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 Fury. >
트로피카나 필드에 꽤 많은 관중이 모였다. 개막전을 비롯해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나 만원 관중이 들어찼던 경기장인데. 오늘은 빈자리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 그만큼 탬파베이에게는 중요한 경기였다. 플레이 볼이 선언되고, 지혁이 초구를 던지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자. 신중해야 돼.’
마운드 위에서 끊임없이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있는 지혁도 마찬가지다.
토론토는 이번 시즌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눈이 돌아간 팀이고, 돈을 펑펑 써댔다. 시즌 개막 전 MVP급 3루수인 조쉬 도날드슨을 데려왔고, 시즌 중에는 FA까지 6개월밖에 남지 않은 데이비드 프라이스를, 그리고 산동네에서 내려온 로키스의 영웅 트로이 툴로위츠키를 데려왔다. 그리고 호화로운 멤버들 덕에 당연하게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토론토를 상대해야 하는 투수들에게는 지옥 같은 느낌을 줬지만 말이다. 특히 좌완 투수에게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곤 했다. 가끔 툴로위츠키가 상위 타선에 배치되어 나올 때가 있었다. 우타자인 툴로위츠키-바티스타-엔카나시온-콜라벨로-마틴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누군가 말하기를 ‘투수가 숨도 쉴 수 없는’ 타선이란다.
좋은 일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토론토의 대형 트레이드가 있은 뒤에 한 번도 녀석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로테이션이 교묘하게 지혁을 피해가곤 했다. 랭카스터가 좌완인 지혁을 배려해서 한 번쯤 넘겨준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오늘 경기는 무조건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했다. 뒤가 없는 벼랑 끝에서의 마지막 경기인데 질 수는 없으니, 평소보다 더욱 신중하게.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선두타자 르비어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바깥쪽 존에 걸치다가 마지막에 살짝 빠진 싱커. 지혁이 보기에도 조금 빠졌는데 고맙게도 심판이 스트라이크 콜을 외쳐 준다. 르비어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심판을 한 번 바라보더니 그냥 돌아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2번, 도날드슨. 이번 시즌 이미 41홈런과 123타점을 기록하고 있는 괴물. 그런데 그런 도날드슨이 몸쪽 떨어지는 커브에 이상한 스윙을 돌렸다. 또 다시 삼진. 타이밍이 맞지 않았는데 어정쩡하게 따라가려는 듯한 스윙이었다. 맞추는 데 급급했던 스윙. 전혀 도날드슨답지 않은 자세였다.
‘뭐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3번 바티스타가 어처구니없는 큰 스윙으로 바깥쪽 공을 억지로 잡아당겨서는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다.
“뭐, 그렇게 나오시겠다면 땡큐지.”
“나이스 피칭...? 문? 화났어? 삼진 두 개랑 그라운드볼 하나 만들어 놓고 왜 화가 나? 어디 문제 있나? 부상인가?”
“아닙니다, 코치님. 화난 거 아니예요. 하하.”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아.”
지혁은 잠깐 굳혔던 표정을 풀고는 웃었다.
“쟤네들 오늘, 대충할 건가 봐요.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자고 싶은가 보네요.”
“뭐?”
“대충 경기하고 빨리 끝낼 생각인가 봅니다. 지들은 우승 했다 이거죠.”
*
토론토의 선수들에게서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경기. 홈에서 치르는 경기도 아니고 원정 경기. 캐나다의 홈 팬들이 보는 앞도 아니겠다, 이미 우승도 확정지은 지 오래겠다, 괜히 무리해서 경기를 뛰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포스트시즌에서 뛸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냥 대충 한 경기를 마무리하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경기의 목표가 다르다. 선수들의 의지도 다르다. 1회말 탬파베이의 2번 타자 마이키 마툭이 토론토의 투수 마크 벌리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때려낸 이후의 분위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트로피카나 필드 전체가 뒤집어지고 난리가 났다. 모든 사람들이 방방 뛰고, 마툭은 루키인 주제에 홈플레이트를 밟고 나서 세레머니까지 크게 할 정도였다.
오로지 3루 쪽 토론토의 더그아웃만이 평온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홈런을 맞건 세레머니를 하건 상관없으니까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는 분위기다. 자기들끼리 농담 따먹기라도 하는 듯 난간에서 낄낄대는 녀석들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화도 조금 났다. 전력으로 부딪혀주지 않는 상대에게.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이 우선할 때가 아니라고 애써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서 상대가 저렇게 나와 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니까. 분하기도 하고 또 안심이 되기도 하는 두 가지 감정이 반쯤 섞여 흘러다닌다.
[ 루킹 삼진! 엔카나시온이 몸쪽 패스트볼을 그냥 지켜봅니다. ]
[ 초구를 때리는 크리스 콜라벨로. 빗맞은 타구입니다. 키어마이어가 거의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잡아내네요. 투 아웃. ]
[ 러셀 마틴의 타구가 3루수 정면으로 갑니다. 롱고리아가 1루로. 쓰리 아웃.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는 탬파베이. ]
1회말 공격에서 투런 홈런을 포함해서 3득점을 뽑아준 타선 덕분에 조금 오래 쉬었던 지혁은 2회 투구에서도 명확하게 체감했다. 토론토의 타자들은 의지가 없다. 그리고 의지가 없는 타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만큼 쉬운 투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가뿐하게 투구를 마치고 내려온 지혁은 분한 감정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머리를 털어댔다. 이기는 게 전부니까.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오직 그뿐이다.
*
2회말. 토론토의 마크 벌리가 두 타자를 상대하고 난 이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토론토의 존 기본스 감독이 마운드를 방문했다.
“뭐야? 왜?”
“부상인가?”
탬파베이의 선수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니야. 이건... 오, shit. FUCK!”
“감독님?”
“저 개새끼가. 저 개새끼들이 감히!”
랭카스터가 갑자기 라커룸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 탬파베이의 더그아웃이 고요해지며 전부 랭카스터 감독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뭐야. 무슨 일인데 감독님이 갑자기 저래?”
“나도 모르지.”
몇몇 선수들이 속닥거리는 사이 벌리가 공을 넘겨주고는 마운드를 내려가고 있었다. 토론토의 선수단과 클러비는 마치 도열해서 영웅을 맞아주듯이 더그아웃 난간을 넘어 나와 벌리를 맞이한다. 1.2이닝 동안 3실점 한 투수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성적이라고...?
“역대 최초래요. 15년 연속 200이닝, 15년 연속 두 자리 수 승리.”
“뭐?”
“그, 벌리한테 걸려 있는 기록이요. 그리고 아마 방금... 그 기록을 달성했나 보네요.”
클러비 한 명이 자신이 읽었던 기사를 떠올려낸 듯 얘기했다.
“아. 기록 챙겨주기였다?”
“근데 그건 뭐 그럴 수 있잖아. 기록을 챙겨줄 수는 있지.”
“그런데 감독님이 왜 저렇게 화나신 건데?”
- 투수 교체를 알려드립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릴리버. 호세 알칸타라.
- 선수 교체를 알려드립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캐처. 조쉬 톨리.
- 선수 교체를 알려드립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써드 베이스맨. 가와사키 무네노리.
연이어 울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싸하게 느껴졌다. 호세 알칸타라는 누군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투수고, 조쉬 톨리는 한 해에도 지명할당을 서너 번 당하는 백업 포수. 그리고 가와사키 무네노리라는 공수주 모두에서 효용 가치가 없는 내야 유틸리티 선수.
“쟤 누군지 아는 사람?”
마운드에 올라오고 있는 알칸타라를 가리키며 롱고리아가 물었다.
“어... 저요.”
“좋아. 루크? 저 비린내 나는 애송이 녀석은 대체 누구지?”
포수 장비를 차고 있던 메일리가 한 쪽에서 손을 들었다. 말하기가 조금 꺼려지는 듯했다.
“쟤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스무 살이고, 재작년에 싱글 A, 작년에는 하이 싱글 A. 그리고 올해 마지막에 더블 A에 올라왔었어요. 그냥 마이너리그에서... 조금 잘 던지는 투수죠.”
“그런데 저 놈이 왜 여기에 올라왔지? 아는 사람?”
롱고리아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목소리에 노기가 어려 있다. 그리고 한 번 찬찬히 생각을 해 보니... 머릿속에 잡히는 게 있다. 그러니까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지금, 단순히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쇼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Holy shit.”
지혁도 본능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져주기.
토론토는 져주기를 할 작정이다. 토론토는 양키스와의 상대 전적이 좋지 않은데 비해 탬파베이와의 상대 전적은 매우 좋은 편이다. 특히 그들은 우완 투수인 다나카와 피네다가 에이스인 양키스보다 좌완 투수인 지혁과 스마일리가 섞여 있는 탬파베이를 선호한다.
시즌 마지막 경기라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기에서 이제 막 더블 A에 자리잡았던 새파란 마이너리거를 올린다는 것. 팀의 핵심 선수들을 전부 교체했다는 것. 이것들이 의미하는 건 뻔했다. 오늘 탬파베이에게 대충 져 주고, 와일드카드 매치에 탬파베이를 올려보내서 탬파베이가 양키스를 꺾고 올라오길 바라는 것이다.
“너희들.”
랭카스터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묻어나왔다.
“저 새끼들, 가만 두지 마.”
*
[ 메이저리그 데뷔입니다. 호세 알칸타라.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더블 A 팀인 뉴햄프셔 피셔 캣츠에서 2승 4패, 평균자책점 4.12였다고 하는군요. 올 해 스무살입니다. ]
[ 국제 드래프트 출신입니다. 팀 내 유망주 랭킹에서 14위인 선수네요. 패스트볼이 90마일에서 92마일 사이에서 형성되지만 제구력이 좋고, 슬라이더가 날카롭다... 는 보고서가 있네요. ]
[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등판이었어요. 40인 로스터에도 시즌 말미에 등록되었다고 하는군요. 음. 아마 루키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는 의도 아닐까요? ]
캐스터와 해설자도 당황했다. 이 경기를 본 누구라도 고의로 패배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니까. 벌써부터 인터넷은 난리가 났을 것이다. 뒤집어져도 한참 뒤집어졌을 터다.
그리고 당황한 건 마운드에 올라온 알칸타라도 마찬가지였다. 심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선두타자 마이키 마툭을 상대로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했다.
“우습게 보였다, 이거지. 우리를 고르고 싶다고...”
타석에 들어선 롱고리아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볼 두 개를 지켜보고는, 카운트를 잡으러 한복판에 들어온 패스트볼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좌측 폴대를 라인드라이브로 맞춰 버리는 투런 홈런을 기록했다.
“그냥은 안 보낸다. 너희들.”
롱고리아는 홈으로 돌아온 그 순간 마스크를 쓰고 있는 토론토의 포수에게 으르렁거렸다. 홈런을 치고 나서도 잔뜩 화가 난 표정의 탬파베이 선수들의 모습은, 아마 야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한 장면일 것이 분명했다.
*
“문.”
“네?”
“짓밟아야 돼. 지금 짓밟지 않으면 다음에도 계속 우습게 보일 테니.”
“알고 있습니다.”
“백업으로 교체된 새끼들은 신경쓸 것도 없어. 바티스타. 엔카나시온. 툴로위츠키. 콜라벨로. 이 새끼들은 확실히 잡아. 확실히 죽여. 알겠어?”
“네.”
1회말에 3점, 2회말에 2점의 리드를 얻었다. 아마 이 경기를 질 일은 없을 것이다. 토론토의 선수들은 의욕도 없고, 이기려는 생각도 없다. 오히려 질 생각을 하고 있지. 다시 말해서, 와일드카드에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탬파베이가 아니라 휴스턴이 결정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냥 이기는 것에 만족하자니, 고의로 지려는 녀석들에게 그 정도로는 복수가 안 되는 느낌이다. 이건 단순히 날름 승리를 받아먹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선택을 했다고. 우리를. 씨바, 파티에 같이 갈 파트너 구하는 것도 아니고. 늬들이 우릴 선택을 했다고.”
마운드에 올라 선 지혁은 그 어느 때보다 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이성적인 상태에서 투구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타석에 들어서는 한 녀석 한 녀석이 전부 탬파베이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윙! 배터 아웃.”
툴로위츠키가 바깥쪽 빠져나가는 싱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체크 스윙 삼진을 당했다. 하지만 아쉬운 기색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짜증이 치솟았다. 져주기를 한다는 게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누구의 지시였는지는 모르겠다. 알 게 뭐야.
확실한 건, 그냥 이기는 걸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랭카스터의 말이 맞다. 완전히 짓눌러야 한다.
8번 케빈 필라는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9번 라이언 고인스는 2루수 앞 땅볼로.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더러웠다. 아마 오늘 경기는 이겨도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