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슈퍼 스타. >
내셔널리그 신인왕, 시카고 컵스의 크리스 브라이언트. 1위 표 30장을 독식하며 아무도 이견이 없는 만장일치 신인왕에 뽑혔다. 2위는 2위 표 22장과 3위 표 4장을 얻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맷 더피. 그리고 3위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유격수 구진호.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탬파베이 레이스의 문지혁. 1위 표 16장과 2위 표 8장, 3위 표 2장을 얻어 총 116점으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2위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카를로스 코레아. 1위 표 8장과 2위 표 18장, 3위 표 4장으로 총 94점. 3위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페르난도 멘데스. 1위 표 6장과 2위 표 4장, 3위 표 7장, 49점이었다. 나머지는 프란시스코 린도어와 미겔 사노가 조금씩 나눠가졌다.
“축하한다. 임마. 내 니는 잘 될 줄 알았다.”
“감사합니다.”
“니는 이번에 한국 안 들어가나?”
“아직 고민 중입니다. 한국에 안 간지 오래 되긴 했는데... 또 딱히 가서 할 것도 없구요.”
“부모님은?”
“어려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님도요.”
“그래...? 몰랐데이.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부상으로 일찌감치 한국에 들어간 다저스의 류희주와, 역시 무릎 골절이라는 큰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재활 중에 있는 피츠버그의 구진호를 제외한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이 다 같이 지혁의 집에 모였다. 결국 텍사스의 최성수와 탬파베이의 형진뿐이지만.
플로리다는 겨울을 잠시 보내기에 꽤 괜찮은 휴양지인데다가, 이들은 다 같이 한국에 입국할 예정이었다. 가족들을 다 같이 데려 온 최성수 덕분에 지혁의 집은 모처럼 바글바글하니 시끄러웠다.
“그래도 같이 들어가면 안 좋겠나?”
“네, 뭐. 아직은 별로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쉬는 게 편하기도 하고요. 안 그래도 한국 쪽 기자들이랑 방송국 연락 때문에 힘든데요. 들어가면 난리도 아닐 것 같아서요.”
“하하. 맞나. 하기사 그것도 그렇겠네.”
역사를 쓴 것이니까.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식 발표가 나기도 전부터 이미 패트릭에게 수십 통의 요청 문의가 쌓여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 기자들이 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래도 아주 거리를 두면 그것도 나름대로 불편할 기다. 한국 쪽에서 주는 관심이 꽤 좋게 작용할 때도 있으니까.”
“그런가요?”
“아무래도 한국 쪽 미디어는 구단 편이 아니라 선수 편이거든. 우리 입장에서 만들어내는 기사들이 가끔은 미국에도 들어오고 그런다꼬. 우리 감독님도 조금, 없지 않아 영향을 받기는 했다. 그래서 내가 조금 부진했을 때에도 기회를 받기도 했고. 내 편지 쓰는 거 알제?”
“아, 포탈에요?”
“응. 영향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한국 팬들을 위해서 쓴 편지가 영향을 아예 안 준 것도 아닌거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한국 쪽에도 신경을 좀 쓰는 게... 피곤하지만 또 힘도 많이 난다. 도움도 은근히 되고. 한국은 이쪽 사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그래서 랭카스터 감독도 욕 많이 먹었지. 탬파베이 팀의 타자들도 그렇고. 미국에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일들도 한국 팬들이 보기에는 다르니까. 결과물만 놓고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리고 내 듣기로는 이번에 KBO에서 뛰는 놈들도 많이 온다카데. 일본에 있는 도형이도 도전 함 해본다카고.”
“그런가요?”
“그래. 니는 어린놈이 어찌 나보다 모르는데? 하하.”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미리 알고 있어서 그렇다. 2016시즌은 한국인 야수들의 메이저리그 도전 러시가 이어지는 해다.
국가대표 좌익수인 김호석, 조선의 4번이라는 소프트뱅크의 이도형, 그리고 엄청난 슬러거인 배병후. 한국 역사상 최고의 클로져라는 마무리 오성현도 온다. 그래서 한국 팬들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금마들 들어오면 한국에서도 또 엄청 들이댈기다. 니한테도. 대충 보니까 방송 나가고 인터뷰하고 이런 거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선심 쓴다는 마음으로 먼저 한 번 해 주면 다음부터는 조금 덜 귀찮게 굴 거다. 생각 잘 해봐라.”
“네. 알겠습니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최성수가 연륜이 있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상의를 해볼 법한 일이기는 했다. 아주 무시하고 계속 야구만 할 수야 있겠지만.
*
“패트릭. 나랑 한국 한 번 다녀올래요?”
“한국? 안 간다면서요?”
“평생 안 들어가기도 조금 그렇고. 타이밍 맞춰서 한 번쯤 갔다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흠. 하긴. 고향이니까.”
“딱히 그런 것 때문은 아니지만요. 한국 쪽 미디어도 관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좋은 생각이네요. 척져서 좋을 건 없지. 근데 내가 꼭 같이 가야 해요? 가서 쉬다 온다는 개념으로 인터뷰나 몇 개 하면 될 것 같은데.”
“한국도 보통 극성이 아니에요.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절대로 덜하지는 않아요. 그냥 몇 번 거절하다 보면 알아서 포기하는 미국하고는 다르거든요.”
“쓰읍.”
잠시 동안 휴식이라도 기대했던 것인지 패트릭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곧 평소의 패트릭으로 돌아왔다. 의자를 쭉 밀어 책상 끄트머리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서류 무더기 쪽으로 향한 패트릭은 몇 개를 빼서 지혁에게 내밀었다.
“그럼 한국 가는 김에 돈이나 좀 벌어봅시다.”
“돈?”
“광고요. 어마어마하게 들어왔으니까 대충 마음에 드는 거 골라잡아요.”
기왕 한국에 들어가서 미디어와 팬 관리를 할 거라면, 돈까지 버는 것도 좋지. 아무래도 올 겨울은 바쁘게 돌아갈 것만 같았다.
*
“문지혁 선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여기서 잠시 대기하실게요.”
“네?”
“잠시만 대기하실게요. 밖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준비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눈웃음을 짓는 스튜어디스가 게이트 밖에서 지혁과 패트릭을 막아세웠다.
“뭐지, 이건.”
“뭐긴요. 당신이 헐리우드 스타쯤 되는 줄 알고 있나 보지.”
“장난하지 마세요.”
“내가 아니라 저 스튜어디스가 그러잖습니까. 밖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공항이 마비된 것 같다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죠.”
“뭐야. 긴장했습니까?”
“긴장? 글쎄요. 날 보려고 사람이 많이 나왔다니까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한 번도 이래 본 적이 없어서.”
“적어도 한국에선 당신은 슈퍼스타군요. 영상을 한 번 찍어볼까. 멘데스가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하지 마요. 쪽팔리니까.”
하지만 패트릭은 핸드폰을 꺼내 촬영 준비를 마쳤다. 지혁도, 패트릭도 조금은 들떠 있었다. 한국에서의 겨울나기가 꽤 기대되기 시작했다.
“자, 들어가실게요.”
스튜어디스가 친절하게 게이트 쪽을 가리켰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지혁과 패트릭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엄청난 플래시 세례와 함성에 파묻혔다. 문자 그대로 파묻혔다. 엄청난 군중이 뿜어대는 에너지가 두 사람을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오 마이 갓.”
패트릭은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웬만해서는 표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패트릭도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헐리우드 슈퍼스타? 아니. 그 이상이었다.
“웃으세요! 웃어주세요!”
누군가가 뒤에서 지혁과 패트릭을 쿡쿡 찔렀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참이나 얼이 빠진 채 서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갑시다. 일단 인터뷰부터 해야 해요.”
패트릭이 지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스무 걸음도 채 옮기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기자들과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지혁의 앞에 마이크 열댓 개가 순식간에 덧대어졌고,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와우. 이건 진짜 미쳤군.”
패트릭은 혼자 조용히 되뇌었다. 헐리우드 슈퍼스타를 넘어서는 지혁의 일정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신인왕. 아시아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 이치로 스즈키, 사사히 카즈히로에 이은 네 번째 수상자. 이 타이틀만으로도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그 관심을 나눠 받아야 할 LA 다저스의 류희주가 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날려먹으면서, 모든 한국의 야구팬들의 관심이 지혁에게 쏠렸다. 여기에 2년 전만 해도 아무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던 싱글 A의 방출 선수가 순식간에 인생역전을 한 신비로운 스토리까지 더해졌다.
그런 선수가 미국에 진출한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성공한 뒤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한국의 스포츠 미디어와 기자들, 심지어는 예능 프로그램과 뉴스까지도 지혁을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한국에서 지혁의 위상은 슈퍼스타 그 이상이 되어버렸다.
“내가 과소평가했네요. 인정해야겠어요.”
“힘들어서 대꾸할 힘도 없어요. 완전히 녹초예요, 난.”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거지. 당신은 왜 그 동안 한국에 안 들어왔어요? 여긴 완전히... 당신이 지배하는 나라 같은데. 당신이 공화당을 뽑으라고 하면 저 사람들 전부 공화당을 뽑을 것 같은데요.”
“그 동안에는 내가 한국에 들어가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안 썼거든요. 그리고 한국에는 공화당이 없어요.”
“농담입니다.”
패트릭은 빗어 올린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그도 지쳤을 것이다. 지혁은 그저 호텔 침대에 누워 TV에서 나오는 메이저리그 프로그램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혁의 투구 모음, 탈삼진 모음, 승리 모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재방송되고 있다. 아마 한국의 메이저리그 팬들은 이미 골백번도 더 본 장면일 것이다.
[ 루킹 삼진! 위기를! 탈출하는! 문지혁! 선수입니다! ]
[ 허허허. 시속 151km 짜리 직구가 제구된 위치를 좀 보세요. 엄청납니다. 저 공은 배리 본즈가 와도 칠 수 없는 공이네요. 역시 배짱이 참 좋은 투수예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공을 던질 줄 압니다. 역시 문지혁입니다. ]
[ 1사 만루의 위기를 삼진 두 개로 넘기는 문지혁!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 채 마운드를 내려옵니다. 정말 잘 했습니다. 정말 잘 던졌습니다. ]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지혁의 투구에 한국인 캐스터와 해설자가 코멘트를 덧입힌 방송을 보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별 것 아닌 투구와 별 것 아닌 아웃카운트 하나에도 핏대를 세워가며 중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선수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한국에 온 건 확실히 잘한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미처 체감할 수 없었던 팬들의 성원이나 미디어의 관심, 슈퍼스타 대우. 사람들이 많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지혁이지만 그런 지혁에게도 커다란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에너지를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오히려 지혁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일이다. 무척이나 피곤한 일정이 반복되고 있었고, 휴식을 가져야 할 지혁에게는 피곤한 일정이 연속해서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 들어온 지 닷새. 그 닷새 만에 스포츠 프로그램의 특집 방송 한 편과 방송 인터뷰 다섯 개, 그리고 기자 인터뷰 열댓 개를 소화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는 하루에도 열 개도 넘게 거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세탁기 광고 하나와 라면 광고 하나도 찍었다. 대체 왜 야구선수가 세탁기와 라면을 광고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가장 녹화가 짧고 돈을 많이 주는 광고들이었다.
“문. 그거 알아요?”
“뭐요.”
“당신이 작년에 탬파베이에서 받은 최소 연봉, 그리고 올해 받을 최소 연봉, 그리고 내년에 받을 최소 연봉. 한국에 온 지 5일 만에 그 돈을 다 벌었어요. 그보다 더 벌었고.”
“난 돈에는 별로 신경 안 써요.”
“뭐, 그렇다면야.”
“그래서 이제 광고는 안 찍을 겁니다. 방송도요.”
“전부 다?”
“네.”
“단호하네. 오케이. 다 캔슬하죠.”
패트릭도 픽 웃었다. 그도 나름대로 피곤했던 탓이겠지.
“그나저나, 일정을 다 캔슬하면 뭘 할 예정입니까?”
“일본이나 한 번 갔다오려고요.”
“일본은 또 왜요?”
“최성수 선배가 소개해 준 병원이 하나 있어요. 저번 시즌에 많이 던졌으니까, 팔이랑 어깨, 허리도 한 번 검사를 받으려고.”
“흠. 확실한 병원입니까? 병원이라면 차라리 미국에 들어가서...”
“최성수 선배 쪽에서 소개해준 데니까 믿어도 돼요. 국가대표 뛸 때 주치의 했던 분도 계시다고 하구요.”
“오케이. 좋습니다. 우리에겐 휴식이 조금 필요하죠. 확실한 건, 한국에서는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는 거고. 일본으로 도망갑시다.”
패트릭은 곧장 일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병원이 어디라구요?”
“미야기. 미야기 현이래요. 센다이? 센다이 시라고 하셨는데.”
“미야기... 미야기. 북동쪽에 있는 곳이구만. 내일은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고 쉽시다. 그리고 내일 모레 일본으로 가죠.”
“그래요. 난 이제 좀 씻어야겠어요. 바로 자야되겠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발을 끌고 욕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요새 왜 이렇게 자꾸 갑자기 나타나고 그러세요?”
“할 말이 있네. 클클.”
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