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93화 (94/204)

< 93 - Last game. >

[ 헛스윙! 헛스윙 삼진! 96마일 짜리 패스트볼을 맞추지못하는 호세 알투베입니다. 결국! 결국 탬파베이가 두 경기를 모두 잡아냅니다! 제이크 맥기가 마운드에 주저앉네요. 다리가 풀렸나 봅니다. 하하. ]

[ 알투베가 여기서 기회를 놓치는군요. 휴스턴 입장에서는 뼈아픈 2연패입니다. 그리고 탬파베이를 포함해 미네소타, LA 에인절스에게도 희망이 생겨난 시리즈였습니다. ]

지혁이 카이클을 상대로 8이닝 1실점 승리를 거뒀고, 크리스 아처와 콜린 맥휴가 맞부딪힌 시리즈 두 번째 경기에서도 탬파베이가 기어이 승리를 쟁취했다. 첫 경기에서 6회에만 작전 세 개를 시도했던 탬파베이는 두 번째 경기에서 홈런 세 개를 쏘아올리며 전혀 다른 스타일로 시리즈를 잡아냈다.

그리고 그 결과.

2015년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레이스 순위.

1. 뉴욕 양키스 (83승 69패) - +4.0G

2. 휴스턴 애스트로스 (80승 74패) -

3. 미네소타 트윈스 (79승 74패) - -0.5G

3. 탬파베이 레이스 (79승 74패) - -0.5G

5. LA 에인절스 (78승 75패) - -1.5G

와일드카드 한 장은 양키스의 것이 사실상 확실해졌고, 나머지 한 장을 두고 세 팀이 반 게임차로 초접전을 펼치는 양상으로 들어갔다. 미네소타와 탬파베이는 휴스턴보다 한 경기를 덜 치렀기 때문에, 경기 결과 여하에 따라 동률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 경기에 모든 희노애락이 오가는 시점. 9월 말이다.

*

[ 휴스턴, 텍사스에 대역전승! 한 발 앞서 나가다. ]

[ 데이비드 프라이스, 친정팀 탬파베이에게 치명적인 비수를 꽂다. ]

[ 미네소타, 디트로이트에 진땀승. ]

[ 휴스턴, 텍사스 전 연승. 카즈미어의 깜짝 호투. ]

[ 키어마이어 만루포, 탬파베이 역전승.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 통한의 대역전패. 미네소타의 눈물. ]

...

“피 말리네, 피 말려.”

“오늘은 꼭 이겨야 하는데.”

“오늘만이 아니야. 내일도, 모레도 꼭 이겨야지.”

체임 블룸을 비롯한 모든 프런트 오피스 직원들이 하나같이 만성 피로와 두통을 호소했다. 모두들 겉으로는 “이 정도면 대만족이야.”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한 경기 한 경기의 결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팬들도,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탬파베이에 우호적인 모든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승리를 절실하게 기원하면서도, 또 패배해도 어쩔 수 없다는, 떨어져도 괜찮을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러니다.

상대적으로 나이브한 이런 관념과 희망적인 시선은 스물스물 클럽하우스로 기어들어왔다. 많은 선수들이 SNS나 블로그, 커뮤니티 글을 통해 팬들과 기자들, 프런트 직원들이 지금의 상황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켜보고 있는지 알고 있다.

선수들과 코치들은 ‘아니야, 절대로 이겨야 해’ 라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무의식의 저 편에서는 약간의 안도감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랭카스터 감독은 부쩍 예민해 보였다.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건가? 너희들! 어?”

랭카스터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롱고리아와 맥기, 두 조장들도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하고 긴장의 끈을 잡기 위해 선수들을 다독이고 다녔다. 선수들도 계속해서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지만, 깊은 곳 한 쪽에 내려앉아 있는 무의식적인 안도감은 여전히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암흑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따악!

[ 스탠튼의 빠른 타구가 투수 옆을 스치고 빠져나갑니다. 3루 주자 프라도가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옵니다. 한 점 차로 리드하게 되는 마이애미 말린스. 주자는 1루와 2루. ]

[ 문. 아쉽겠는데요. 방금 공은 실투였어요. ]

조금 지쳤다. 아니, 솔직히 많이 지쳤다.

시즌 162경기 중 157번째 경기. 바로 직전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110개에 가까운 공을 던지고 4일 휴식 후의 등판. 부상은 당하지 않겠지만 체력이 소모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즌 막바지로 오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체력적인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고, 그건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문. 오늘은 안 되겠어.”

“... 알겠습니다.”

“괜찮아. 고생했어.”

지혁은 손을 내민 힉키 코치에게 쥐고 있던 공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체력적인 한계, 심리적인 압박, 반 게임 뒤지고 있는 환경. 이런 것들이 지혁뿐 아니라 탬파베이 선수단 전체를 압박하고 있다.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는 그 무리한 환경들이 조금 안 좋게 나타나고 만 경우였다. 지혁은 5.1이닝 동안 3실점했고, 불펜으로 올라온 리펜하우저가 후속 주자마저 들여보내면서 4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

시즌 종료까지 D-5. 와일드카드 2위 휴스턴과 한 경기 차이를 유지했다.

D-4. 미네소타가 2위 자리로 올라서고 휴스턴이 한 단계 내려왔다. 탬파베이는 휴스턴과 반 경기 차이, 미네소타와는 한 경기 차이.

D-3. 다시 휴스턴이 2위 자리로 올라갔다. 미네소타와 탬파베이는 동률이 되어 반 게임 차이로 휴스턴을 쫓았다.

D-2. 휴스턴이 패했다. 미네소타도 패했다. 하지만, 탬파베이도 패했다.

D-1. 미네소타가 패배하며 자력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탬파베이는 롱고리아의 시즌 19호 홈런이 터지며 여전히 휴스턴을 반 게임 차이로 쫓고 있다.

그리고 2015시즌의 마지막 날.

휴스턴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4위 애리조나와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그리고 탬파베이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일찌감치 차지한 토론토와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문.”

매우 특별한 날이고, 매우 긴장되는 날이며, 동시에 이보다 더 중요한 날일 수 없는 시즌 최종전. 기자들의 출입이 자제된 클럽하우스에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선수들이 모두 모여 마지막 전의를 다지고 있을 때 랭카스터 감독이 지혁을 찾아왔다.

“감독님. 말씀하세요.”

“후우.”

“감독님답지 않으신데요. 긴장하셨나요?”

“인정하지. 잠깐 좀 걷겠나?”

“안 될 것 없죠.”

두 사람은 라커룸의 긴 복도를 지나 더그아웃으로 올라섰다. 아직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트로피카나 필드에는 가끔씩 장비를 체크하는 스태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돔 구장이다 보니 다른 구장에서는 들을 수 있는 벌레 울음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것도 들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보온을 위해 돌아가고 있는 히터 소리만 아주 미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지혁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랭카스터는 한참을 더그아웃에 기대 야구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즌 내내 목소리를 높이고 몸을 흔들며 선수들을 독려해 오던 들소조차도 이런 상황에서는 강한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긴 콧김을 내뿜으며 한숨을 쉬는 랭카스터에게 약간의 연민이 치고 올라오기도 했다.

“한 시즌 동안 수고가 많았어.”

“수고라고까지 할 게 있을까요. 오히려 감사드려야죠. 루키 투수가 200이닝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하던걸요. 기자들은.”

“기자들의 말 같은 건 잊어버려.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니까.”

“하하. 감독님이 기자 싫어하시는 건 정말 알아줘야죠.”

“뭐, 내가 듣기론 자네도 만만치 않다던걸.”

“네, 뭐. 저도 좋아하는 편은 아니긴 하죠.”

픽. 랭카스터가 헛웃음을 흘렸다.

“신기한 녀석이야, 넌.”

“그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전 감독님이신 매든 감독님도 그러셨었죠.”

“그렇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겠지. 감독은 말이야.”

랭카스터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려는 것 같았다.

“가장 우뚝 서 있는 존재여야 해. 팀에서는.”

“...”

“가장 우뚝 서 있어야만 온갖 돌을 다 맞을 수 있지. 누군가가 팀을 비판한다면 그 화살을 맞는 건 감독이어야 해. 그리고 그 비판들을 헤치고 나아가야 할 길을 잡아야 하지. 그러니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해. 가장 높은 곳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키를 잡는 거야.”

랭카스터는 허리를 굽혀 야구공 하나를 주워들고는 허공에 몇 번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대가로 많은 것을 혼자 감내해야 하지.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고, 누군가를 대신 올려 세울 수도 없어.”

“음.”

“다른 놈들이 나를 들소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인간이 아닌 건 아니야. 나도 가끔은 의지할 수 있고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그리고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마운드에 세울 때 이상하게 자꾸 그런 의지가 되는 감정을 느꼈어.”

랭카스터의 진지한 말에 지혁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평소의 랭카스터는 그를 다른 루키 선수들과 다르지 않은 선수로 대해왔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말은 조금 의아스러웠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운드가 익숙해 보이더군. 따로 언급하거나 잡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해야 할 생각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고. 가끔씩 흔들리더라도 회복하는 속도도 빠르고. 솔직히 말하면 베테랑 선수에게서나 느낄 법한 것들이었지.”

랭카스터가 위로 던진 공을 받아내지 않았다. 공이 땅에 떨어져 데구루루 구른다.

“그리고 오늘도 자네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어.”

“네.”

“아처를 내세울 수도 있었어. 4일 휴식이었지만, 그래도 아처니까. 제일 중요한 경기에서 에이스를 써야 하니까. 기자들이 아마 악착같이 들러붙을 거야. 왜 오늘의 선발이 너냐고. 왜 루키냐고. 대체 왜. 하하하. 징그러운 새끼들.”

랭카스터는 한참을 웃다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압박이 강한 상황에서 아처보다 네가 더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야. 물론 대외적으로는 아처를 와일드카드 경기에서 쓰기 위함이라고 말할 거고. 그게 아처에 대한, 우리 팀 에이스에 대한 예의니까.”

“이해합니다.”

“오늘 경기에서도 내게 믿음을 주게.”

왜인지 코끝이 찡해져 왔다. 시즌 초반 벤치 클리어링 때 무섭게 질주하던 미친 들소는 마치 어질고 어진 황소처럼 보였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히며 한국식으로 인사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야, 그건.”

“한국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훗.”

랭카스터는 몸을 돌려 더그아웃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지혁은 한참을 허리를 굽힌 자세로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온갖 비판을 감수하며 한 시즌 동안 버텨 온 랭카스터에게.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돌팔매를 맞을 것을 감수하며 지혁을 선택한 그에게. 아마 이 경기는 그에게 바쳐야 할 것 같았다.

*

[ 2015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162경기를 치르는 6개월 간의 대장정을 드디어 마감하게 된 날입니다.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릅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경기.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전해드리겠습니다. ]

화면에는 곧장 두 팀의 선발 라인업이 떠올랐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선발 라인업.

1. 벤 르비어 LF - .306

2. 조쉬 도날드슨 3B - .297

3. 호세 바티스타 RF - .267

4. 에드윈 엔카나시온 1B - .277

5. 크리스 콜라벨로 DH - .321

6. 러셀 마틴 C - .245

7. 트로이 툴로위츠키 SS - .280

8. 케빈 필라 CF - .278

9. 라이언 고인스 2B - .250

P. 마크 벌리 (15-7, 3.81)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라인업.

1. 브랜든 가이어 LF - .266

2. 마이키 마툭 RF - .296

3. 에반 롱고리아 3B - .270

4. 아스드루발 카브레라 SS - .266

5. 제임스 로니 1B - .280

6. 팀 베컴 2B - .222

7. 조이 버틀러 DH - .276

8. 커트 카살리 C - .228

9. 케빈 키어마이어 CF - .245 P. 문지혁 (14-8, 2.79)

[ 자! 탬파베이 레이스는 아직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유일한 가능성을 남겨 놓은 팀입니다. 오늘 애리조나 체이스필드에서 열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경기에서 휴스턴이 패배하고, 이곳에서 열릴 경기에서 탬파베이 레이스가 승리한다면. 시즌 마지막 날 와일드카드에 진출할 팀이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

[ 휴스턴은 댈러스 카이클이 아닌 랜스 맥컬러스를 선발투수로 선택했더군요. 오늘 탬파베이도 크리스 아처가 아닌 문을 선발로 낙점했죠. ]

[ 양 팀 감독들이 배짱 싸움을 하고 있다고 봐도 될까요? ]

[ 그렇습니다. 팀 내 최고 에이스들의 로테이션을 무리해서 조정하지 않고, 와일드카드전에서 쓰겠다는 의지라고 봐야 합니다. ]

[ 오늘 선발로 나설 문은 이번 시즌 실질적인 2선발로 풀타임을 활약했습니다. 루키가 말이죠! 아주 강력한 루키 오브 더 이어 후보입니다. 시즌 14승 8패, 평균자책점은 무려 2.79입니다. ]

[ 대단한 투수입니다. 하지만 루키 오브 더 이어를 확신할 수는 없어요. 휴스턴의 코레아도 대단하고, 클리블랜드의 멘데스와 린도어도 무시할 수 없는 성적입니다. ]

[ 그렇습니다. 자, 문이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혁은 마운드 위에 올라서기 전에 잠깐 눈을 감고 전생을 떠올렸다.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오늘만큼 중요한 경기는 지혁의 인생에 없었다. 팀의 운명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마운드에 올라가야 하는 경기였다.

“후우우우.”

깊은 한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목을 한 바퀴 돌리며 눈을 떴다. 트로피카나 필드의 광활한 외야와 전광판이 눈에 들어오고, 시야가 빙글빙글 돈다.

“으아아아아자자자!”

마운드에 올라가기 전부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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