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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02화 (103/204)

< 102 - 새 시즌 대비, 새 인생 대비. >

여느 때처럼 긴 겨울이 지나간다. 지혁에겐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이었고, 패트릭에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기간이다.

“사실 이번 해에는 조금 쉬었어야 하는데. 이적 시장도 조용하고.”

“그만 툴툴대요. 쟤 투구 한 번에 뿅 가서 데려온 건 당신이니까.”

패트릭이 이번 겨울을 바쁘게 보내는 건 순전히 후지 때문이다. 이제 막 풀타임 1년차를 보낸 지혁과 페르난도 멘데스는 패트릭 입장에서 크게 신경 쓸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탬파베이와 클리블랜드 두 구단은 이제 막 서비스타임 1년을 채운 슈퍼 루키들을 트레이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오히려 패트릭이 준비했던 것보다도 조금 더 연봉을 보장해줬다. 그리고는 윈터 미팅이 시작하기도 전에 구단주와 사장이 나서서 ‘오퍼를 들을 생각도 없다’고 일축해 버렸다.

“저 공을 좀 봐요. 어떻게 안 데려올 수 있겠냐고.”

아직 운동이라고는 가벼운 조깅밖에 하지 않고 있는 지혁과는 달리, 후지는 실전 투구가 가능할 수준까지 몸을 끌어올려 놨다. 지금도 눈앞에서 95마일을 넘기는 패스트볼을 쾅쾅 꽂아대고 있다.

“게다가 쟤는 상품성이 어마어마합니다. 아마 저 녀석이 등장하면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이 다 달려들걸요. 자이언츠만 빼고.”

“몸이 위험해 보이지 않습니까?”

“다들 그 걱정을 하겠죠. 30개 구단이 다 달려든다고 해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절반은 떨어져 나가겠지만, 그래도 15개나 남아요.”

“...”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원. 어쩌다가 이런 돌연변이가 나왔는지 모르겠네.”

“마법이라. 마법.”

일본에서 넘어온 작고 왜소한 투수. 후지의 저 몸뚱이에는 누가 봐도 팀 린스컴이 들어 있다. 린스컴의 투구 동작만큼 팔을 역동적으로 휘두르거나 다이나믹하게 몸을 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자의 시점에서 볼 때 투수의 등이 보일만큼 휘어졌던 몸통을 회전시키는 투구 모션과 있는 힘껏 내뻗은 스트라이드. 거의 마운드를 내려가다시피 할 정도로 쭉 뻗은 스트라이드 때문에 실제 스피드도, 체감 스피드도 엄청나게 뛸 것이다.

패트릭이 마법이라고 부른 저건 마법이 아니다. 린스컴의 재능이 후지에게 들어 있는 것이다. 지혁은 투구를 마치고 혼자 쉬고 있는 후지에게 슬쩍 다가갔다.

“야. 왜 린스컴이냐?”

“티 나나요?”

“멍청아. 이게 티가 안 나면 정상이냐?”

후지는 멍청이라는 말이 웃기다며 헤실거렸다.

“왜 린스컴이냐고.”

“나, 몸 작아서. 큰 투수들의 재능을 받아도, 그 공이 안 나가요.”

“작은 투수들 중에 다른 투수들도 많잖아. 린스컴은 부상 때문에 빌빌거리고 있고.”

“빌빌?”

“몇 년 반짝하고 작살났잖아.”

“신경 안 써요. 시간도 어차피, 별로 없고. 헤헤.”

속이 없는 녀석처럼 자꾸 헤벌레 웃는다. 일본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에는 서로가 서로를 낯설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 처음 넘어와서 어색했던 일주일 정도를 지나가자 후지는 영락없는 스무 살 어린애처럼 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국에 넘어와 아는 사람도 한 명 없는데다가,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공유하고 있으니. 가끔 둘만 있을 때 비밀을 털어놓다 보면 지혁조차도 후지에게 위안을 얻곤 할 정도이니까. 후지는 지혁에게 심정적으로 꽤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 오늘 나 끝났는데. 캐치볼 할래요?”

“자꾸 형이라고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해요? 아저씨?”

“미쳤냐?”

아저씨는 아저씨인데. 후지의 입장에서는 그냥 여섯 살 많은 형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후지는 자꾸만 지혁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질척거렸다.

“에휴. 왜 하필 너냐. 좀 생각 있는 놈이면 좋았을 텐데.”

“응?”

“됐어. 못 알아들었으면 됐다.”

지혁은 애꿎은 뒷머리만 긁었다.

신은 왜 굳이 후지를 골랐을까. 아마 쿠팩스나 구든을 선택했던 것처럼 분명한 이유가 있을텐데. 아직까지는 그 이유라는 게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물어봐도 대답도 해 주지 않고. 어쩌면 진짜 그냥 골랐는지도 모른다. 후지 미유타라는 이 허무맹랑하면서도 또 동질감이 느껴지는 존재가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

플로리다의 겨울은 많은 야구인들이 몰리는 일종의 성지다. 전 세계에서 야구에 몸을 담고 있다 싶은 사람들은 겨울에 무조건 두 곳을 찾는다. 플로리다와 애리조나. 중남미에서 윈터 리그를 뛰는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수들이 이곳에서 몸을 만들기 시작한다.

12월이 지나가고 1월에 접어들면서, 1월 말을 넘어서서 2월을 눈앞에 두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플로리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 문!”

“크리스. 머리 안 잘랐어?”

“하하하. 아직 조금 더 기를 거야.”

트로피카나 필드의 잔디를 개보수 작업 중이라, 경기장에 작게 딸려 있는 실내 불펜에서 몸을 풀던 지혁에게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아처가 보였다. 단순한 곱슬머리를 넘어 머리에 폭탄을 달고 있는 것처럼 하고 나타난 그는 모자를 썼다기보다는 머리 위에 얹어뒀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머리를 길러 왔다.

“벌써 개인 캠프를 차린 거야?”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몸을 조금 푸는 거야.”

“넌 가끔 보면 일 년 내내 야구를 하는 것 같다니까. 조금 쉬기도 해야지.”

“많이 쉬었어. 좀이 조금 쑤셔야지. 하하.”

“작년에 루키 오브 더 이어를 탔으니, 이번엔 사이영이라도 딸 작정인 거야?”

“난 솔직히 사이영 같은 건 관심 없어. 잘하면 어련히 알아서 주겠지.”

“워~워. 작년에 신인왕을 받아야 된다고 눈이 돌아갔던 녀석이 그런 말 하면 아무도 안 믿어 준다구. 하하.”

아처의 농담에 대꾸할 말이 없어진 지혁도 그저 웃고 말았다.

“휴가는 어땠어?”

“그냥 뭐, 바빴지. 오랜만에 한국도 다녀왔고.”

“오. 멋진데. 올해도 너의 그 엄청난 팬들이 라커룸으로 보내주는 거지? 선물 박스들?”

“내가 못 던지면 그것도 끊길지도 모르지.”

“워우! 안 돼. 안 된다고. 마시멜로가 들어간 초콜렛 파이는 내 인생을 바꿔 놨는데. 넌 올해도 무조건 잘 해야 해.”

“하하. 농담은.”

아처가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리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해맑게 웃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농담이 아니야.”

“아니라고?”

“응.”

“왜. 무슨 일인데?”

“무어가 트레이드 될 거야. 콥은 토미 존 서저리 받은 부위가 조금 안 좋아서 후반기는 돼야 돌아올 것 같대. 그리고 스마일리도 여전히 공을 못 던지고 있다고 하고. 후.”

“무어를 보낸대? 넌 어디서 들었는데?”

“방금 구단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이야. 체임 블룸이 말하더라.”

아처는 명실상부한 탬파베이의 에이스가 되었다. 작년을 기점으로. 탬파베이에 몸을 담은 시간도 5년이 넘어간 아처는 이제 팀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가 팀에 있는 동안 데이비드 프라이스, 제임스 쉴즈, 알렉스 콥 같은 투수조의 리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없을 때는 조엘 퍼랄타나 제이크 맥기 같은 불펜 투수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들 중 누구도 없다. 아처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아마 일찍부터 구단 사무실에 갔던 것도 그런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구단에서 네게 부탁했구나? 리더가 되어달라고?”

“흐음... 반쯤은 맞아. 감독님이 보드진에 요청했대. 그래서 체임이 날 부른 거고.”

아처는 여전히 해맑고 스웨그가 넘치는 친구였지만, 처음으로 떠맡은 투수조 조장의 위치가 나름대로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평소와 똑같이 하면 된다고는 하는데. 자리라는 게 또 마냥 그렇지만도 않잖아.”

“그렇지. 이해해.”

“아마 로테이션은 나, 너, 오도리찌, 스마일리, 그리고 안드리스로 돌아갈 것 같아. 엄청나게 젊은 거지.”

“그렇네. 30대는 한 명도 없고...”

“그래서 짐을 좀 나눠 지자고. 하하. 넌 작년 15승 투수니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충분히.”

“후.”

지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삶을 받은 이후에는, 전생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과 마주치고 있다. 선수의 가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주어지는 책임과 압박도 같이 늘어난다. 야구장 안에서는 실력으로 선수들을 이끌어야 하고, 밖에서는 행동과 리더십으로 이끌어야 한다.

아처는 이미 그 자리에 올랐고 지혁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아처도 지혁보다 꼴랑 두 살 많은 선수일 뿐이니까.

“우리 팀에는 위대한 클럽하우스 리더들이 있었어. 프라이스도 그랬고, 쉴즈는 정말 엄청났지. 콥도 자연스러운 리더였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그건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작년에 너는 루키였고, 라커룸 안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 보자고.”

아처가 손을 내밀며 멋쩍게 웃었다. 지혁은 아처가 내민 손을 잡아 흔들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철저하게 도와줄 테니까.”

“땡큐, 마이 브로. 올해도 잘 해 보자.”

아처가 눈을 찡긋거렸다. 지혁은 푹신푹신한 아처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답했다.

“이것도 다 숙명이니까.”

야구를 잘 하게 되면 따라오는 필연적인 숙명 같은 것이다. 라커룸 안의 분위기를 끌고 가야 하는 숙명.

묵묵히 야구만 잘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누군가는 챙겨야 하고, 누군가는 이끌어야 하고, 누군가는 자극해야 한다. 때로는 악역의 역할을 하기도 해야 한다. 선수들 사이의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야구장 안에서 영향력을 가진 투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탬파베이에서는, 아처나 지혁 같은 선수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번 시즌에는 정말 많은 과제들이 주어진 셈이다.

*

“야. 너 뭐하냐?”

“형!”

“너 이거 이해는 할 수 있어?”

같은 종이만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통역사는 아직이야?”

“아직. 지원자들, 패트릭 마음에 안 든대요.”

“그래. 그 사람 깐깐하지.”

후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이게 다 뭔데?”

“쇼케이스 보고, 계약 제시한 팀들이요.”

“이렇게 많아?”

“네. 그런데 어디가 제일 좋은지 모르겠어서요.”

“패트릭은 뭐래?”

“아무데나 오케이. 어디를 가도 충분하대요.”

후지가 인상을 썼다.

“문제는 그게 아니니까. 난. 월드시리즈 우승이 필요해요.”

지금 팀을 고르면 3년 이내에 이적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러니까 지금 팀을 고르는 건 후지의 인생을 건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지구 우승이나 디비전시리즈 우승권에 있는 팀에 들어가야 후지에게도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알아서 잘 살펴 봐.”

“도와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왜?”

“네 인생에 난 개입 안 해. 임마. 3년 남은 인생에서 내 선택 때문에 망하면 얼마나 날 원망하려고 그래? 알아서 잘 판단해.”

“흐응...”

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후지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며칠, 일주일, 열흘, 그리고 보름을 넘게 계속되었다.

그동안 지혁은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하고 또 동시에 근처에 사는 팀 동료들과 약속을 잡아 같이 식사를 하곤 했다. 팀에서 마련한 행사들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탬파 지역의 병원에 봉사활동도 다녀오고, 로컬 방송국의 홍보 광고와 특집 토크쇼에도 나갔다.

지금까지의 오프 시즌과는 조금 달랐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루키의 삶과는 다르게, 이제는 엄청난 기대와 주목을 받는 시즌을 치르는 투수의 삶을 보내고 있다. 마치 인생의 2부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은, 그런 나날들이었다.

패전처리 투수로 뛸 때는 이런 경험 따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마이너리그에서 시간을 보낼 때도, 그리고 루키였던 지난 시즌에도. 15승을 거두고 신인왕을 받고 난 이후부터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에서의 엄청났던 성원과 광고 활동. 그리고 미국에 들어와서도 끊이지 않는 행사, 광고, 행사, 광고.

“Whole new life(완전히 새로운 삶).”

공교롭게도 탬파베이와 연결되어 있는 협약 병원의 슬로건이 저것이었다. 지혁은 카메라를 보고 느끼한 말투로 ‘whole new life’라는 말을 수십 번도 더 해야 했다. 기분이 묘했다. 지금부터의 지혁은 문자 그대로,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경험해본 적 없는, ‘whole new life’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삶, 완전히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스프링캠프 소집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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