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95화 (96/204)

< 95 - 아름다운 마무리. >

4회초.

“으악!”

지혁의 손끝에서 떠난 공이 바티스타의 종아리 쪽을 정확하게 맞혔다. 바티스타는 방망이를 놓아버리고 껑충껑충 뛰더니 자리에 드러누워 한참 동안 시간을 끌었다. 토론토의 더그아웃 쪽이 웅성거렸다. 고의가 아니냐는 반응일 것이다. 기본스 감독이 심판에게 간단히 몇 마디의 항의를 하는 동안, 트로피카나 필드의 관중들이 야유를 뿜어댄다.

“지랄은. 하나도 안 아프면서.”

“저거 일부러 종아리 들이댔으면서 괜히 시간 끄는 거예요.”

“나도 알아. 그래도 잘 했어. 연기라곤 하지만 아파하는 걸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롱고리아가 마운드로 올라와서 지혁 옆에 섰다. 글러브를 벗고 팔짱을 낀 롱고리아는 어설픈 농담을 건넸다. 그도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래도 팀에서는 제일 냉정한 축에 들어간다.

“일부러 던졌어?”

“네? 아뇨. 슬라이더였는데 손에서 빠졌어요.”

롱고리아는 그제야 표정을 좀 풀고 의뭉스럽게 웃었다.

“흐흐. 그러니까 슬라이더를 일부러 던졌냐고.”

“아.”

“싸인 여러 번 거부하는 거 다 봤어.”

“네, 뭐. 슬라이더를 던지고 싶긴 하더라고요.”

“투 아웃이고, 주자 없고. 우타자 몸쪽으로 던질 수 있는 변화구는 슬라이더밖에 없으니까. 아주 잘했어. 슬라이더는 완벽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하하.”

맞춰야겠다고 던진 건 아니다. 하지만 몸쪽으로 깊숙이 붙이는 공 하나 정도는 던져 줄 타이밍이었고,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보다는 변화하는 공을 던지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 공이 우타자의 몸쪽으로 더 파고드는 슬라이더였던 것은, 뭐. 오늘 경기에서 슬라이더를 하나도 던지지 않았으니 타이밍을 빼앗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할까. 말이야 만들기 나름이니까.

딱!

다음 타자 엔카나시온이 떨어지는 볼을 강하게 당겨 때렸다. 하지만 3루 베이스에 딱 붙어서 라인 선상을 지키고 있던 롱고리아는 백핸드로 가볍게 낚아챘고, 가벼운 송구로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음. 완벽해.

*

[ 조이 버틀러가 밀어 때린 타구가 우중간을 갈라놓습니다. 2루에 있던 롱고리아가 3루를 돌아 홈으로. 투 아웃 이후에 다시 한 점을 추가하는 탬파베이 레이스. 5회말에도 한 점을 추가합니다. 스코어는 11대0이 됩니다. ]

두 자리 수 점수대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탬파베이와 랭카스터의 분노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토론토가 디비전시리즈 파트너로 탬파베이를 원한다는 뉘앙스를 비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 오? 이런. 주자가 뛰는군요. 톨리, 캐칭에 실패했습니다. 2루로 들어가는 조이 버틀러. ]

[ 허허. 참 보기 드문 장면이 나오는군요. 5회긴 하지만 11점 차이에 도루라... ]

[ 곧바로 기본스 감독을 비춰 주는군요. 화가 좀 날 것 같은데요? ]

[ 심상치 않군요. ]

경기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겠다는 목적이 없었던 토론토. 반면 반드시 이겨야만 했던 탬파베이.

조금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경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론토의 의도는 노골적이었고, 탬파베이는 화가 났다.

지혁은 바티스타를 맞추었고, 버틀러는 11대0이라는 스코어에서도 도루를 감행했다. 그리고 다음 타자 카살리는 적시타를 때려내고 배트 플립을 시전했다. 이건 괘씸한데다가 악의적인 도발을 한 토론토에게 가하는 일종의 응징이기도 했지만, 토론토를 자극시키는 일인 것도 분명했다.

결국 6회말. 토론토의 네 번째 투수인 애런 루프가 오늘 홈런을 때리며 4타점 경기를 하던 마이키 마툭의 등판에 의도적인 공을 꽂아 넣으며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면 언제나 그렇듯 랭카스터 감독이 제일 앞장서서 뛰쳐나갔고, 거대한 덩치의 랭카스터와 바티스타, 엔카나시온이 으르렁거리며 모자와 모자를 맞대는 풍경이 지속되기도 했다.

“후. 오늘은 참 다이나믹한 날이네요.”

불펜에서 준비를 해야 하는 몇몇 투수들과 함께 멀찌감치 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지혁이 말했다.

“그러게. 이상한 날이야.”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원.”

“어쨌든 중요한 건 오늘 경기를 이기는 거지. 저 녀석들한테 큰 똥을 쳐 먹이면서 말이야.”

“그렇죠.”

지혁은 전광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기가 시작한 지 두 시간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는 하얀 옷과 파란 옷을 입은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던 그 시점. 전광판의 전자시계가 정확히 9시를 가리켰고, 그건 애리조나에서 경기가 시작된다는 걸 의미했다.

Warm up이라고 표시되어 있던 휴스턴과 애리조나의 스코어보드가 TOP 1(1회초)라는 글자로 바뀌었다.

애리조나에서 운명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정신없는 경기입니다. 6회말. 72구의 공을 던진 문이 여전히 탬파베이의 마운드를 지키고 있습니다. 5이닝 동안 안타는 허용하지 않았고 볼넷 하나, 몸에 맞는 공 하나를 내줬습니다. 스코어는 12대0.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탬파베이에게는 안정적인 차이입니다. ]

[ 이제 와일드카드를 차지하기 위해서 휴스턴이 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죠. ]

[ 정확합니다, 크리스. 마침 애리조나 디백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경기도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는 틈틈이 체이스필드에서 벌어지는 그 경기의 현황도 알려드리도록 하죠. 자. 타석에는 토론토의 9번, 라이언 고인스가 들어섭니다. ]

한 번 어수선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난 뒤여서 그런지 양 팀 모두 선수들의 집중력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라이언 고인스를 상대로 순식간에 스트라이크 두 개를 잡아낸 뒤 던진 3구. 원바운드로 크게 떨어지는 커브에 고인스가 헛쳤다. 하지만 카살리도 원바운드된 공에 포구를 실패해 버렸다. 카살리가 뒤로 빠트린 공을 찾아가는 상황, 고인스는 낫아웃 삼진을 당하면서도 1루로 출루하는 데 성공했다.

“쏘리. 문.”

“괜찮아. 집중해.”

고인스가 느린 주자는 아니다. 신경이 아예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오늘 경기는 토론토 타자들이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경기다. 탬파베이 타자들이 여러 차례 도발하고 벤치 클리어링까지 일어난 이후에는 스윙이 평소처럼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붙어 있는 지혁의 투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왔어도 적응할까 말까 했을 녀석들이.’

괘씸한 선택을 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원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르비어의 몸쪽을 파고든 싱커. 르비어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짧은 스윙의 안쪽에 맞은 공이 방망이를 부러뜨려 버렸다. 두 동강이 난 방망이 사이를 헤치고 튀어나온 공은 유격수 카브레라의 정면에 딱 맞게 떨어졌고.

[ 6-4-3. 더블플레이. 오늘의 문에게서는 엄청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주자를 두고 피칭을 하는데도 전혀 다르지 않군요. ]

[ 자신이 왜 루키 오브 더 이어의 강력한 후보군에 뽑히고 있는지를 마지막 경기에서도 잘 보여주네요. 싱커와 커브를 필요한 순간 필요한 위치에 잘 집어넣고 있습니다. ]

[ 순식간에 투 아웃. 타석엔 가와사키. ]

전혀 두렵지 않은 타자가 타석에 있으니 지혁의 피칭에도 자신감이 붙는다. 초구 바깥쪽 패스트볼을 낮은 위치에 꽂아 넣었다. 초구를 맥없이 지켜봤으니 2구째는 어떻게든 스윙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럴 땐 커브로 눈을 속이면 된다. 높게 솟아나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존 높은 곳에 걸치게 떨어지는 커브. 애매한 타이밍에 어설픈 스윙이 나왔지만 그런 맥 없는 스윙으로는 공에 맞추지도 못한다.

- 워후! 예에에쓰!

“어? 삼진인가?”

분명히 투 스트라이크인데 순간적으로 관중석에서 큰 환호가 쏟아졌다. 심판도 조금 당황한 것처럼 카운트가 어긋난 건 아닌지 뒤를 돌아봤다. 지혁도 전광판을 돌아보았다.

“오케이!”

환호가 쏟아져나온 이유는 지혁의 투구 때문이 아니었다. 애리조나에서 날아든 소식 때문이었다. 1회말, 애리조나가 1대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스윙! 배터 아웃!”

그리고 가와사키는 3구째 높은 패스트볼에 따라붙지 못했다. 6이닝, 2사사구 0피안타 무실점. 게다가 애리조나도 휴스턴을 이기고 있고.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

[ 우익수 쪽에 높이 떴습니다. 멀리 뻗지 못하는 공. 마이키 마툭이 잡아냅니다. ]

[ 때립니다만, 수비 시프트에 걸리는군요. 2루수 베컴이 베이스 위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투수 옆을 강하게 스치는 타구였지만 내야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엔카나시온도 물러나며 투 아웃. ]

[ 잡아당깁니다! 좌측에 잘 맞은 타구. 그러나 뻗지를 못하는군요. 펜스 바로 앞에서 잡아내는 브랜든 가이어. 토론토의 3-4-5번 타순을 상대로 깔끔하게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내는 문. 7이닝을 막아내는 동안 안타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

...

[ 루킹 삼진! 톨리는 방망이를 내 보지도 못했습니다. 완벽한 위치에 제구된 싱커였습니다. ]

[ 센터 쪽 깊은 타구! 그러나 힘이... 모자랍니다. 키어마이어가 자리를 잡고 기다립니다. 잡아냅니다. 투 아웃. 툴로위츠키도 돌아섭니다. ]

[ 풀 카운트 승부. 열 번째 공. 헛스윙 삼진! 떨어지는 커브에 결국 당했습니다. 8이닝동안 안타를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엄청난 투구입니다, 지! 혁! 문! ]

*

8회초를 마무리 한 상황. 스코어는 13대0.

탬파베이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경사가 겹친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8회말 아스드루발 카브레라의 자리에 대타로 들어선 형진은 깜짝 홈런을 터뜨렸다. 한가운데 높은 공을 잡아당긴 타구가 좌측 가장 낮은 펜스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축하한다.”

“... 땡큐.”

빅리그 첫 홈런을 때려낸 형진은 분명히 엄청나게 흥분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혁이 내민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지 않고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노히터를 할지도 모르는 투수인데 손을 세게 마주쳤다가 혹시라도 잘못 될까봐서. 형진의 뒤를 따라 계속 머리를 치며 따라오던 녀석들도 마치 지혁이 그 자리에 없는 투수인 것처럼 무시했다.

‘오랜만이네. 이거.’

1년 전에 더램에서 퍼펙트게임을 만들어냈을 때도 이랬었지.

새삼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는 무려 퍼펙트게임이었고, 모든 인생을 통틀어 처음 맞이하는 상황이어서 그랬는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었다. 손가락을 가만히 둘 수 없었고, 다리도 정신없이 달달 떨렸다. 그리고 그 때의 지혁은 아마 스스로 떨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물론 그때만큼, 어쩌면 그때보다 더 떨린다. 마이너리그에서의 기록과 메이저리그에서의 기록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팀의 상황. 상대 타자들의 분위기. 그리고 와일드카드 행을 결정지어야 할 휴스턴과 애리조나의 경기 진행까지도.

시야가 깔끔하고 머리도 팽팽 돌아간다. 결리는 곳도 하나 없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가 할 때의 느낌도 생생하다. 손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야구공의 실밥도 아주 까끌까끌 한 게 때리는 느낌도 살아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이뤄낼 수 있는 모든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퍼펙트게임을 처음 달성했을 때 정신없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기도 벅찼던 그 느낌이 이제는 없다.

“문.”

9회초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려던 지혁에게 랭카스터가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그 랭카스터조차도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네게 의지가 되는 피칭을 해 달라고 부탁했었고, 넌 의지가 되는 피칭을 해 줬다. 경기 중에는 저 녀석들을 짓밟으라고 했더니, 완전히 짓밟아 줬고.”

“그렇게 됐네요.”

“넌 내가 얘기한대로 이뤄주는 녀석이니까. 절대로 부담 갖지 말고...”

“아. 전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만들어 내.”

“Roger that(알겠습니다). 명령대로.”

일부러 밀리터리 영화에서 주워들은 군인들의 말을 따라한 지혁은 힘차게 뛰어 마운드로 올라갔다.

“마지막 이닝.”

모자를 한 번 고쳐 쓰고, 로진을 손에 잔뜩 묻히고,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2015년 시즌을 풀타임으로 치렀고, 선발 로테이션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고, 그걸 넘어서 2~3선발 급의 성적을 올렸다.

대단한 시즌이었다. 신이 찾아오고 난 후에 천지가 뒤바뀌었고, 지혁은 완전히 다른 투수가 되었다. 풀타임 첫 시즌의 마지막 경기, 마지막 이닝. 그리고 노히터를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이닝이기도 한 9회다.

- 문! 문! 문! 문!

관중들이 마운드에 선 지혁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마치 웅장한 연극 무대에서 혼자 핀 조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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