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 축제의 날. >
초구. 바깥쪽으로 넉넉히 하나 빼 본 공. 꼼짝도 않고 기다리고 있는 고인스는 최대한 공을 오래 볼 작정인 것 같다. 전광판을 돌아보니 90마일이 찍혔다. 체력은 꽤 떨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날카로운 맛은 살아있다. 실밥을 때리는 힘으로 알 수 있다.
2구. 바깥쪽 빠지던 지점에서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백도어 슬라이더. 카살리는 새로운 공을 한 번 던져줌으로써 고인스의 혼란을 유발하려 했다. 그리고 타이밍을 완전히 놓친 고인스는 마지막에 존 안으로 말려들어오는 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 스트라이크 원 볼.
3구. 106구 째. 1회의 날카로운 움직임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싱커가 바깥쪽 존을 통과해서 멀어졌다. 고인스의 배트가 뒤늦게 공을 건드렸지만 힘없이 뒤로 구른다. 파울.
“치라고 줘도 돼!”
유격수 자리에 있는 형진이 글러브를 팡팡 두드리며 외쳤다.
그래. 퍼펙트게임 때도 그랬지.
굳이 형진뿐만 아니라 롱고리아도, 그리고 대수비로 들어온 포사이드도. 어려운 타구가 가도 처리해 줄 수 있는 수비수들이다. 외야로 나가면 더더욱 그렇다. 수비 괴물인 키어마이어가 외야의 2/3 정도는 커버해 줄 거다.
[ 4구. 고인스가 당깁니다만 빗맞습니다. 롱고리아가 전진하면서 잘라냈습니다. 1루로! 아웃됩니다. 이제 노히터까지 아웃카운트는 단 두 개 남았습니다. ]
[ 환상적인 최종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이네요. ]
[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경기에서 노히터가 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탬파베이에게는 정말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
[ 이 소식도 더해져야겠죠. 하하. ]
[ 그렇습니다, 크리스. 지금 애리조나의 체이스필드에서 5회말이 막 끝났습니다. 스코어는 4대1. 애리조나가 앞서 있습니다. 이 말은,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와일드카드 티켓은 탬파베이에게 돌아간다는 소리입니다. 정말 엄청난 밤이 될지도 모릅니다.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니, 순조롭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느낌이었다.
[ 르비어에게 던지는 초구. 몸쪽에 꽂힙니다. 스트라이크. ]
[ 심판도 도와주나요? 하하. 조금 깊었는데 잡아줬군요. 마지막에 싱커가 살짝 빨려 들어왔는데 카살리의 프레이밍이 예술적이었습니다. ]
[ 피치 박스에도 그렇게 나오는군요. 한 개는 빠졌는데 저 공을 환상적으로 잡았습니다.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나가는 문. ]
아마 심판이 빨리 기록을 세워 주고 집에 가고 싶은 모양이다. 초구는 지혁이 볼 때도 빠진 공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콜이 울렸으니까. 그리고 이 유리한 카운트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기습적인 바깥쪽 높은 공 패스트볼. 르비어는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코스로 향한 공을 그대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88마일 짜리의 허술한 공이었는데도.
‘마운드 위에서 타자 생각까지 읽히는 거 보니까, 오늘은 날이네.’
7회와 8회 세 타자로 토론토의 선수들을 처리할 때부터 타자들의 생각이 손에 잡히는 듯이 읽히고 있었다. 어수선했던 경기 중반을 넘기면서 다시 집중력을 찾아온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는 뭘 해도 된다.
틱.
투 스트라이크 이후 패스트볼과 싱커를 준비하고 있던 르비어는 커브에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한 타이밍 죽여서 공을 걷어내보려는 스윙이 나왔지만 그런 스윙으로는 내야도 넘기기 힘들다. 힘없이 뜬 플라이를 2루수 포사이드가 내려오며 여유 있게 잡아냈다.
“라스트 한 개.”
이미 기대감이 잔뜩 어린 관중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울리고 있다. 토론토 녀석들은 이 경기에서 오만함을 부린 대가를 단단히 치르고 있다. 대충 하면서 경기를 져 주고, 탬파베이가 디비전시리즈에 진출하기를 바랐던 녀석들이지만 노히터를 허용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겠지.
“그러게 왜 까부냐. 까불기는.”
3루 쪽 토론토의 더그아웃을 흘깃 돌아본 지혁은 그 똥 씹은 표정들을 즐겼다. 그 표정들을 보니,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노히터를 허용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마 똥물로 샤워를 하고 있는 느낌이겠지.
“스트-라이크! 원!”
몸쪽 높은 패스트볼로 초구 카운트를 잡아냈다. 가와사키는 장타력이라고는 형진만큼이나 없는 일본인 야수다. 높은 공을 치라고 던져 주면 외야에서 잡힐 게 분명하다.
“파울. 스트라이크 투.”
2구는 좀처럼 던지지 않는 높은 쪽 싱커로 던졌다. 가와사키가 툭 밀어내 봤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1루 쪽 파울.
웬만큼 장타력이 있는 선수들에게는 결코 던질 수 없는 공이지만, 지금의 가와사키는 이 공을 쳐서 담장을 넘길 수 없다. 지금도 타석에서 방망이를 한 뼘은 짧게 쥐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내야만 넘겨보겠다는 속셈이겠지만 저 스윙을 선택한 건 실패가 될 게 명백하다.
3구와 4구는 낮게 떨어지는 커브를 던져 유인을 해 봤지만, 가와사키가 참아냈다. 그래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선수라서 그런지,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에는 어느 정도 대처가 되는 모양이었다.
[ 투 앤 투의 카운트. 오늘 경기 문의 115번째 공입니다. 노히터를 이뤄낼 수도 있는 공. 발을 한 번 빼 보는 가와사키. ]
[ 오늘 공을 상당히 많이 던졌는데 아직도 집중력이 살아있네요. 루키답지 않습니다. 대단해요. ]
[ 스태미너도 대단한 선수네요. 자, 문. 5구. 던집니다! ]
풀 카운트를 가는 것도 감수한다. 높은 쪽 패스트볼. 존에 걸치듯이, 빠지듯이. 만약에 타석에 서 있는 타자가 가와사키가 아니라 도날드슨이라면 때려 죽여도 이 코스의 공을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와사키의 부족한 테이크백과 파워라면 이 공은 때려내도 플라이가 확실했다.
지혁은 이를 악물고 두 손가락으로 실밥을 강하게 긁어냈다. 손에서 떠난 공이 날아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다가 홈플레이트 근처에 다다라서 갑자기 정상 속도로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었다. 가와사키의 배트가 휘둘러져 나왔고.
- 예에에에에에!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누가 시켰는지는 몰라도 3층 관중석에서부터 꽃가루가 휘날려 내렸다. 가와사키의 방망이 위로 공이 지나갔다. 카살리의 미트에 공이 박히는 순간 로진이 퍼져 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으아자자자!”
지혁은 모자를 벗어던지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카살리도 공을 받는 순간 마스크를 하늘 높이 던져버리며 마운드로 달려왔다. 앞에서는 카살리가 지혁을 껴안았고, 그의 뒤편에서는 내야수들이 달려와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마운드를 가득 채운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이상한 소리를 질러대며 방방 뛰었다.
더램에서 퍼펙트게임을 만들어 냈을 때는 경황이 없었다. 지혁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날이었고, 어떻게 던졌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똑똑하게,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다. 마치 뭔가가 씌였던 것 같은 작년 퍼펙트게임 때와는 다르게, 오늘 경기는 이것저것을 전부 지혁이 컨트롤하고 판단하며 만들어낸 경기다.
그렇기에 훨씬 더 자랑스러웠다. 해냈다. 노히트 노런이다. 메이저리그에서!
*
“축하합니다. 문.”
“아. 체임.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전에도 팀 내 최초라고 역사를 쓰더니. 이것도 기록이에요. 우리 팀에서는 처음이죠. 루키가 노히터를 기록한 건 최초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우리 팀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아주 좋네요.”
체임 블룸은 매우 들떠있는 것 같았다. 맷 실버맨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스튜어트 스턴버그 구단주도 그렇고. 시즌 마지막 경기인데다가 와일드카드 진출이 결정될 수 있는 경기여서 그런지 구단의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해서 경기를 지켜본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라운드로 내려온 수많은 고위 관계자들과 인사를 하고 나서,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라운드를 향해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있는 팬들에게 커튼콜을 한 번 하고 나니 이번엔 기자들이 정신없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쉬지 않고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공식 인터뷰를 하게 될 ESPN의 리포터들은 계속해서 지혁을 쫄쫄 따라다녔다. 막내일 게 분명한 스태프는 계속해서 종종걸음으로 지혁을 쫓으며 ‘준비된 인터뷰 시간, 저, 인터뷰, 인터뷰하셔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휘유. 오케이. 인터뷰 할 시간인가요?”
마침내 지혁이 기자들을 향해 돌아섰을 때. 애가 타게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던 리포터의 표정이 드디어 조금 펴졌을 때. 체임 블룸이 무선 마이크 하나를 쥐고서는 담당 PD와 리포터 쪽으로 잠시 다가갔다.
“인터뷰는 조금 미뤄졌어요.”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세요?”
“위쪽하고 얘기가 된 사항이에요. 연락해 봐요. 우리 구단의 행사가 있어요.”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인터뷰는 행사가 끝난 뒤 진행합니다.”
“아니,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당신 상사하고 연락해 봐요. 미안하지만 옆으로 좀 물러나 있어줘요. 이제 내 차례라서.”
블룸은 트로피카나 필드의 잔디에서 급하게 의자를 나르고 있는 스태프들을 가리키며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팬 여러분! 저는 탬파베이 레이스의 운영 총괄을 맡고 있는 체임 블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순간에 여러분과 함께 레이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블룸은 관중석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불러 세웠다.
“우리의 슈퍼-문이 노히터 게임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즌 마지막 게임에서 팬 여러분들에게 멋진 선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고, 또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리 팀의 이번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와일드카드를 말하는 것이리라. 선수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관중들 모두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블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 같이, 애리조나와 휴스턴의 경기를 볼 겁니다. 다 같이 응원하면 우리의 희망이 애리조나까지 날아갈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지금 6회초 휴스턴이 공격 중이라고 합니다. 관중 여러분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수분들, 스태프들, 모두 이리로 나오세요.”
아. 스태프들이 나르고 있는 저 의자가 그런 용도였나?
랭카스터를 필두로 선수단과 스태프들이 야구장 한복판에 마련된 의자에 가 앉자, 트로피카나 필드의 조명이 하나 둘 꺼졌다. 어두워진 그라운드 안에 거대한 전광판만이 빛을 발하게 되자, 체임 블룸이 이야기했다.
“자. 다 같이 애리조나 디백스를 응원할 시간입니다. 고, 디백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전광판에는 애리조나와 휴스턴의 경기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와우. 존나 쿨해. 난 이런 건 처음인데!”
“여기서 전광판으로 야구를 본다고? 하하. 체임 블룸이 생각을 잘 했는걸.”
“헤이, 노-히터 맨! 한가운데로 와. 맨 앞줄로. 네가 오늘의 주인공이잖아!”
선수들 중 몇 명이 지혁을 맨 앞줄로 끌어냈다. 그리고 그제야 인터뷰를 놓쳐버린 PD의 표정이 그나마 조금 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그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와일드카드 티켓을 누가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니까.
체임 블룸의 이벤트 덕분에, 트로피카나 필드에 모인 대부분의 관중들과 선수단, 스태프, 구단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서 휴스턴의 경기를 지켜보게 되었다. 거대한 전광판을 통해서 현지 중계 채널의 목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 지금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경기가 끝났다고 하네요. 결과는 변하지 않았군요. 14대0으로 탬파베이 레이스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대파했습니다. 그리고... 와우. 탬파베이의 루키 투수 지혁 문이 노히터 게임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
애리조나와 휴스턴의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가 코멘트를 하자, 트로피카나 필드에 모인 관중들이 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마치 월드컵 이원중계를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크리스 아처를 필두로 한 선수단도 다 같이 문! 문! 문! 문! 을 외쳐대며 낄낄댔다.
어두운 야구장의 가운데에 있자니 마치 축제의 한 현장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화려한 무대와 조명이 외야의 거대한 전광판이고, 이곳은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현장이었다. 클러비들이 샴페인을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맥주와 나쵸 칩을 전해다 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음에 듭니까, 문?”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체임 블룸이 지혁에게 다가와 슬쩍 물었다.
“네. 축제 같고 좋네요.”
“그런 반응을 기대했어요. 팬들도 그런 반응이었으면 좋을텐데.”
- 이예에에에! 골디! 골디! 골디!
블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중석 쪽에서 또 하나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애리조나의 1루수 폴 골드슈미트가 몸을 던지는 수비로 라이너 타구를 건져낸 것이다. 마치 탬파베이의 선수들이 호수비를 한 것 마냥 좋아하는 팬들의 모습은 이색적이기도 했다.
“재밌네요. 하하.”
“다행입니다. 그래도 이 이벤트는 꽤 성공적인 것 같네요. 오늘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문. 나는 또 잠깐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방송국 놈들을 달래줘야 하거든요.”
“네. 고생하세요.”
지혁은 웃으며 맥주를 한 캔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몸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축제의 날이었다.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