“어? 왜요?”

“멋진 악당을 하기에 딱인 밤 아니야?”

롱고리아는 첫 타석의 삼진을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이 웃었다. 그는 시즌 중반 때부터 지혁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혁에게 팀의 에이스가 가져야 할 무의식을 툭툭 건드려 왔다. 롱고리아가 보기에 지혁이 갑자기 변해 버렸던 그 미친 두 달은, 에이스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멋진 악당이라... 그 말 멋있는데요?”

“오케이. 그거라고.”

롱고리아가 눈을 찡긋거렸다. 지혁은 픽 웃으며 마운드에 섰다. 롱고리아 덕분일까. 이리저리 널뛰는 것 같던 마운드 안의 분위기가 침착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 뒤가 없는 경기. 두 번째 인생인데, 이런 경기에서 후회를 남길 수는 없다.

“플레이 볼!”

구심이 손을 내밀었고, 지혁도 곧장 와인드업 자세에 들어갔다.

[ 문의 초구. 몸쪽에 꽉 찬 스트라이크. 호세 알투베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 13승 7패, 평균자책점이 2.81입니다. 댈러스 카이클과 비교해서도 많이 밀리지 않는 성적이에요. 도대체 이 선수는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

[ 그러게 말입니다. 탬파베이가 어린 투수를 조련하는 능력만큼은 정말 알아줘야 합니다. ]

[ 여기서도 노마의 의견을 한 번 물어볼까요? 노마. 타자의 입장에서 문과 같은 투수는 어떻게 느껴집니까? ]

[ 재밌죠. 이 선수는 아주 독특합니다. ]

[ 말씀드리는 순간 알투베가 2구를 당깁니다. 유격수 베컴의 정면으로 향하는 공. 베컴이 잡아서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

[ 이어서 말씀드리죠. 보스턴의 선수들이 얘기하더군요. 4월의 공보다 5월의 공이 더 좋고, 5월의 공보다 6월의 공이 더 좋다고. 그리고 후반기에 들어서서는 전반기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공을 던진다고 하더군요. ]

[ 오. 누가 그러던가요? ]

[ 더스틴 페드로이아요. 시즌 초만 해도 평범한 좌완을 상대하는 것 같았는데 요새는 기세도, 공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가끔은 휴스턴의 카이클을 보는 것 같고, 또 가끔은 토론토에 가 있는 프라이스를 상대하는 것 같다고요. ]

“으쌰!”

던지는 순간, 강하게 엄지를 튕겨올렸다. 낮은 쪽 공을 노리고 무릎을 굽힌 채 잔뜩 웅크려 기다리고 있던 마윈 곤잘레스가 그 순간 허리를 뒤로 굽히며 배트를 눕혔다. 하지만 눈높이로 향하는 것처럼 출발하던 공이 무지개 모양을 그리며 존 안으로 떨어져 박힌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 루킹 삼진! 마윈 곤잘레스를 상대로 첫 번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그나저나 카이클과 프라이스라니, 비교 대상이 어마어마하군요. 사이영 상 후보자들 아닙니까? ]

[ 그래서 저도 말했죠. 농담이 너무 과하다고. 그랬더니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농담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카이클처럼 영리하기도 하고, 프라이스처럼 배짱이 있기도 하다고요. 두 선수의 장점을 조금씩 섞어 놓은 선수 같다고 말했습니다. ]

[ 흥미롭군요. ]

[ 진짜 흥미로운 승부는 지금부터입니다. 문과 함께 나란히 신인왕 후보에 올라 있는 카를로스 코레아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

장내 아나운서의 호쾌한 소개 멘트가 울리고, 미닛메이드 파크의 관중들이 유독 큰 사랑의 함성을 보내기 시작한다. 잠재력 높은 어린 선수들이 많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선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295에 23홈런을 때려낸 파괴력. 게다가 엄청난 수비까지.

“왔네.”

등번호 1번을 달고 있는 코레아가 타석에 들어섰다. 신인인 주제에 한 자리 수의 등번호를 준 것 뿐만 아니라 3번 타선에 배치하기까지 했다. 가장 잘 치는 타자로 인정해줬다는 뜻이다. 게다가 타석에 들어서기만 했는데 쏟아지는 이 환호성.

“내가 악당이면, 이 녀석이 정의의 사도는 되는 건가.”

지혁은 공을 허벅지에 쓱쓱 문대면서 나지막이 되뇌었다. 코레아가 연습 스윙 몇 번을 한 뒤 타석에 섰다. 유격수답게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격인데도 뽐내는 위압감은 제법 대단하다. 쏟아지는 환호를 등에 업기라도 한 듯한 얼굴에서는 무서운 눈빛을 보여주고 있고.

“야구는 눈빛으로 하는 게 아니야, 임마.”

지혁의 초구.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에 형성된 패스트볼. 92마일이 찍힌 공이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통과했다. 조금 움찔거린 심판이 뒤늦게 스트라이크 콜을 외치자, 휴스턴의 홈 팬들이 야유를 쏟아냈다.

카살리는 싱커 싸인을 보내왔지만,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가장 낮은 쪽을 통과한 공이 스트라이크 선언을 받았다. 이번에는 가장 높은 쪽을 공략해 보고 싶었다. 높낮이를 극대화할 수 있다면 커브가 조금 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카살리가 무릎을 살짝 들어올려 조준점을 높은 곳에 맞춰주었다.

딱!

2구. 한가운데 높은 공. 제대로 맞았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타구였지만 코레아의 스윙이 살짝 밀렸다. 1루 쪽 파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빠져나가는 파울. 코레아의 얼굴에도 아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오케이! 카운트 좋다!”

“나이스 볼, 나이스 볼!”

야수들의 격려가 쏟아졌지만 지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혁은 연두가 가져다줬던 통계 자료를 떠올리고 있었다.

코레아는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카운트에서 스윙을 주저하지 않는 녀석이다. 그런데도 삼진율이 그렇게 높지 않다. 특히 낮은 쪽 코스의 컨택률이 대단히 좋은 편이다. 연두가 자료에 덧붙여 두었다. 떨어지는 변화구에 대한 대처가 아주 좋다고. 변화구에 대한 컨택률은 메이저리그 타자들 전체를 통틀어서도 상위권이라는 평가도.

카살리의 싸인이 커브를 가리켰다. 아니야.

싱커. 아니, 그것도 아니야.

카살리가 아주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지 하나를 폈다. 패스트볼.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카운트. 문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습니다. 3구. 카살리가 몸쪽으로 살짝 붙어 앉는군요. ]

[ 떨어뜨리는 공이 좋을 것 같은데요. ]

[ 오! ]

지혁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 승부는 경기의 기세를 좌우할 수 있는 승부였다. 지혁과 코레아 모두 루키였고, 또 이번 시즌 팀의 기세를 앞장서서 이끌어 온 돌격대장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찍어누르고 갈 수 있다면. 이 승부는 단순히 1회의 승부만이 아니라 경기 전체에 큰 영향을 주는 승부가 될 것이었다.

나란히 쥔 두 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실밥을 때렸다. 마치 대포가 뿜어져 나가듯이, 지혁의 손가락 끝을 떠난 공이 일직선을 그리며 코레아의 가슴 앞으로 뻗어져나갔다. 그리고 코레아도 어깨 뒤에 둔 방망이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95마일!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으로 코레아를 헛스윙 삼진 처리합니다. 1회말을 마무리하는 문. 두 루키 스타 플레이어의 첫 번째 승부는 문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

코레아는 스윙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라앉지 않은 공은 카살리의 미트에 정확하게 박힌 채였다.

“나이스!”

담담하게 마운드를 내려가는 지혁의 엉덩이를 쳐 주는 야수들의 격려가 기꺼웠다. 멋진 악당의 첫 출발은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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