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92화 (93/204)

< 92 - 멋진 악당(2). >

5회말이 끝난 시점. 스코어는 1대1.

4회말 호세 알투베에게 던진 높은 커브가 미닛메이드 파크의 좌중간, 가장 짧은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오늘 경기에서 딱 하나 던진 실투였다.

하지만 5회초, 탬파베이도 카이클에게 복수의 한 방을 먹였다. 이번 시즌 단 16개의 홈런을 허용했던 카이클에게 팀 베컴이 뜬금없이 홈런을 갈겨댄 것이다. 맞는 순간 까마득하게 떠오른 공은 좌중간을 훌쩍 넘어 새카만 지역에 떨어졌다.

유망주 순위에서는 형진이 베컴보다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수비력 차이가 눈에 보일만큼 나는데도 불구하고 랭카스터가 베컴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장타력. 오늘 경기 선발 라인업에 베컴을 집어넣은 이유를 증명한 한 방이었다.

“한 점 승부야, 너희들. 출루하게 되면 벤치 싸인을 특히 유의해서 봐.”

캐쉬 코치는 야수들을 붙잡고 단단히 일렀다.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떨어지는 탬파베이는 한 명의 주자가 정말 눈물 나게 소중한 팀이다. 더구나 상대는 사이영 상 후보인 카이클. 연타를 때려내서 주자를 불러들이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자, 출루해 보자고!”

“고, 브랜든, 고!”

거의 목이 쉴 정도로 외쳐대는 백업 선수들 사이로 브랜든 가이어가 헬멧을 쓰고 걸어 나갔다. 6회초. 다시 1번부터 시작하는 공격. 선두타자 가이어가 출루할 수만 있다면, 한 점을 짜내기에는 가장 확률이 높은 타순이다.

[ 5이닝 동안 피안타 두 개와 볼넷 한 개만 내주며 호투하고 있는 카이클. 탬파베이의 상위 타선을 맞이합니다. ]

[ 베컴에게 홈런을 맞았지만 페이스는 흔들리지 않았거든요. 탬파베이의 타자들이 어떻게 상대할지 궁금합니다. ]

[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카이클의 초구. 바깥쪽으로 벗어나는 패스트볼입니다. 원 볼. ]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타석에 집중했다.

“볼!”

“스트라이크!”

...

“볼!”

4구. 바깥쪽에 들어온 커터. 더그아웃에서 보기에도 아주 먹음직스러운 높이로 들어온 공에 가이어가 배트를 내지 못했다. 가이어는 누가 봐도 아쉬워하는 모션을 취했다. 놓쳤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심은 그 공을 볼로 선언했다.

4구째가 볼 선언이 되자 카이클이 한참 동안 구심을 쏘아봤다. 묘한 기류가 흐르자 휴스턴 관중들이 길고 긴 야유를 뿜어댔다. 휴스턴의 힌치 감독도 더그아웃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와 두 손을 벌리며 항의의 제스처를 보냈다.

“왔다. 이거 왔어.”

외투를 걸치고 있던 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더그아웃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투수들의 심정은 투수들이 안다. 분명하게 들어간 공이 볼로 선언되는 순간, 투수의 사고 회로에는 비상 스위치가 켜진다. 그리고 감정 회로는 더욱 화끈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스트라이크 존이 갑자기 좁게 느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리 냉정한 투수라고 해도 피가 파란색으로 흐르지 않는 이상은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이 바로 손가락 끝이다. 투수들이란 존재는 그렇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마음에 누군가 작은 돌멩이를 하나 던지게 되면 그 돌멩이에서 생긴 작은 파동이 큰 회오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탬파베이에게는 운이 좋게도 지금 심판이 그 호수에 돌멩이를 던졌다.

“볼! 베이스 온 볼스!”

5구. 카이클의 낮은 싱커를 가이어가 참아냈다. 카이클의 미세한 감정의 요동을 가이어도 눈치챘던 모양인지,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라는 배팅 카운트에서도 방망이를 내지 않은 것이다.

“됐어!”

“굿 아이, 굿 아이(Good eye)!”

가이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장비를 풀어내고 1루로 향하자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이 부산스러워졌다. 벤치 코치인 캐쉬는 한참 동안이나 종이를 쳐다보고는 몸 여기저기를 만져댔다.

카이클을 상대로 선두타자가 출루한다는 것. 오늘의 카이클이라면 한 경기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 1루에 나가 있는 가이어는 탬파베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홈으로 데리고 와야만 하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주자다.

저 멀리 1루 베이스 위에서 이 쪽을 바라보던 가이어가 알았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1루 견제. 카이클이 주자를 신경 씁니다. ]

[ 이제 경기 후반으로 들어가는 시점이니까요.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겠죠. 더구나 오늘의 문은 후반기의 기세를 그대로 살리고 있거든요. ]

[ 흠, 노마? 1루 주자는 어떤 플레이를 하는 게 좋을까요? ]

[ 최대한 투수를 건드려 줘야죠. 더구나 좌완 투수이기 때문에 카이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죠. 시야에 주자를 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들어옵니다. 최대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투수의 신경을 분산시켜 줘야만 합니다. ]

[ 다시 한 번 1루 견제. 그 역할을 가이어가 제대로 해 주고 있군요. ]

선수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미래를 보는 능력 따위의 것이 아니다. 그라운드 안을 강하게 사로잡는 영적인 감이라는 게 있다. 이 안에 들어와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분위기, 사고의 흐름 같은 것들. 지금 1루에 있는 저 주자가 오늘 경기를 좌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양 팀 선수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세 번 연속 주자를 견제한 카이클이 초구를 뿌렸다. 타석의 수자 주니어는 있는 힘을 다해 풀스윙을 돌렸다. 공과 꽤 차이가 많이 나는 스윙이었다. 마치 더그아웃까지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리고 그 스윙은 작전이었다. 맞으면 홈런이 될 만한 풀스윙을 보여주고 난 뒤, 2구에는 곧장.

[ 번트! 3루 쪽 선상으로 기가 막히게 구릅니다! ]

바로 직전 보여준 수자의 풀스윙은 3루수 로우리를 본능적으로 한두 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전진해 있다가 강하게 당겨친 타구가 나오면 빠져나갈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러선 그 한두 발 때문에, 1루 베이스 위에서 펼쳐진 찰나의 승부에서 수자가 웃을 수 있었다.

[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갑니다! 세이프! 수자 주니어의 기습번트가 내야안타로 연결됩니다! ]

“에반.”

1루심이 두 팔을 쫙 벌리는 순간, 지혁 옆에 앉아있던 랭카스터가 대기 타석에서 쭈그려 앉아 경기장을 노려보던 롱고리아를 불렀다.

‘설마.’

에반 롱고리아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팀의 프랜차이즈이자, 역사이자, 동양식 표현으로는 혼과 같은 존재다. 롱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타석으로 걸어나갔고, 3루 코치와 1루 코치는 정신없는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 오, 이런. 번트가 나오나요? 에반 롱고리아입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롱고리아가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

BOOO-!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자, 휴스턴의 팬들이 강한 야유를 쏟아낸다. 그들은 마치 랭카스터가 도망이라도 가는 것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탬파베이 더그아웃의 몇몇 선수들도 조금 웅성거릴 정도였다. 지혁도 내심 걱정이었다. 근 몇 년 동안 롱고리아가 번트를 대 본 기억이 있기는 할까?

카이클은 진짜로 번트를 대려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초구로 높은 볼을 뺐다. 롱고리아의 얼굴 높이까지 날아든 높은 공을 보며 침착하게 번트를 뒤로 빼는 롱고리아는, 단 한 발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전형적인 희생번트 자세인 것이다. 한 발 달려나가면서 툭 밀어대는 번트가 아닌, 완벽하게 공의 힘을 죽이기 위해 두 발 모두 땅에 디뎌넣은 자세.

휴스턴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타석만 노려보고 있는 휴스턴의 힌치 감독도, 마운드 위의 카이클도. 상상하지 못한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높은 쪽, 하지만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오는 투심 계열의 공을 던졌다. 번트를 댈 거라면 어렵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뛰어!”

카이클이 2구를 던지는 순간, 주루코치들이 일제히 외쳤고, 롱고리아는 짧게 방망이를 잡고 곧추세웠다. 그리고 테이크백이 들어가지 않은 스윙으로 높은 공을 도끼로 찍어 내리듯이 강하게 땅에다 내리꽂았다. 페이크번트&슬래시 앤드 런!

[ 작전입니다! 슬래시! 투수 옆을 빠져나가는 타구, 코레아가 다이빙을 합니다만 빠져나갑니다! 가이어 3루를 돌았습니다! 홈으로, 홈으로, 홈으로! ]

브랜든 가이어의 저돌적인 슬라이딩이 홈플레이트를 쓸고 지나간 이후에야 카를로스 고메즈의 송구가 도달했다.

“에바아아안!”

“그거야!”

더그아웃은 거의 축제의 현장이 되었다. 랭카스터도 두 손을 크게 휘두르는 세레머니를 하며 더그아웃 안을 휘젓고 다녔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더그아웃을 가리키며 세레머니를 하는 롱고리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빈약하기 그지없는 탬파베이에서 가장 많은 부담을 느껴야만 했고, 가장 좋은 결과를 내야만 했던 팀의 프랜차이즈.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작전까지 수행해가면서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했던 롱고리아는, 결국 해냈다. 댈러스 카이클로부터 뽑아낸 이 한 점은 그 어느 점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감동적인 한 점이었다.

모두가 롱고리아의 적시타의 기쁨에 취해 있던 순간에 움직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혁은 정신없이 방방 뛰는 와중에서도 그 사람의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쫓았다. 랭카스터는 전혀 아닌 척 하면서도 1루 코치에게 싸인을 보내고 있었다.

[ 노 아웃에 주자는 1루와 2루. 랭카스터 감독의 엄청난 작전이 나오면서 결국 탬파베이가 한 점을 먼저 달아나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4번, 포사이드. ]

[ 오, 이런. ]

[ 초구에 다시 기습번트! 투수가 잡지 못합니다! 1루수가 내려옵니다만 1루가 비었습니다! 1루가 비었습니다! 모든 주자 세이프! 오, 마이, 갓! 대니 랭카스터! 미친 들소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스몰볼로 이 경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

다시 한 번 더그아웃이 뒤집어졌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간 포사이드도 더그아웃을 향해 세레머니를 보내고, 탬파베이의 선수들은 환호성을 지르느라 목이 다 나가버릴 지경이 되었다.

작전에 작전, 그리고 또 작전! 수자 주니어의 기습번트와 롱고리아의 페이크번트, 그리고 다시 포사이드의 기습번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의 연속이었다.

미닛메이드 파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얼이 다 빠졌다. 심지어 탬파베이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조차도 그랬다. 오직 대니 랭카스터와 케빈 캐쉬 코치만이 작전을 기뻐하며 팔꿈치를 툭툭 맞대는 세레머니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작전의 6회’는 사이영 상 후보인 카이클의 멘탈을 뒤흔들어 버렸다. 심판이 던진 작은 돌멩이의 파동이 너무나도 커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5번, 카브레라가 노아웃 만루에서 배트에 맞춘 타구가 멀리 뻗어나가 펜스를 직격하는 순간. 지혁은 알 수 있었다. 이 경기가 오늘 여기서 끝났다는 것을.

*

8회말. 스코어는 6대1. 6회초 기회에서 5점을 뽑아 낸 이후로는 휴스턴의 페이스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지혁도 안타 두 개를 맞고 볼넷도 두 개를 주며 제법 어려운 경기를 했지만 꾸역꾸역 막아내는 중이었다.

“문. 불펜은 준비가 돼 있어.”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봐야죠. 불펜도 지쳤는데.”

랭카스터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릴 뿐 다른 말은 건네지 않았다. 9번타자 조지 스프링어부터 시작하는 9-1-2의 타순. 상위 타선으로 연결되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랭카스터는 루키인 지혁을 계속 밀고 가기로 결정했다. 스코어 차이도 여유가 있는데다가, 후반기의 지혁은 이상할 정도로 의지가 되는 투수였다.

[ 투구수 94개의 문. 8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교체 타이밍 아니었을까요? 랭카스터 감독은 밀어붙이네요. ]

[ 탬파베이는 이 한 경기를 놓치면 사실상 와일드카드를 놓친다고 봐야 하는데요. 제 생각엔 너무 위험한 선택일 것 같군요. ]

[ 6회와 7회 안타 하나와 볼넷 하나씩을 허용했던 문. 8회는 잘 넘어갈 수 있을까요? 타석엔 스프링어입니다. 이번 시즌 홈런 16개를 때려냈습니다. ]

스코어는 다섯 점 차이지만 지혁의 마음은 달랐다. 경기가 경기인만큼 한 타자 한 타자, 공 하나 공 하나가 모두 살얼음판 위다. 6회에도 목도했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경기를 토네이도 안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부우웅!

마운드까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저 스윙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초구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았는데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스프링어의 거칠고 투박한 스윙에 눈 먼 공 하나라도 맞는 날에는 까마득히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부담도 지혁을 압박한다.

‘후아. 맞으면...’

“문!”

그 때 롱고리아가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홈을 가리키면서 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맞으면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어. 저 녀석 스윙을 좀 봐. 맞고 싶어도 맞을 수가 없겠어. 안 그래?”

하. 에반. 이 미치도록 멋진 사람. 지혁은 롱고리아를 바라보며 씩 웃어 줬다. 잠깐 모자를 벗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휴스턴의 밤하늘을 한 번 바라봤다.

‘마인드는 언제나 강하게. 맞으면 어떻게 되겠다는 게 아니라, 맞지 않겠다는 생각만.’

마운드 위에서의 강한 목적의식이 희미해질 때 즈음이면 이렇게 한 번씩 꽉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오늘의 롱고리아는 그 타이밍을 귀신 같이 캐치하고는 번번이 지혁을 다독이고 있었다.

“스윙! 배터 아웃!”

2-2 카운트에서 던진 5구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며 가라앉았고 스프링어의 무지막지한 스윙을 비껴나간다. 그리고 선두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순간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여전히 구위가 살아있고, 여전히 공이 통한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알투베를 상대로는 7구 승부 끝에 3루수 땅볼을 유도해냈고, 대타 크리스 카터를 상대로는 떨어지는 커브로 헛스윙을 이끌어 냈다.

[ 스윙, 헛칩니다. 낫아웃 상황. 카살리가 공을 집어들고 1루로 뿌립니다. 문. 한 이닝을 더 버텨냈습니다. 9회로 갑니다. 와일드카드 레이스의 벼랑 끝에 서 있는 탬파베이가 루키 문의 호투에 힘입어 승리를 쟁취하기 직전입니다. ]

[ 원더풀. 루키 투수의 피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네요. ]

어우-

미닛메이드 파크에 모인 관중들이 모두 머리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을 바라보며, 지혁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저들 모두에게 지혁은 오늘, 더없이 멋진 악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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