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97화 (98/204)

< 97 - There is no miracle. >

“오케이! 1루! 1루!”

“YES!”

선수들은 지금 자기가 앉아있는 곳이 야구장 한가운데이며, 수많은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구단 고위 관계자들도 그들의 옆에 같이 앉아 야구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두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특유의 이상한 괴성을 질러대는 흑인 선수들과 라틴계 선수들은 방방 뛰며 난리를 피워댔다.

이곳은 잔디와 흙냄새가 묘하게 섞여 있는 틀림없는 야구장이기도 했고, 또 캄캄한 암흑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만 빛을 발하는 영화관이기도 했으며, 또 애리조나의 좋은 플레이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콘서트장이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는 관중석과 마운드를 가리지 않았다.

지혁의 노히터가 전해준 짜릿한 열광이 다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에 7회가 끝났다. 애리조나는 매우 훌륭한 최종전을 치르고 있었다. 스코어는 8대3. 휴스턴 선수단의 표정에서 당혹스러움과 절망감이 읽혔다. 체이스 필드와 3,500km가 떨어진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도 그 감정이 생생하게 잡힐 것처럼.

“정말 준비해야 되겠네. 양키스는 다나카가 나오겠지?”

“응. 아마도. 피네다나 사바시아를 낼 수는 없겠지.”

“그 공은 까다로운데. 막판에 오면서 컨디션이 다시 살아난 것 같던데.”

선수들 중 몇 명은 벌써부터 단판 승부로 치러지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꿈꾸고 있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 모두가 고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8회초. 휴스턴이 마지막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 잡아당깁니다! 이 타구! ]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타구음. 그리고 완벽한 풀 스윙에 제대로 얻어맞은 공. 단 한 명도 의심할 수 없었다. 조지 스프링어의 쓰리런 홈런. 부실한 불펜은 시즌 내내 애리조나를 괴롭힌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7회 이후부터 등장하는 투수들의 공은 정말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 좌측 담장을 훌쩍 넘어갑니다! 스코어는 8대6, 두 점차이가 됩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와일드카드 진출을 위한 의지를 아직 잃지 않았습니다! ]

지혁처럼 탬파베이에 늦게 합류한 선수들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선수들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2011년. 탬파베이가 기적 같은 와일드카드 뒤집기를 성공했던 바로 그 날. 양키스를 상대로 8대4로 뒤지던 탬파베이는 롱고리아의 쓰리런 홈런으로 추격을 시작했다. 마치 지금 스프링어가 때려낸 홈런과 비슷하게도, 그랬다.

그 때의 짜릿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만큼은 아니었다. 그 주인공이 휴스턴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니까.

“제발. 제발 막아라. 제발!”

단번에 사정권 안으로 추격한 휴스턴은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9회초. 애리조나의 마무리 투수인 브래드 지글러는 1.85의 평균자책점과 30개의 세이브를 기록한, 준수한 투수다. 애리조나의 좋지 않은 불펜 사정을 감안하면 클로져 지글러만큼은 정말 대단한 활약을 해 준 셈이었다. 하지만 그도 선두타자 라스무스를 볼넷으로 출루시켜 버렸다.

“shit.”

정적이 감돈다. 모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본다.

[ 빠져...나갑니다! 크리스 오윙스의 다이빙을 빠져나가는 타구! 라스무스는 2루를 돌았습니다! 3루로! 3루로 향합니다만 세이프! 알투베의 우전 안타. 원 아웃에 주자는 1루와 3루가 됩니다. 동점 주자가 출루합니다. ]

9회초. 원 아웃 주자는 두 명. 타석에는 3번, 카를로스 코레아.

[ 슈퍼 루키 코레아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이번 시즌 언더핸드 투수를 상대로 한 타율이 그나마 가장 낮습니다. .276. 브래드 지글러의 투구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됩니다. 아마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도 이 타석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을 겁니다. ]

[ 두 팀의 운명이 걸려 있는 타석이네요. ]

[ 말씀대로입니다. 초구! 떨어지는 체인지업. 코레아가 속았습니다. 원 스트라이크. ]

코레아의 몸쪽으로 감겨 떨어지는 언더핸드 특유의 체인지업이 먹혀들자 안도의 한숨으로 웅성거린다. 모든 것이 이 타석에 걸려 있었다.

[ 2구. 살짝 떠오르는 공에 헛스윙! 투 스트라이크. 좋은 카운트를 선점합니다. 지글러. ]

[ 코레아 선수가 살짝 긴장한 것 같은 스윙이네요. 몸에 힘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어요. ]

[ 아무리 대담한 루키라고 해도 이 정도 상황에서는 긴장이 안 될 수가 없겠죠? ]

[ 물론입니다. 게다가 지글러 선수는 리그에서 한 손 안에 들어가는 땅볼 유도형 투수죠. 애매한 스윙에 살짝 빗맞으면 바로 더블플레이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아웃카운트 두 개가 나와버리면 휴스턴의 시즌이 여기서 끝나버리니까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죠. ]

그래. 제발 긴장해라. 떨어지는 공을 빗맞춰. 제발!

[ 3구. 참아냅니다, 코레아. 떨어지는 공에 방망이가 나가다가 멈췄습니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숨막히게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

[ 스윙을 냈으면 꼼짝없이 삼진 아니면 더블플레이였어요. 위험했습니다. ]

[ 긴장한 듯 길게 숨을 쉬어보는 지글러. 그리고 타석의 코레아. 이렇게 앳된 선수가 지금은 정말 무서운 타자입니다. 큰 것 한 방이면 게임이 뒤집어집니다. 뒤집어져요! ]

인터벌도 길고, 발도 한 번 빼는 동작이 반복되는 동안 탬파베이 선수단 사이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마른침만 삼키는 중이다. 그리고. 4구. 브래드 지글러가 몸을 비틀면서 아래에서 끌어올린 팔꿈치가 채찍처럼 휘둘러지면서 손끝에서 공이 뻗어나간다.

“Holy...”

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투수의 입장에서 볼 때, 저 카운트에서는 존 아래로 떨어뜨려야만 했다. 따라올 때까지. 하지만 공이 처음 손에서 떠난 걸 본 그 찰나의 순간, 이 공은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간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때립니다! 코레아! 센터 필드, 뒤로! 깊게! ]

“shit.”

20분 전까지만 해도 이 곳 트로피카나 필드는 축제의 장이었다. 오늘은 축제의 날이기도 했다. 시즌을 마무리하는 날 노히터 게임이 나왔고, 와일드카드로 가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공 한 개에 그것이 뒤집어졌다.

카를로스 코레아의 타구가 멀리 뻗는 순간, 그리고 처절하게 펜스에 매달린 엔더 인시아테의 위를 넘어 외야에 마련된 풀장에 공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 It ain’t over till it’s over!(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카를로스~ 코레아! 게임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믿어지십니까? ]

하아.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다.

*

“우리의 힘으로 진출권을 따내지 못했으니까요. 아쉬운 것은 분명하지만, 불평할 수 없는 결과인 것도 분명합니다.”

“질문 하나만 더 가능할까요?”

“죄송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지혁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자들을 밀어냈다. 탬파베이의 클러비 중 하나가 지혁의 손을 이끌고 클럽하우스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침통한 표정의 선수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왔군. 자. 우리의 마지막 팀 미팅을 시작해 볼까.”

평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랭카스터 뿐이었다. 지혁이 문을 닫고 자리에 앉자 랭카스터는 연설을 시작했다.

“우선... 한 시즌 동안 고생이 많았다. 물론 오늘의 결과에 실망스럽겠지. 우리는 결국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으니까. 나도 그렇다.”

랭카스터의 방침대로라면 열정적인 반응을 보여야 할 선수들은 여전히 침울해 있다. 오늘만큼은 랭카스터도 그냥 넘어가려는지 그저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실망스러워도 좋다. 더 실망스러워 해도 좋아. 난 여기에 돌아오기 전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 그들 중 몇 명은 질 때마다 울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좌절하고 나서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펑펑 울었지. 그럴 때마다 난 녀석들의 등을 쳐 주면서 울지 말라고 말했지. 너희는 프로가 아니고, 어리고, 앞날이 창창하다고. 기회는 또 있다고.”

랭카스터의 시선이 어린 선수들에게로 향했다. 여러 선수들을 돌아가다가 지혁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지혁은 순간적으로 랭카스터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맞아. 우리 중 몇몇 녀석들에게도 그런 소리를 해 줘야겠지. 하지만 녀석들과 너희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너희는 프로야. 프로페셔널. 그렇지?”

“예스.”

“프로에게 주어진 가장 큰 미션이자, 프로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 그건 실패를 다루는 능력이다. 우린 언제나 실패하기 때문이지. 결국 이 싸움에서도 마지막에 이긴 녀석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실패자야. 우리는 언제나 실패한다. 실패하기 위해 야구를 한다고 해도 될 정도지.”

항상 허슬을 강조하고 직접 맨 앞에서 열정을 보여주던 랭카스터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침착하고, 진지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꽤 흡입력이 있었다. 아마 지금껏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가 갑자기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건, 대니 랭카스터라는 미친 들소의 연설은 선수들의 가슴 깊숙한 곳을 매우 날카롭게 때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오늘의 실패를 다루겠지. 그거면 된다. 프로답게,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할 줄 알아야 해. 지금부터는 한 시즌을 되돌아보고, 이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느끼고, 다루고, 극복하고. 그리고 다음 시즌의 성공만 생각할 시간이다. 제군들.”

랭카스터는 커다란 손등으로 코 밑을 쓱 긁으며 말했다.

“한 시즌 동안 수고했다. 올해의 야구는 여기서 끝이다.”

랭카스터가 선수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주먹을 내밀었다. 모든 선수들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 주먹에는 분노도, 좌절도, 슬픔도, 아쉬움도 담겨 있었다.

“원. 투. 쓰리.”

“허슬!”

지혁은 2015 시즌의 모든 아쉬웠던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주먹을 힘차게 허공에 내리쳤다. 그렇게 지혁의 첫 번째 메이저리그 풀타임 시즌이 끝이 났다.

*

2015년 11월 1일.

맷 하비-제이콥 디그롬-노아 신더가드-스티븐 마츠라는 환상적인 선발 투수들, 영건 4인방을 보유한 뉴욕 메츠와 켈빈 헤레라-웨이드 데이비스-그렉 홀랜드로 이어지는 불펜 3대장을 앞세운 캔자스시티 로얄스의 월드시리즈 5차전. 연장 12까지 이어진 대혈투 속에 세계 정상을 차지한 팀은 캔자스시티 로얄스였다.

두 팀이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캔자스시티 로얄스야 지난 해 월드시리즈에서 마지막에 미끄러진 팀이라고는 해도 꽤 심한 전력 누수를 겪었다. 제임스 쉴즈를 비롯해 선발진이 무너졌다는 평가였다. 공격력도 빈약한 측면이 있었고. 캔자스시티는 개막 전 지구 4위로 평가받았던 팀이었다.

뉴욕 메츠도 마찬가지다. 2007년 ‘어메이징 메츠’로 기억되는 전설적인 몰락 이후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리빌딩만을 거듭해 온 팀이었다. 올해도 여느 해와 다르지 않은 리빌딩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두 팀은 그런 평가를 보란 듯이 깨트렸다. 2015년은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겨 나간 한 해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했던 전통적인 강팀들은 힘을 쓰지 못한 데 비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팀들이 살아남았다. 전문가들이 점찍었던 선수들은 잠잠한 한 해를 보낸 데 비해,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들이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다.

“그래서 2015년은 예측을 불허하는 한 해였다는군요.”

“음. 그럴듯하네요.”

“글쟁이들은 항상 그럴 듯한 말을 하니까.”

“뭐. 당신도 항상 그럴 듯한 말로 구단을 속여넘기는 사람이잖아요.”

“그거야 당연한 거고.”

패트릭은 멘데스와 함께 도미니카로 날아갔다가 이제 막 돌아왔다. 비행을 마치고 막 돌아온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류 뭉텅이에 코를 박고 있는 게 문제였지만.

“바빠 보이네요.”

“엄청나게.”

“그건 다 뭔데요?”

“새로 계약하려는 선수들의 자료들. 그리고 당신에 관한 소문들이요.”

“소문?”

“아뇨. 소문‘들’.”

지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야구가 끝난 이후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데 무슨 소문이 난단 말인가?

“루키 오브 더 이어의 유력 후보라는 이야기가 돌아요.”

“음?”

“왜요?”

“당연히 내가 받는 게 아니고, 유력 후보라구요?”

“하아.”

지혁의 기록은 신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이었다.

시즌 15승 8패. 크리스 아처에 이어서 팀 내 다승 2위의 성적.

2.50의 평균자책점. 팀 내 1위의 성적. 정규시즌을 통틀어서도 무려 리그 5위였다.

게다가 이닝은? 크리스 아처의 213이닝에 이은 팀 내 2위. 209이닝이라는 수치는 신인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수치다.

이 성적을 거두고도, 압승이 예상되지 않는다는 건 솔직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패트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투표는 기자들이 합니다. 알죠?”

“아아.”

유일한 빈틈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신인왕을 뽑아 주는 건 기자들이라는 것. 랭카스터 체제에 돌입한 이후 탬파베이는 미디어를 좋아하지 않는 팀이 되었고, 미디어도 탬파베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혁도 마찬가지였고.

“그래도, 설마요.”

“문.”

패트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꽤 안 좋은 이야기들이 돌고 있어요. 기자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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