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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00화 (101/204)

< 100 - 너구나? >

신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거대한 욕조에 걸터앉아 있었다.

“뭔데요? 이번에도 무슨 내기를 하시려구요?”

“아니. 그냥 듣게. 자네가 나더러 휴가를 가라고 했었잖나.”

“네.”

신이 잇몸까지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어디서 휴가를 보냈는지, 뭘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 이런. 그냥 쉬다 오시지. 또 뭔가를 하셨군요?”

“흐흐. 인간들이 휴가를 갈 때와 비슷했지. 편하게 쉬기도 했고, 아무 생각 안 하고 있기도 했고, 또... 재미를 찾기도 했지. 나름대로 말이야.”

“잠깐. 잠깐만요.”

지혁은 찬물을 틀어 여러 번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신호가 왔다. 야구의 신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신이 일을 저질렀다.

“후아. 피곤해 죽겠는데 잠이 싹 달아나네.”

심호흡을 하고는 두 볼을 짝 쳐 본다.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고.

“자. 준비됐어요. 이번엔 무슨 일이죠?”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네만. 나름 재미있는 일이 될 테니까. 휴가를 간 동안, 자네처럼 나와 간단한 계약을 맺은 친구가 한 명 더 생겼다네.”

“하아?”

젠장. 빌어먹을 영감탱이.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독특해. 아주 재밌는 친구더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지혁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신은 신난 아이처럼 해맑게 말을 이어갔다.

“자네에게서는 아직까지 잘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이 녀석이 채워줄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고. 그래서 내 능력으로 조금 도와주기로 했네. 물론 대가도 확실히 받을 예정이고 말이지.”

“받을 예정... 이라. 저한테서 선수 생명을 받아 가신 것하고는 또 뭔가 다른 내용인가 보죠? 우리가 했던 내기 같이?”

“흠. 비슷하지. 날카롭구만. 흐흐.”

다른 내용의 계약을 한 미지의 선수가 있다. 그게 누구인지, 어떤 면에서 지혁과 다르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턱,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요. 그게 누구죠?”

“자네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선수지. 그리고 또 고마워해야 할 선수이기도 하고.”

“그게 누군데요? 감이 안 잡히는데. 크리스 아처? 아니면... 데이비드 프라이스?”

지혁이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던 탬파베이의 몇몇 선수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지금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냥 알려주세요.”

“흐흐. 아니야.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지.”

손사래를 치며 웃는 신이 얄밉다. 그저 잠깐 동안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그 잠깐을 못 참고 또 다른 녀석에게 들러붙었다니.

“곧 알게 될 게야. 흐흐. 알 수밖에 없게 되겠지. 재밌는 시즌이 될 거야. 앞으로 몇 년 정도는. 사실 자네에게 알려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너희 둘이 알고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귀띔해 두는 거라네. 얼마 전에 자네도 말했잖은가? 세상에서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두 사람은 서로 공감하면서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으하하.”

“그 놈한테 제 얘기를 하셨어요?”

“누구라고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한 명 더 있다고는 얘기했지. 자네에게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벌린 신이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표정을 찡긋거렸다.

“차차 알아가게 될 걸세. 재밌는 일이야. 마치 쿠팩스와 구든을 한 시대에 세워놓았다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전 쿠팩스만큼도 아니고 구든만큼도 아니었는데요.”

“그 녀석들에게 접근했던 건 야구의 정점을 보기 위해서였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난 이미 정점을 봤어, 이 친구야. 지금은 인간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지를 보고 있는 게지. 너나, 그 녀석이나.”

신이 그 말을 마치고는 박수를 짝 쳤다.

“두 사람이 재밌는 스토리를 한 번 써 보라구. 흐흐.”

신이 사라진 욕실에는 희뿌연 수증기만이 남아 지혁 주위를 맴돌았다. 새로운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경쟁자가 될지, 아니면 동료가 될지. 지혁의 새로운 삶을 방해하는 녀석이 될지, 새로운 삶을 함께 개척하는 녀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지의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 모르겠다. 아니 무슨 신이 자기 재밌는 일만 찾아다니면서 살아?”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지혁은 그대로 침대에 돌아와 몸을 던졌다. 일단은 휴식이 필요했다. 미지의 누군가는, 뭐 신의 말마따나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

사흘 뒤. 고요한 일본의 겨울 거리는 굉장히 추웠지만 또 고즈넉했다. 일본에는 처음 와 본다는 패트릭은 조용하기 그지없는 미야기 현의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끔은 작은 콧노래도 부르곤 했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 건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의 그 시끄럽고 복잡했던 생활에 비하면 이곳은 낙원이었다. 알아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흐린 날씨에 굳이 선글라스를 껴야 할 필요도 없고. 신과 계약했다는 미지의 선수 때문에 복잡했던 머릿속도 깔끔하게 비워낼 수 있을 정도의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난 근처에 있겠습니다. 동네 구경이나 좀 해야겠네.”

“그래요.”

최성수가 알려준 스포츠재활의학 종합병원 앞에서 패트릭은 동네 구경이나 좀 하겠다며 저 멀리 걸어갔고, 지혁만 병원에 들어갔다. 일본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 하지만 한국인이 원장으로 있는 병원이라 그런지 무리가 없었다.

“잘 오셨습니다. 원장 박진태입니다. 성수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문지혁입니다.”

“아프셔서 오신 건 아니고. 종합검진을 원하시는 거죠?”

“네.”

간단히 악수를 나눈 박진태가 금색 뿔테 안경을 쓰며 차트를 읽었다.

“올해 꽤 많이 던지셨네요?”

“209이닝 던졌습니다.”

“작년에는요?”

“마이너리그에서 134이닝, 메이저리그에서 47이닝입니다.”

“181이닝이라. 확실히 많이 늘어나긴 했네요. 자. 자세한 얘기는 안쪽에서 하시죠.”

한 때 국가대표 야구팀의 주치의를 맡았던 적까지 있던 의사답게, 박진태 원장은 상당히 전문적이면서 능숙하게 검진을 시작해 나갔다. 지혁의 어깨 근육들을 촘촘하게 찍어 점검했고, 팔꿈치에 미세하게 퍼져 있는 작은 혈관들조차도 놓치지 않고 체크했다. 손가락 끝부터 어깨와 목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사진을 찍고 분석하는 일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투구수와 이닝을 확 늘린 것 치고는 상태는 아주 깔끔하네요.”

“하하. 다행이네요.”

“관리를 아주 잘 하신 것 같네. 마사지도 꼬박꼬박 받고 계시는 것 같고. 뭉치거나 결리는 일도 많이 없죠?”

“네. 매일 받습니다. 스트레칭도 꾸준히 하고 있구요.”

“좋아요. 문 선수는 몸 관리를 워낙 잘 하시는 케이스라서 딱히 걱정되는 부분은 없네요. 대신 이건 조심하셔야겠어요.”

“어떤 거죠?”

“상대적으로 괜찮은 몸이고, 관리도 잘 하시는 건 사실이지만요. 절대적인 면에서 보자면 분명히 무리가 갈 수 있는 수치예요. 이닝도 그렇고, 투구수도 그렇고, 변화구 구사 비율도 그렇고요. 내구성이라는 게, 결국 일정한 총량이 있으면 거기서 조금씩 조금씩 소모되는 것이거든요. 어깨나 팔은 쓰면 닳고, 많이 쓸수록 피로가 누적됩니다. 특히.”

박 원장은 지혁의 팔꿈치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싱커를 많이 던지기 때문에 팔꿈치 관리는 주의해야 해요. 모든 야구선수들에게 팔꿈치는 시한폭탄이에요. 특히 싱커나 스플리터,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들한테는. 팔꿈치를 틀어 던지면서 걸리는 부하는, 의사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최대한 공을 적게 던지면서, 최대한 잘 관리를 하는 방법밖에 없죠.”

알고 있다. 싱커를 선택한 순간부터, 싱커가 강력해지고 타자들의 방망이를 유도해내는 순간부터 팔꿈치 부상 가능성도 같이 커져왔다. 애초에 부상 위험이 없는 운동은 없다. 부상을 두려워해서 투구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뛰시니까 구단의 의료팀이 알아서 잘 케어하겠지만, 이건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팔꿈치 부상은 팔꿈치에서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나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투구폼이 좋으면 부상을 잘 안 당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부드럽고, 힘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유연한 투구폼. 지혁 선수의 투구폼은 그 정도의 폼은 아닙니다. 다저스의 희주 같은 녀석들이 그런 투구폼이죠.”

“폼을 바꿔야 할 정도인 건가요?”

“허허,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니죠. 대신 어깨의 높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해요. 이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관리하셔야 합니다. 어깨의 높이가 아주 미세하게라도 떨어지기 시작하면 팔의 각도가 달라지고, 팔의 각도가 달라지면 어깨에서 써야 할 힘을 팔에서 쓰게 됩니다. 그러면 팔꿈치에 몇 배는 더 큰 부하가 걸려요. 그러면 이제 훅 가는 거고.”

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수들은 자신의 투구폼에 민감하다고들 하는데, 막상 컨디션이 안 좋거나 성적이 안 나올 때 보면 어깨의 위치나 팔의 각도가 미세하게 다른 경우가 많아요. 많은 공을 반복적으로 던지면서도 투수가 집중하는 것은 투구폼이나 몸이 아니라 승부잖아요. 계속해서 자세를 지켜보고 교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몸이라는 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거든요? 몸에 쌓이는 피로가 누적되면 가만히 있다가 순식간에 인대가 끊어지거나 근육이 파열되곤 합니다. 작년에 꽤 많이 던졌으니까, 올해에는 조금이라도 삐걱거린다 싶으면 천천히, 쉬어가면서 하세요. 물론 선수들은 승부욕이 있어서 쉽게 컨트롤이 안 되겠지만. 야구 오래 해야죠.”

“하하. 그렇죠.”

어깨의 위치를 조심하라는 충고 외에도, 박 원장은 지혁이 놓치지 않아야 할 이것저것들을 짚어 주었다. 확실히 작년에는 무리를 조금 했다. 특히 신을 휴가 보내버린 후반기에는 공을 많이 던졌다. 약속대로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올해 200이닝을 넘겼으니, 내년에도 그 정도의 투구를 바랄 것이다. 팀도 그렇고, 지혁도 그렇다. 특히 부상자가 많은 탬파베이의 투수진을 고려하면, 선발로 나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건 내년에도 똑같이 주어진 과제가 될 것이다.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도 부상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몸 관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조심하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메이저리그 신인왕인데. 내가 오히려 고맙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조심하세요.”

“저, 로비에서 잠시만 대기하다가 나가겠습니다. 일행이 올 거라서요.”

“그럼요. 편하게 있다 가세요.”

박진태 원장은 푸근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혁은 로비로 나와 길다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패트릭을 기다렸다.

“이 양반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날도 추운데.”

몇 십 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딸랑- 딸랑-

병원의 현관에 달려 있던 종이 울렸다. 지혁은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맨 먼저 들어온 사람은 패트릭이었다. 그 뒤를 따른 사람은 얼굴이 아주 익숙한, 하지만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는 선수였고, 맨 뒤에는 멋드러진 중절모를 쓴 신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 검진은 끝났습니까?”

“검진? 아, 네. 네. 잘 끝났어요.”

“따로 이상은 없고?”

“네... 네. 그런데 이 사람은...?”

패트릭의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저 사람. 모니터 속에서 볼 때보다도 덩치가 더 작아 보였다. 180cm 정도 될까?

“설명하자면 긴데, 어쨌든 밖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랑 같이 미국에 갈 것 같아요.”

“왜요?”

“나랑 계약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고.”

패트릭이 주위를 살피며 살짝 뒷머리를 긁었다. 지혁의 시선이 패트릭의 뒤에 서 있는 녀석에게 닿자, 녀석이 지혁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어설픈 영어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지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너구나? 신을 만난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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