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미친놈 하나. >
“알았습니다. 당신일 줄.”
“어째서?”
“갑자기, 떠오른 사람. 몇 명 없으니까요.”
아주 작은 목소리가 오갔다.
“나는 당신을 찾았습니다. 그는 내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나를?”
“...”
“모르는군요. 그래도 악마는 공평하게 했네요. 내 이름은 후지 미유타입니다. 반갑습니다.”
아니,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있지. 지금 지혁이 던지고 있는 커브가 바로 후지 미유타의 것이니까.
지혁은 몸을 일으켰다. 패트릭의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신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할 말은 많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아니었다.
“패트릭. 일단 나가죠. 근처에 괜찮은 카페 있습니까?”
“있어요. 이동합시다. 후지. 당신도. 이동.”
간단한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는지 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숨막히게 어색한 공기가 세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다녔다.
*
“자. 내가 검진 받던 시간은 꼴랑 세 시간도 조금 안 될 정도였어요. 그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요.”
지혁은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는 패트릭에게 물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마침 근처에 라쿠텐이라는 프로 팀의 2군 연습장이 있더군요. 이 추운 날에 운동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있길래 멀리서 슬쩍 봤습니다. 그런데 투구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포수도 앉히지 않고 혼자서 백네트에 대고 던지는데 장난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요?”
“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잠깐 불러서 얘기를 좀 했죠. 프로 선수였다고 하더군요.”
패트릭은 거기까지 말하고 시선을 후지 쪽으로 돌렸다.
“후지. 유. 프로페셔널 플레이어. 맞지?”
“오케이. 하지만 일본 안에서는. 더 이상 프로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일본 선수가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8년을 1군에서 뛰면서 포스팅 제도를 통하거나, 9년을 뛰고 FA로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미국으로 곧장 넘어가기 위해 일본 프로 팀에서 잠깐 뛰다가 은퇴를 했대요. 이 친구가 영어를 잘 못해서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뜻은 대충 이게 맞을 겁니다.”
후지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 그러면 다시 일본으로 못 돌아오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일본으로 컴백, 없습니다.”
“나도 이게 이해가 안 가요. 대체 뭘 믿고 은퇴까지 해버렸는지가. 그냥 애송이의 치기인 건지, 원. 이미 서류 절차도 끝나서 돌이킬 수도 없다고 하고.”
후지가 이해하지 못 하게 하려는 듯 패트릭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했다. 패트릭이야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혁은 알 수 있었다.
저 놈도 신과 무언가 계약을 한 것이다. 1군에서 서비스 타임을 8년 넘게 채우기 위해서 낭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는 거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뭔가를 이뤄내야만 하는 녀석이기에, 뒤를 보지 않고 일본에서 은퇴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데려간다고요?”
“여기는 날도 춥고 테스트를 보기엔 적합하지 않죠. 어차피 미국 무대에 도전한다고 하니까 데려가서 확인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연습 투구 한 번만 봤을 뿐인데. 그럴 가치를 느꼈다는 말이에요?”
“네.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사로잡혔어요.”
“하!”
신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다. 후지 미유타가 신과 어떤 계약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녀석은 이미 무언가를 받았다. 확실했다.
“한 눈에 당신을 사로잡은 녀석이라면... 보통은 아니겠네요?”
“네. 스피드건은 없었지만, 내가 볼 때 최소 95마일(시속 152km)은 나올 것 같던데요. 이렇게 추운 날인데도.”
“95라고요?”
지혁은 입에 머금은 차를 내뿜을 뻔했다. 후지 미유타의 커브를 확인하기 위해 영상 자료를 돌려 봤을 때, 그의 패스트볼 구속은 140km대 초반에 머물렀었다. 심지어 컨디션이 안 좋거나 힘을 빼고 제구를 잡아야 할 때는 130km대 후반의 공도 던졌었다. 지혁은 후지를 쏘아봤다. 어린 티가 묻어 있는 후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체인지업으로 보이는 공도 몇 개 던지던데. 그 공도 볼 만 했고.”
패트릭도 눈빛을 빛냈다. 소위 ‘실링’이라고 부르는, 선수의 잠재력의 끝을 판단하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에이전트 패트릭 에이버리의 촉이 펄떡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하아. 패트릭. 일단 미국으로 돌아갑시다. 이번 여행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냥 미국에서 푹 쉴 걸 그랬어요.”
“왜요? 오랜만에 흥미로운 선수를 하나 건졌는데. 나한테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패트릭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지혁은 웃지 못했다. 후지 미유타라는 이 녀석이 대체 어떤 녀석인지, 이 녀석은 동료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신은 대체 무얼 바라고 있는 것인지. 침착하게 머리를 굴릴 시간이 필요했다.
*
예정을 앞당겼다. 일본에서 단 하루만 더 머무르고 난 후 곧장 플로리다로 돌아왔다. 그 동안 지혁은 계속해서 후지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후지도 지혁을 살피고 있었다. 패트릭이 같이 움직이는 이틀 정도는 말 그대로 탐색전의 시간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상대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시간.
“문. 난 구단에 좀 갑니다. 체임 블룸이 당신 연봉을 조금 더 보장해주고 싶다네요. 그래봤자 최저연봉에서 얼마 오르지는 않겠지만.”
“알겠어요. 언제쯤 돌아올 것 같습니까?”
“모르죠. 체임 블룸이 워낙 말이 많고 빙빙 돌리는 사람이라 오래 걸릴지도.”
“그래요. 올 때 연락하고.”
“연락까지? 뭐, 알겠습니다. 나 갑니다.”
패트릭은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말은 드디어 두 사람에게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후지! 나와 봐.”
지혁은 후지가 틀어박혀 있는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후지가 자다 일어난 듯 눈을 비비며 걸어나왔다.
“얘기를 좀 해 보자고. 우리는 할 말이 아주 많잖아.”
“그렇습니다. 패트릭, 나갔습니까?”
“응.”
지혁과 후지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어떤 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에게 악마가 왔습니다. 그게, 8월 즈음.”
“잠깐. 악마라고?”
“네. 악마.”
“야구의 신이 아니고?”
“자기 입으로는 신입니다. 하지만 하는 짓은, 악마. 그래서 나는 악마라고 부릅니다.”
“뭐?”
지혁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 말은 사실이긴 하다. 신이 아니라 악마에 가까운 존재긴 하지.
“나는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내 재능. 너무 안 좋습니다. 커브만 좋습니다. 커브만 자신 있습니다. 악마가 와서, 내 커리어와 재능을 바꿔준다고 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고? 왜지?”
“네. 거절. 왜냐하면. 내 커리어 12년을 다 써도, MLB의 선발투수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시. 계약했습니다.”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후지의 더듬거리는 말을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신님. 나와 봐요. 이 말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흐흐.”
한 쪽 구석에서 조용히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신이 나타나 지혁의 옆에 걸터앉았다.
“좋아. 둘만 있을 때는 상관없겠지.”
신이 빙그레 웃었다. 후지는 살짝 인상을 썼지만 이내 편하게 말을 내뱉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지혁이었지만 후지의 말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처음으로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니까, 저 악마는 엄청 놀란 기색이었어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받아줄 생각이 없었어요. 어차피 난 남은 수명을 다 걸어도 메이저리그에 입성하는 것 자체도 불확실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좋아. 그래서?”
“그래서 내가 새로운 딜을 제안했죠. 월드시리즈를 우승하고 세계 최정상의 투수가 되겠다. 3년 안에. 대신 내가 원하는 선수의 재능을 전부 달라고요.”
후지는 신이 앉아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흐핫핫! 어때, 자네? 재미있지 않은가?”
“... 세계 정상? 너,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어차피 인생을 건 도박을 하는 건데 세계 최정상이 아니면 의미가 없지 않나요? 나는 돈이나 명예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딱 하나.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 그거 하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칭 신이라는 사람한테 뭔가 큰 비기를 얻는데, 세계 최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 아무래도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네. 실패하면? 너도 나처럼 재능이 없어지냐?”
“그건 물론이구요. 팔꿈치 수술도 해야 해요. 팔을 걸었거든요. 수술하고 나면 다시는 공을 못 던질 거래요.”
후지는 갓 스물이 된 티를 팍팍 풍기는 동안에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오른팔을 툭툭 쳤다.
녀석은 팔까지 걸었다. 자신의 선수 생명으로 얻을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절대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수 없을 녀석이었던 후지 미유타는 3년을 불태우기 위해 모든 야구 인생을 전부 걸어버린 것이다.
“실패한다고 치자.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야구를 더 이상 못 하게 될텐데.”
“어정쩡하게 야구를 오래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세계 최고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그냥 흔한 투수로 오래 던지는 거. 난 별로예요.”
“좋아. 그럼 성공한다면? 네가 월드시리즈도 우승하고, 또 세계 최고의 투수가 된다고 해 보자고. 말도 안 되지만. 3년 안에 성공하면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후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1년씩 계약 연장이요.”
“1년? 그러면 다음 해에 실패하면 거기서 끝이라고?”
“네. 세계 최정상. 거기에서 내려오면 게임 끝나는 거죠.”
미친놈이네.
지혁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다. 후지 미유타라는 이놈은, 지혁의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놈이었다. 선수 인생에서 한 번 월드시리즈 우승하기도 엄청나게 힘든데, 매 년 우승을 해야 한다니. 우승하지 못하면 은퇴에 수술이라니.
“인생을 살면서 어떤 분야에서 내가 세계 최고가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나요? 만약 내 인생의 모든 걸 다 걸고 그만큼의 재능을 얻어서 3년 동안 해 봤는데도 안 되면, 뭘 해도 세계 최고의 투수는 될 수 없을 거예요.”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는 한데...”
“난 야구에 별로 미련이 없어요. 야구가 엄청 좋거나, 다른 선배들처럼 야구와 사랑에 빠졌다거나, 그런 건 조금도 없어요. 그냥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야구기 때문에 야구를 선택한 것뿐이에요.”
이제야 신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월드시리즈 우승. 하지만 후지 미유타는 지혁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 선수다.
어떻게든 최소한으로만 선수 생명을 소모하면서 재능을 얻어내고 오래오래 정상급 선수로 남아 월드시리즈에 도전하는 야구를 하려는 지혁. 반면 세계 최고의 투수라는 목표 하나만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털어넣은 후지.
후지 미유타가 탬파베이에 합류하지 않는 한, 결국 두 사람이 맞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지가 탬파베이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탬파베이는 최소한 한 시즌은 마이너리그 생활을 반드시 거치게 하는 팀이다. 투수의 능력이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급이더라도 그렇다. 탬파베이만의 팀 정신을 선수에게 심어넣고, ‘탬파베이스러운’ 투수를 만드는 데에만 몇 년씩을 쓰는 팀이다.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은 후지가 탬파베이에 입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넌 내 적이구나.”
“그런 셈이죠. 세계 최정상에게는 모두가 다 적이니까요.”
후지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미친놈.”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이 일본까지 날아가 주워 온 이놈은... 일본의 스포츠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그런데 그 만화적 상상력을 현실로 끌어내 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난, 미친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